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 * *
쿠웅.
오십여 명의 파천단이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파천단이 내 손에 들린 천마의 패찰을 확인하는 데는 채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정파 연합 무림인들이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두리번거리는 사이, 나는 파천단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파천단 전 인원, 지금 바로 흩어져 정파 무림인들과 분쟁 중인 천마신교인들에게 내 말을 그대로 전해라.”
“존명!”
“천마는 죽지 않고 다른 공간에 살아 있다. 그리고 천마는 천마신교와 무림 정파의 충돌을 원하지 않는다. 모든 천마신교인들은 지금 당장 분쟁을 멈추고 천산으로 복귀하라.”
“존명!”
“장로들에게는 내가 직접 전달할 테니 파천단은 지금 바로 분쟁이 벌어지고 있는 각지로 이동하도록.”
“존명!”
파천단 인원이 빠르게 현장을 빠져나갔다.
하병룡 장문인이 곁으로 다가왔다.
“김수호 대협.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어찌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저 이 대 천마라는 놈이 마음에 안 들었을 뿐입니다.”
아미파 장문인도 옆으로 와서 예를 표했다.
“덕분에 큰 피해 없이 이대 천마를 처리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자, 이제 어서 정상으로 올라가죠. 천마신교의 장로들과 화산, 소림 연합이 붙기 전에요.”
* * *
같은 시간. 김수호 일행이 있는 산 정상.
“저기 모여 있구나.”
추멸염화 장희철의 말에 흡영흑수 구종석이 답했다.
“빨리 쓸어버리고 천산으로 돌아갑시다.”
“그렇게 쉬운 상대는 아닐 것이다.”
“흥. 그래 봐야 무공보다 체면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약골들뿐 아닙니까.”
만근염왕 이두복이 말했다.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떻습니까. 어차피 붙어야 될 거. 빨리 붙읍시다. 얘들아!”
이두복의 말에 그의 분파 수하들이 각종 무기를 꺼내 들었다.
“우리도 준비한다!”
구종석의 외침에 그의 수하들 수십 명이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렇게 차례로 십이장로의 명령이 떨어지며 천마신교의 정예 무인들이 돌격 준비를 마쳤다.
마지막으로 추멸염화 장희철이 낮게 외쳤다.
“쳐라.”
순식간에 수백 명에 달하는 천마신교의 열두 분파 무인들이 언덕을 넘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그제야 적들을 발견한 화산파와 소림사의 무인들이 각자 무기를 꺼내 들고 대응을 준비했다.
안쪽에 마련된 천막에서 화산파 장문인과 소림사 방장이 나왔다.
잠시 후 양 진영의 무인들이 서로의 병장기를 맞부딪치기 시작했다.
십이장로는 뒤에서 천천히 전투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십이장로를 의식한 정파 연합의 고수들 역시 뒤쪽에서 가만히 십이장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천마신교 진영의 추멸염화 장희철이 말했다.
“저기 뒤에 있는 놈들이 장문인과 방주인 것 같군. 이제 누가 처리할지 정해 보지.”
만근염왕 이두복이 먼저 나섰다.
“아까 그 땡중 놈은 너무 시시했수. 내가 한번 저 소림의 방장이란 놈이랑 붙어보겠소이다.”
산을 오르던 길 내내 말을 아끼던 일해빙장 황중로가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화산파의 장문인이라는 자는 내가 상대해 보겠습니다.”
장희철이 답했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나머지 장로들은 나와 함께 다른 고수들을 상대한다. 자, 어차피 맞붙은 거 시간 끌 필요 없지. 바로 들어가자.”
만근염왕 이두복이 먼저 그 거대한 몸뚱이를 하늘 높이 띄워 올렸다. 거대한 몸집에 비해 믿지 못할 만큼 가벼운 몸놀림.
그 뒤를 따라 다른 장로들도 몸을 튕겨 냈다. 장로들은 한창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곳을 넘어 정파 연합 진영의 뒤쪽으로 한 번에 날아갔다.
콰앙!
