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 * *
생각을 좀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저 앞에서 흉흉한 기운을 내뿜고 있는 자는 천마 할배의 아들. 뭐 둘이 어떤 감정으로 얽힌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들인 건 확실해 보였다.
그리고 잠깐이지만 이대 천마와 말을 섞어본 결과, 이 짓을 벌이는 이유가 아버지에 대한 잘못된 효심이나 전대 교주에 대한 충심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럼 내가 나서서 천마 할배의 뜻대로 저들의 싸움을 끝내야 하는 것일까. 천마의 아들을 죽여서라도.
아니면 천마의 아들이니 그냥 마음대로 설치라고 놔둬야 하는 것일까.
가서 천마 할배에게 물어보고 오자니 그땐 상황이 다 끝나있을 것 같고.
“쳐라!”
먼저 소리친 쪽은 천마였다.
천마의 뒤에 나열해 있던 오십여 명의 파천단이 빠르게 몸을 날려왔다.
“쳐라!”
이쪽 정파 연합의 무인들도 각자의 무기를 빼 들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천 명 대 오십 명.
말도 안 되는 숫자지만 파천단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정파 연합 무인들 속으로 파고들었다.
병법이나 진형 따위는 없었다. 그저 개인의 무위를 믿고 돌격해 올 뿐.
최수영이 물었다.
“오빠, 말려야 되지 않아? 저 파천단인가 하는 사람들, 천마 할아버지가 엄청 아끼는 사람들인데. 이대로 두면 다 죽는 거 아냐?”
“글쎄. 어느 쪽이 다 죽을지는 아직 모르지.”
“한 오십 명도 안 돼 보이는데? 하천단이 아무리 세다고 해도 이 많은 정파 무인들을 이길 수 있다고?”
“그건 힘들 거야.”
“그런데?”
“저기 저 검붉은 기운을 내뿜고 있는 이대 천마가 언제 싸움에 끼어드냐가 관건이겠지.”
“아…….”
화산의 언덕이 각종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로 가득 메워졌다.
확실히 파천단은 파천단이었다. 천 명에 달하는 정파 연합 무인들은 고작 파천단 오십여 명에게 학살당하고 있었다.
그나마 양 문파의 장문인을 포함한 몇몇 고수가 그들의 진격 속도를 늦추고 있을 뿐.
물론 하병룡이나 아미파 장문인에게 목숨을 잃는 파천단원도 속출하고 있긴 했다.
그때 천마가 천천히 언덕을 걸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스테노가 물었다.
“수호, 어쩔 거야?”
“그냥 놔두면 무림 정파 고수 태반이 죽거나 무공을 잃겠지?”
“지금 저 녀석의 기운을 보니 그럴 것 같네.”
“…확실히 그건 천마 할배의 뜻이 아니야. 수영이랑 스테노는 여기 있어.”
결심을 마친 나는 천천히 언덕을 걸어 올라갔다.
마주 보며 올라오는 나를 의식한 듯, 천마의 몸을 타고 뻗어 나오는 검붉은 기운이 더욱 거세졌다.
천마가 고개를 숙여 내 허리춤의 마그네타 검을 바라보았다.
“엄청난 검이군.”
“보는 눈은 있네. 근데 이 검은 안 쓸 거니까 걱정 마.”
“건방진 놈.”
“그것도 네 아버지가 나한테 많이 하던 말이야.”
“혹시 둘은 붙어본 적이 있나?”
“예전에 잠깐.”
“누가 이겼지?”
“그냥 중간에 그만뒀어. 계속하다간 천산이 다 무너질 것 같길래.”
“아버지가 꼬리를 내린 상대라……. 크하하! 기대되는군. 제대로 된 적수를 만났어. 널 아버지 대신으로 상대해 주마.”
“누구 대신인 건 싫은데. 그리고 천마 할배는 나한테 꼬리를 내린 적은 한 번도 없어. 죽으면 죽었지 그렇게는 안 할걸.”
“아버지가 죽어버렸다길래 폐관 수련의 목적이 사라졌었는데, 네놈이라도 나타나 다행이구나. 받아라!”
