183화
* * *
C-197 구역, 천마의 숙소.
“네?”
“어려운 부탁인 것이냐?”
“아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그놈들이 좀 대단한 놈들이긴 하지만 지금의 너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가능하고 안 가능하고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러냐?”
아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놓고 저렇게 당당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 천마의 뻔뻔함은 정말 끝이 없었다.
“당연하죠. 무림에 가서 천마신교 장로들을 제 손으로 죽이라니요. 그게 도대체 무슨 부탁이에요.”
“네놈 손에 죽으면 그 이상한 공간에 머무르다가 결국 이쪽으로 넘어올 것 아니냐. 그럼 다시 내 부하가 되는 것이지.”
“천마 할배 외로워요?”
“그건 아니지만 명령할 놈들이 없으니 허전하구나.”
“아니, 그렇다고 저보고 가서 장로들을 죽이라고 하는 게 어딨어요.”
“뭐 어떠냐. 거기서 죽어야 여기서 진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을.”
“아무튼 저는 못 해요. 그렇게 죽는다고 무조건 현실에 실체화되는 것도 아니라고요. 그동안 제가 죽인 다른 행성 생명체가 몇인 줄 아세요? 이리로 넘어온 건 극히 일부라고요.”
“열두 장로를 모두 죽이면 한둘은 넘어오지 않겠느냐.”
“할배!”
“싫으면 관두거라, 이놈아.”
마침 이 말도 안 되는 대화를 끊어줄 사람이 들어왔다.
“천마 어르신, 왜 삐진 얼굴을 하고 계세요?”
최수영이었다.
“수호 이놈이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구나. 이 부탁을 할 사람은 이놈밖에 없는데 말이다.”
“무슨 부탁인데요?”
“무림에 가서 천마신교 장로들에게 인사나 좀 전해 달랐더니 저렇게 싫다고 난리를 부리지 않느냐.”
뭐? 인사?
“천마 할배. 나한테 얘기했던 거랑 지금 다르잖아요.”
“뭐가 다르냐, 이놈아. 오랜만에 만나 인사를 하다 보면 대련도 할 수 있고 그런 것이지. 일 대 십이로 붙자고 하면 장로들은 자존심이 상해 분명히 대련에 응할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최수영이 탓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천마 어르신이 장로님들한테 인사 좀 전해달라는 데 그걸 못 해줘?”
“아니! 그게 아니라니까. 저 할배 지금 아주…….”
“됐다! 고얀 놈. 해주기 싫으면 말거라. 나는 여기서 그냥 외롭게 살다 두 번 죽을 터이니.”
“아이고, 두 번 죽기는 싫으신 모양이죠? 그런데 저한테 장로들을 죽이고 오라고 해요?”
그제야 무슨 말인지 알아챈 최수영이 천마에게 고개를 돌렸다.
“지금 장로님들을 죽여달라고 부탁하신 거예요?”
“크흠. 그럼 몇 놈은 이리로 넘어올 수 있지 않나 해서 말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손을 휘휘 저으며 분명한 거절의 뜻을 밝혔다.
“절대 안 돼요. 저는 더 이상 그곳의 죽음과 엮이고 싶지 않다고요. 결과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고. 아시겠어요? 정 뭐 원하신다면 여기서 꼬장부리시면서 잘 계신다는 말 정도는 전해 줄게요.”
“고얀 놈. 필요 없다. 장로 놈들도 어차피 나 죽은 줄 알고 세상 편하게 지내고 있겠지. 그냥 여기서 또 제자나 만들어 봐야겠구나.”
“그래요. 여기서 무공에 소질 있는 사람이나 찾아서 제자로 받아보세요. 아, 시범을 보이기 전엔 미친 사람 취급당할 수 있다는 거 잊지 마시고요.”
하루가 멀다 하고 나를 불러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는 천마를 뒤로하고 지휘본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언제나처럼 조직원 몇 명과 허염환이 지휘 본부를 지키고 있었다.
“뭐 좀 나온 거 없어?”
내 물음에 열심히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허염환이 고개를 돌렸다.