만근염왕 이두복이 날아오를 때와는 전혀 다른 몸짓으로 소림사 방장 위로 내려앉았다. 날아오를 땐 깃털처럼 가벼웠다면 내려설 땐 거대한 쇳덩이가 떨어지는 듯한 무게감이었다.
방장은 빠르게 이두복의 몸을 피해 냈다. 이두복은 거대한 소리를 내며 땅에 착지했다. 이두복이 내려선 땅이 그의 발 모양에 따라 움푹 팼다.
바로 이어 이두복의 공격이 시작됐다. 빠르면서도 묵직한 한 방 한 방. 방장은 지팡이를 들어 이두복의 공격을 흘려 가며 막아냈다.
동시에 일해빙장 황중로는 화산파 장문인을 공격해 들어갔다. 황중로의 양팔에서 한기 가득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며 주변 공기를 얼리기 시작했다. 화산파 장문인은 얇고 긴 검을 빼 들고 황중로의 기운을 베어냈다.
장로들의 공격을 어렵지 않게 막아낸 건 장문인과 방장뿐. 나머지 고수들은 장로들의 공격을 몇 합 받아내지 못하고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정파 연합의 내로라하는 고수들도, 정예 무인들도 모두 천마신교에게 밀리는 상황.
그나마 화산파 장문인과 소림사 방장이 천마신교의 두 장로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화산파 장문인의 검이 화려한 검로를 그리며 일해빙장 황중로를 괴롭혔다. 황중로는 중간중간 겨우 냉기를 뿜어내 장문인을 공격해 보았으나, 공격과 수비가 완벽히 조화된 화산의 검법 아래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밀리는 건 만근염왕 이두복도 마찬가지. 소림의 방장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두 명의 화산파 고수를 상대하던 흡영흑수 구종석이 말했다.
“장희철 장로. 아무래도 이두복과 황중로가 밀리는 것 같습니다.”
구종석의 말에 힐끗 뒤를 뒤돌아본 추멸염화 장희철이 답했다.
“그런 것 같군. 하지만 자기들이 싸워보겠다고 나선 걸 어쩌겠나. 고생 좀 더 하라고 해야지. 교주님이 오시기 전까지만 싹 정리하면 될 것 아닌가.”
정파 무림의 두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화산파와 소림사를 상대하는 것치고는 전혀 긴장감을 찾아볼 수 없는 두 장로의 대화였다.
그만큼 자신들의 실력에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정파의 기둥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저 무인들에게 일대일 승부로 밀릴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 와 있는 건 열두 명의 장로 모두. 십이장로가 한데 힘을 모은 이상 무림에 이들을 상대할 수 있는 세력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오히려 오랫동안 천산 안에서 고여 있던 자신들의 실력을 맘껏 펼칠 수 있다는 생각에 어느 정도 들떠있기까지 한 상태.
그때였다.
콰과과과!
장희철은 익숙한 기운에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에서 검은 용 한 마리가 수평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검은 용은 천마신교와 정파 연합 무인들의 머리 위를 지나쳐 거대한 바위로 이루어져 있는 산봉우리 꼭대기를 때렸다.
콰앙! 쿠구구!
거대한 바위가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흩뿌려졌다.
서로 뒤섞여 혼전을 치르던 양 진영의 무인들도 고개를 돌려 무너진 산봉우리를 바라보았다.
추멸염화 장희철의 입에서 짧은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대천흑룡!”
장희철은 고개를 돌려 검은 용이 날아온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놀랍게도 김수호가 서 있었다. 그 뒤로는 정파 연합으로 보이는 세 종류의 복색을 입은 무리가 따르고 있었다.
지금껏 한 번도 여유를 잃지 않았던 장희철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설마… 저쪽 편에 선 건가.”
일대 천마와 자웅을 다투던 인물. 아니, 사실 그가 이미 천마를 넘어섰음을 모두 짐작하고 있었다. 아무도 밖으로 말을 내뱉지 않았을 뿐.
천보익비 제갈평이 급히 달려왔다.
“장희철 장로님! 저, 저기 김수호 아닙니까?”
“맞는 것 같다.”