첫수는 천마가 먼저 펼쳤다.
양팔을 내 쪽으로 힘차게 뻗자, 그의 몸 전체를 두르고 있던 검붉은 기운이 팔을 타고 나에게 뿜어져 나왔다.
내력 출수 방식은 천마의 것과 유사했지만, 그 기운은 확실히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귀마왕과 귀자마모에게 느꼈던 마기와 유사하기도 하고…….
콰앙!
양팔을 엑스자로 교차해 놈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내공 공격을 막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으나, 막아낸 팔에 통증이 느껴졌다.
팔을 돌려보자 마물의 공격에 맞았을 때처럼 피부가 검게 괴사되어 가고 있었다.
물론 내구도를 양껏 올려놓은 덕분에 겉 피부만 조금 까맣게 괴사된 것에서 멈췄지만, 분명 마기와의 유사성이 있는 공격이었다.
“보기와는 다르게 외공도 탄탄하구나!”
괴사가 깊이 진행되지 않는 걸 보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그럼 이게 마기라는 걸 저놈도 알고 있다는 얘긴데.
이번엔 땅을 박차고 신형을 날려왔다. 양 주먹에 검붉은 기운이 뭉쳐나오는 게 보였다.
받아주지.
나 역시 공중으로 몸을 띄웠다.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천마와 나의 몸이 공중에 얽혔다.
몇 차례의 공방을 주고받은 후.
퍼엉!
내 손바닥이 천마의 가슴팍에 깊이 들어갔다.
천마는 한참을 뒤로 날아가 저 멀리 보이는 바위 절벽에 부딪쳤다.
콰앙!
절벽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화산 전체에 울려 퍼졌다.
정파 연합과 파천단의 전투도 잠시 멈춰졌다. 모두의 시선이 천마를 날려버린 내 쪽으로 향했다.
투둑, 투둑.
저 멀리 절벽에서 바위와 돌들이 떨어져 내리는 소리 외에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잠시 후.
머리와 옷이 엉망이 된 천마가 공중에 둥실 떠올라 다시 우리가 있는 곳으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크흐흐. 내가 방심했군.”
천마 주변에 피어오르고 있던 검붉은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니, 놈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흐으읍!”
드드드드.
놈이 떠 있는 곳 아래에 있던 작은 돌과 나뭇가지들이 하늘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천마의 몸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역시. 정상적인 무림인의 기운은 아니었군.”
“크하하. 정상적인 방법으로 아버지를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자를 죽이려면 그자보다 강해지는 수밖에 없었지.”
“네가 딱히 더 강해 보이진 않는데?”
“건방진 놈.”
잠시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놈의 몸은 점점 더 커졌다.
이제는 만근염왕 이두복보다도 훨씬 커져 인간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크기가 되었다. 거의 테라 행성 불사인과 비슷한 크기.
마나의 흐름을 읽어 보니 놈의 몸 안엔 내력과 마기와 마나가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
혼탁하지만 강대한 기운.
“끔찍한 혼종이군. 더 뭐 제대로 붙어 볼 가치도 없다.”
“크흐흐흐.”
스릉.
오랜만에 허리춤에서 마그네타 검을 꺼내 들었다.
맨손으로 못 당할 것은 아니었지만, 저런 혼종이라면 그 정도 대우를 해줄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콰과과과!
오랜만에 꺼내 든 마그네타 검에서 대천흑룡이 뿜어져 나왔다.
이대 천마도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신 후 양팔을 뻗어 혼탁한 기운을 뿜어냈다.
아까 느꼈던 것처럼, 혼탁하지만 그 위력은 결코 부족하지 않았다.
하지만.
놈은 이번 공격을 피했어야 했다. 승부엔 영향이 없었겠지만 적어도 몇 합은 더 붙어볼 수 있었을 텐데.
일이 년 전의 파천흑룡이었다면 막아냈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의 파천흑룡은 저런 혼탁한 기세로 막아낼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기운이 아니었다.
콰앙!
두 기운이 공중에서 격돌했다. 하지만 잠시뿐.