“요즘은 조용해. 지상에 좀처럼 불사인이 감지가 되지 않아.”
“포기했을 리는 없고. 무슨 꿍꿍이지?”
“어쩌면 우리 수색 범위가 닿지 않는 곳에 소환진을 만들고 있을지 모르지.”
“그럴 수도 있겠군. 폐허가 된 지구 전체를 돌면서 수색을 할 수도 없고. 인공위성 같은 건 없어진 지 오래고.”
“그렇지. 혹시 지구 반대편 어딘가 나타나서 자기들끼리 나라를 만들고 숲을 되살리고 지낸다고 치자. 그럼 우리랑 서로 만나려면 수십, 아니 수백 년이 걸릴지도 몰라.”
“만났을 때 더 강해진 쪽이 상대를 점령하겠군.”
“그렇지. 어쩌면 다행인가? 지금은 수호 네가 없으면 저쪽이 압도적으로 강할 테니까. 하지만 우리 인류는 곧 다시 지상에서 번성하게 될 거야. 언제 만나느냐가 관건일 수도.”
“먼 옛날 유럽인과 아프리카인이 만났을 때처럼 말이지.”
“서로의 존재를 모르고 있다가 약한 쪽은 잡아먹히는 거야. 지금 우리에게 지구는 충분히 그럴 만큼 크니까.”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이제 완전히 내 쪽으로 의자를 돌려 앉은 허염환이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
“내가 찾아낼 거니까. 안 그래도 이 척박한 데서 겨우 살아가고 있는 인류인데. 그런 큰 리스크를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채 지낼 수는 없어.”
“역시 수호 너야. 널 안 데려왔으면 어떻게 됐을까? 이미 마물이 넘어오기도 전에 1차 몬스터 브레이크 때 인류는 멸망했을지도 몰라.”
“그럴지도. 그럼 이곳의 나도 같이 죽었을 텐데.”
“그건 그렇고. 어떻게 찾을 거야, 불사인은? 아무리 너라고 해도 하루에 왕복하는 거리에는 한계가 있을 텐데. 식량도 없이 무작정 길을 떠날 수도 없고. 혼자 이 지구를 다 뒤질 수는 없는 거 아냐.”
“나도 아직 생각 중이야. 어떻게 놈들을 찾아낼지. 어쩌면 벌써 이곳에 넘어와 있을지도 모르는데.”
“비행기라도 띄울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야. 아직 공기 중에 먼지가 너무 많아 비행 엔진을 사용할 수가 없어.”
“일단 몸으로 때워야지 뭐.”
* * *
평범한 날들이 지속되었다.
며칠에 한 번씩 괴생명체 출현.
오히려 천마가 신나서 처리해주었기에 그쪽으로는 한숨을 덜 수 있었다.
나는 매일 아침 방호복을 입고 지상으로 나가 순찰을 돌았다.
지도에 이동한 지역을 매일 표시하며 수색 범위와 방위를 넓혀 나갔다.
어느새 제법 넓은 대륙 전체가 내 수색 범위 안에 들어왔다. 같은 경로 재방문 빈도를 줄이며 계속해서 더 멀리 수색을 나갔다.
레온의 숲 복원 마법은 드디어 뉴플랜트사가 운영하는 지상 유리 하우스에 진출하였다.
내가 뉴플랜트의 연구원이었던 게 접근을 쉽게 하게 만들어 줬고, 레온의 C-197 지역 지하 벙커 농장 영상은 뉴플랜트 운영진의 눈을 동그랗게 만들기 충분했다.
레온은 당장 뉴플랜트사의 선임 연구원이 되어 지하 벙커에 했던 일을 만 배는 더 큰 규모의 하우스에 실행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와 최수영은 하루 혹은 이틀에 한 번씩 캡슐에 들어가 스테노를 만났다.
때로는 메타버스에 대한 복잡한 대화도 나누었지만, 보통은 그냥 예전처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세계 곳곳의 맛집을 탐험했다.
때로는 창밖을 보며 누가 현실 인간이고 누가 가상 인물인지 맞히는 내기를 했다.