“뒤에 따르는 자들은 정파 연합인 것 같고. 설마 지금 우리 김수호와 싸워야 하는 겁니까?”
“그래야 할지도. 일단 상황을 파악한 후, 내가 손짓하면 모두 한꺼번에 김수호를 덮친다. 자칫 저자가 먼저 움직인다면 우리 모두가 당할 수도 있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제갈평이 전음으로 다른 장로들에게 장희철의 뜻을 전하는 사이, 장희철이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오랜만이네.”
“장희철 장로님. 오랜만입니다.”
다행이었다.
김수호의 표정과 말투가 딱히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자기 모르게 속으로 한숨 돌린 장희철은 내심 자신에게 놀라고 말았다. 이 정도로 저자에게 겁을 먹었단 말인가.
“잠깐 싸움을 멈추시지요, 장로님. 그리고 정파 연합 무인 여러분.”
자연스러운 암묵적 동의를 통해 일해빙장 황중로와 잠시 휴전 상태를 유지한 화산파 장문인이 물었다.
“젊은이는 누구시오? 처음 보는 자인데, 왜 우리 싸움에 끼어드는 것이오.”
조금 전 김수호가 보여준 대천흑룡은 화산파 장문인조차 조심스럽게 만들기 충분했다.
“싸움을 멈추기 위해 왔습니다. 천마신교와 무림 정파 연합은 더 이상 싸우지 않아도 됩니다.”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오?”
“이 대 천마는 죽었습니다. 여기 제 뒤에 있는 무당파와 아미파, 그리고 남궁세가 분들이 직접 보셨으니 증언해 주실 겁니다. 그리고 천마신교의 이번 무림 출두는 이 대 천마의 독단적인 명령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싸울 필요는 없습니다.”
무인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이미 천마신교에게 입은 무림의 피해가 막대하오. 그런데 젊은이가 누구기에 갑자기 나타나 이 싸움을 멈추라 마라 하는 것이오.”
그때 김수호의 뒤에 있던 하병룡 장문인이 앞으로 나섰다.
“천마가 죽은 마당에 서로 불필요한 전쟁을 벌일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여기 계신 김수호 대협이 파천단을 무림 각지로 보내 모든 전투를 중단하게 하라 명하셨습니다. 서로의 피해나 이익에 대한 부분은 차후에 풀어나가기로 하고, 일단 전투는 멈추는 것이 좋겠습니다.”
“허튼소리. 천마가 죽었든 아니든 여기 있는 천마신교의 십이장로는 이번 정사 전쟁의 주범이오. 이들과 이들을 따르는 저 무리는 오늘 이곳에서 모두 살아나가지 못할 것이오.”
화산파 장문인의 허세 가득한 목소리를 듣던 추멸염화 장희철이 피식 실소를 내뱉었다.
‘평생 화산에 틀어박혀 자기 처지를 헤아릴 줄도 모르는 미련한 자가 장문인 노릇을 하고 있군.’
장희철이 큰 소리로 물었다.
“김수호. 그대가 우리 교주님을 죽였다면 천마신교 전체를 적으로 둔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나타나 우리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제발 있어야 한다. 아무 이유가 없다면 천마신교는 직접 자기 입으로 천마를 죽였다고 말하는 김수호를 적으로 돌려야만 한다.
그때, 김수호가 품에서 패찰 하나를 꺼내 높이 들었다.
장희철은 한눈에 그 패찰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일대 천마는 살아계십니다. 저에게 넘겨준 이 패찰이 증거이며, 천마는 이 전쟁을 원치 않으십니다.”
이제야 장희철의 미간에 깊이 팬 주름이 펴지기 시작했다.
저 패찰을 들고 있다면 김수호는 충분히 천마신교에 명령을 내릴 수 있다. 게다가 천마가 살아계신다니. 이보다 좋은 소식은 없었다.
“정말 교주님이 살아계신가?”
“그렇습니다. 장로님들께 전할 말이 있다고 저를 이곳으로 보내셨습니다.”
화산파의 장문인 곽무진.
그는 이 상황이 점점 불편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