대천흑룡의 거대한 아가리는 순식간에 이대 천마의 기운을 밀어내고 놈을 향해 뻗어 나갔다.
“이, 이건!”
천마는 그제야 기운을 거둬들이고 몸을 피하려고 했지만 대천흑룡이 더 빨랐다. 처음부터 피했으면 몰라도, 정면으로 맞붙을 생각을 했다면 이 세상에 대천흑룡을 막거나 피해 낼 수 있는 존재는 거의 없었다.
몸집을 잔뜩 불린 저놈도 마찬가지.
“크아아아!”
인간의 소리인지 마물의 소리인지 알 수 없는 비명을 지르며 거대한 몸이 대천흑룡에 맞아 찢겨나가기 시작했다.
“건…방진! 백 년을 스스로 동굴에 갇혀 얻은 힘이다! 내가 질 것 같으냐!”
휘이이.
대천 흑룡을 온몸으로 받아낸 이대 천마가 아직 공중에 떠 있었다.
온몸이 찢기고 갈라졌지만, 아직 숨은 붙어 있는 모양이었다.
“후우… 후우…….”
“제법이네?”
“도대체 네놈은 정체가 무어냐.”
“말했잖아. 네 아버지 말 전하러 왔다고.”
“제기랄. 망할 천마. 죽어서도 저런 괴물을 보내 나를 괴롭히는구나.”
겨우 숨을 가다듬은 이대 천마의 표정이 점점 차분해졌다.
“후우… 망할. 결국 내 인생은 이렇게 끝나는군. 하지만 천마가 보낸 저 괴물을 그냥 놔두고 갈 순 없지.”
‘……!’
순식간에 주변의 마나가 이대 천마를 향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무튼 저런 놈들은 그냥 물러서는 법이 없지.”
어느새 스테노와 최수영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때 가장 안전한 곳이 어딘지 이제 정확히 알고 있는 두 여인이었다.
“쟤 뭐 하려는 거지, 오빠?”
“응. 뭐 자폭이라도 하려는 모양인데.”
“내가 느끼기에도 기운이 엄청난데? 여깄는 사람들 다 위험한 거 아니야?”
“현실이 아니라 다행이다. 여기서라면 충분히 막아낼 수 있으니까.”
“아! 그거 있지?”
“응. 도대체 왜 꼭 저런 걸 준비하나 몰라. 예외가 없네.”
크드드득.
주변의 마나를 있는 대로 흡수한 이대 천마의 몸이 동그랗게 뭉쳐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어디가 어느 부위인지도 모를 정도로 동그랗게 말려 들어간 이대 천마는 하나의 커다란 공 모양이 되었다.
번쩍.
밝은 빛과 함께 엄청난 빛이 퍼져 나왔다. 주변을 다 삼켜버릴 것 같은 빛과 기운. 놈의 몸속이 그랬듯이 내공과 마기와 마나가 혼탁하게 섞인 불안정한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 나왔다.
놈의 몸속에서는 그 크기에 비해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이렇게 폭발하고 나니 혼탁한 기운은 더욱 큰 파괴력을 갖추고 사방을 집어삼키…….
려고 했다.
높게 치켜든 마그네타 검에서 검은 구름이 피어오르기 전까지는 말이다.
싸아아아.
화산을 통째로 집어삼킬 듯하던 이대 천마의 기운은 환풍기로 연기 빨려 들어가듯 마그네타 검에 흡수되었다.
주변의 모든 무인들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대 천마는 본인이 뿜어낸 기운과 함께 마그네타 검에 흡수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어딨더라.”
“뭐가?”
“천마가 준 게 있었는데.”
왼쪽 오른쪽 안주머니를 번갈아 만져보자 천마가 준 증표가 느껴졌다.
“찾았다.”
오른쪽 안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패찰을 하나 꺼냈다. 동그란 모양의 패찰에는 복잡한 문양과 한자가 뒤섞여 각인되어 있었다.
나는 천마의 패찰을 높이 들었다.
“파천단! 천마의 명을 들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