나와 최수영이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현실 인간인 것 같은 사람을 지목하면 스테노가 맞는지 틀렸는지를 알려주는 식이었다.
물론 확률상 당연히 대부분의 내기는 스테노의 승리로 돌아갔다.
“아, 분명히 스테노 얘 허점이 있을 텐데. 그렇지, 수영아?”
“그러니까. 이번엔 정말 맞춘 줄 알았는데.”
노란빛 원피스를 입은 스테노가 꺄르르 웃었다.
“확률상 얻어걸리는 거 말고는 절대로 못 맞춰. 내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다고.”
“아니야. 분명히 차이점이 있을 거야. 우리가 반드시 알아내고 만다. 실제 인간하고 스테노가 프로그램한 가상 인물하고 똑같이 행동할 리가 없어.”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유지한 스테노가 대답했다.
“에이, 이렇게 잠깐 봐서는 절대로 못 맞춘다니까.”
최수영이 물었다.
“그럼 곁에서 오래 보면 알 수 있는 방법은 있어? 현실 인간인지 아닌지.”
“뭐, 꼭 따지자면……. 연산을 조금 줄이기 위해 NPC들은 좀 단조로운 삶을 살게 하긴 했어.”
“단조로운 삶?”
“응. 그 있잖아.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면서 사는 삶. 다들 너무 개성 넘치면 연산이 복잡해지거든. 생각해 봐. 이 지구에만 NPC가 몇 명인데.”
“그럼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이 NPC일 확률이 높다는 거야?”
스테노가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머금고 충분히 향을 즐긴 후 대답했다.
“아니. 왜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는 사람이 평범하다고 생각해? 세계에서 손꼽히는 재벌가의 자녀로 태어난 사람이 있다고 쳐. 또 어떤 사람은 엄청 빼어난 외모와 뛰어난 감정 표현력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쳐.”
꼭 내기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최수영과 나는 스테노의 말에 저절로 귀가 기울여졌다.
“그럼 그 두 사람은 남들이 보기에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겠지? 한 명은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재벌의 삶을 살 테고, 한 명은 최고의 영화배우가 되겠지. 혹은 연극배우 거나. 아니면 뮤지컬?”
최수영이 탁자를 탁 치며 받아쳤다.
“남들이 보기엔 평범하지 않은 삶이지만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며 산 거구나.”
“맞아. 정답이야. 제일 극단적인 예가 누군지 알아? 너희 주변에 가깝게 있는데.”
이번엔 내가 스테노의 말을 받아쳤다.
“천마.”
스테노가 박수를 짝짝 쳤다.
“정답! 천마 같은 무림인들. 우리가 보기엔 정말 독특한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내가 세팅한 무림이라는 세상에선 그게 환경에 순응하는 삶이야. 끝없이 강함을 추구하고 서로 이권을 다투는 환경. 거기에 순응하며 살고 있는 거지.”
“그럼 네가 프로그램하지 않은 현실 인간은 좀 다른 삶을 산다는 거네?”
“뭐 또 꼭 그렇지도 않아. 현실 인간들도 대부분 환경에 순응하며 살긴 하더라고. 특별한 케이스를 제외하고는 말이야.”
“특별한 케이스는 어떤 케이스야?”
“다양하긴 한데. 대표적인 케이스가 여기 내 눈앞에 있지. 김수호랑 최수영.”
“우리?”
“흙수저이면서 어떻게든 환경을 바꿔보려고 하고, 금수저이면서 그걸 누릴 생각은 않고 무슨 디펜서 같은 걸 한다고 나서고 말이야.”
“하하핫. 그건 수호 오빠 꼬시려고 그런 거지.”
“거짓말하지 마. 수호는 이미 수영이 너 좋아하고 있었는데 뭐. 그냥 그게 너희 둘의 삶의 방식이었던 거야. 순응 같은 건 하지 않지. 79억 지구 NPC를 모두 너희 둘처럼 프로그래밍했으면, 양자 컴퓨터도 그 연산을 버텨 내지 못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