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 * *
나는 높이 들었던 패찰을 내려 다시 한번 들여다보았다.
이게 뭐라고. 좀 복잡한 모양이긴 해도 그냥 패찰일 뿐인데. 이것만 들어 올리면 천마신교의 모든 자들이 당장 불 속에라도 들어갈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새삼 이것이 천마의 힘이구나 싶었다. 이 패찰 하나로 일단 이 싸움의 절반은 해결이 되었는데, 문제는 나머지 절반이었다.
무림 정파 연합. 그중에서도 화산파 장문인이 자존심에 좀 상처를 입은 모양이었다.
연신 씩씩대며 내 쪽을 노려보고 있는 게 당장이라도 달려들 태세.
아니나 다를까. 일부러 내공을 잔뜩 실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대체 누구이기에 갑자기 나타나 전쟁을 중단하라 마라 하는 것이오. 듣자 하니 일대 천마의 전령 정도 되는 것 같은데. 조금 전 보여준 무력 시위도 그렇고, 이건 우리 정파 연합을 너무 무시하는 태도 아니오.”
뭐라 대답을 하려는데 무당파의 하병룡 장문인이 먼저 나섰다.
“이 분은 김수호 대협이십니다. 예전 우리 무당파에 문제가 조금 있을 때 도움을 주셨던 분입니다. 대협은 무림에 속하지 않은 분으로서 천마신교의 편도, 우리 정파 무림인들의 편도 아닙니다. 그저 불필요한 살생을 막고자 하시는 것뿐입니다.”
“아미타불.”
살생을 막고자 한다는 말에 소림사 방장이 합장을 하며 짧게 아미타불을 외쳤다.
화산파 곽무진 장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무당파에서 그자의 신분을 보증하겠다는 말이오?”
“저희도 김 대협의 신분을 모르니 보증을 할 수는 없으나, 무림에 해를 끼칠 분이 아니라는 건 보증할 수 있습니다.”
“장문인이 직접 이렇게까지 끼고 도는 걸 보니 무당파의 세대교체에 관여했다던 세외인이 저 김 대협이라는 자인 모양이구려.”
그때 곽무진 장문인과 합을 겨루던 일해빙장 황중로가 비웃음 섞인 말을 내뱉었다.
“김수호가 어떤 자인 줄도 모르고. 봐줄 때 얼른 꼬리를 말고 도망갈 것이지. 화산파의 늙은이가 눈치가 없구나.”
“뭐야?”
곽무진 장문인의 쾌검이 일해빙장 황중로의 목을 정확히 노리고 뻗어 나갔다.
화륵.
추멸염화 장희철의 불타오르는 오른팔이 화산파 곽무진 장문인의 쾌검을 막았다.
“우리 천마신교는 더 이상 싸움을 원하지 않소. 그쪽 정파 연합만 괜찮다면 우리는 이대로 천산으로 돌아가겠소이다. 물론 이번 전쟁으로 인한 피해와 책임 여부는 추후 무림맹과 충분히 논의토록 하겠소.”
“천산에 틀어박혀 자기들이 지존인 줄 알고 살아오더니 아주 하늘 높은 줄을 모르는구나. 화산파 전원! 전투 대열을 갖춰라!”
소림사 방장이 곤란한 표정으로 곽무진 옆에 사뿐히 내려섰다.
“잘잘못은 나중에 따지기로 하고, 일단 불필요한 살생은 피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전투를 더 벌인다면 승리 여부를 떠나 무림의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지금 저자들 말대로 이대로 조용히 물러나라는 말입니까? 여기는 화산 한복판입니다. 우리 화산파의 정신이 깃든 곳이란 말입니다! 마음대로 밀고 들어와 전쟁을 벌여 놓고, 갑자기 세외인 한 명의 등장에 썰물처럼 빠지겠다? 그건 우리 화산파를 능멸하는 것이오.”
“장문인…….”
“저 세외인 덕분에 무당파를 이끌게 된 하병룡 장문인이야 그렇다 치고. 방장님까지 이러시면 어쩝니까. 이대로 끝나면 그동안 흘린 정파 무림인들의 피는 뭐가 된단 말입니까. 이대 천마도 사라졌다는 지금, 저들을 완전히 패퇴시킬 기회입니다. 다시는 무림 땅을 넘보지 못하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 큰 살생을 막아보자는 뜻이지요.”
“됐습니다. 이미 화산파의 모든 무인들이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습니다. 다른 곳에 있는 수많은 문파와 세가의 무인들도 지금쯤 이곳으로 모여들고 있겠지요. 소림과 무당 없이도 이들과의 전쟁은 충분히 끝낼 수 있습니다.”
곽무진 장문인이 고개를 돌려 아미파 장문인을 바라보았다.
“어떻소이까? 아미파도 무림의 정의를 세우는 데 소소한 희생이 두려워 발을 빼실 생각이시오?”
아미파 장문인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곽무진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대 천마와의 결투에서 내 무위를 확인한 탓이리라.
망설이는 아미파를 보며 곽무진이 비웃음을 흘렸다.
“다들 저 세외인에게 기가 죽은 것이오, 여기 모여 있는 천마신교의 십이장로에게 겁을 먹은 것이오. 더 이상 싸움에 참여하지 않을 문파는 차라리 이곳을 떠나주시오. 사기 떨어뜨리는 표정을 하고 그렇게 멍하니 있으니 말이오.”
다 떠들었나? 이 정도면 나도 충분히 기회를 줬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서도 저렇게 말리는데 혼자 계속 고집을 피운다면 별수 없는 일이지.
“화산파 장문인.”
“무엇이오?”
“많은 사람 다치게 하지 말고 일대일 대결 어때요. 아, 혹시 자신 없으면 몇 명 더 같이 덤비셔도 됩니다. 여기서 지는 쪽이 조용히 물러나는 것으로 하죠.”
“뭣이?”
추멸염화 장희철이 손을 번쩍 들어 천마신교 인원들을 한쪽으로 물렀다. 여기저기 혼재해 있던 천마신교 인원들이 순식간에 썰물처럼 빠져나가 서쪽 언덕에 모였다.
손짓으로 수하들을 통솔하는 장희철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생긴 걸 본 것 같은데…….
“오만한 놈. 이리 내려오너라. 방금 한 말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다.”
소림사 방장도 지팡이를 들어 소림사 중들을 한쪽으로 물렀다.
여럿이 섞여 전투를 벌이던 중앙 벌판에는 이제 화산파 무인들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언덕을 걸어 내려가 그들에게 다가갔다.
내 바로 뒤를 최수영과 스테노가 따랐고, 그 옆엔 하병룡 장문인도 함께했다.
“운남! 운서! 다섯 사제와 함께 앞으로 나서라!”
쌍둥이로 보이는 두 무인과 그 둘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 세 무인이 앞으로 나섰다. 나이는 많지 않았지만 제법 정제되고 단단한 내공을 가진 자들이었다.
“분명 소협이 여럿도 상관없다 하셨소. 내가 직속으로 가르치고 있는 우리 화산의 일대 제자들이오. 이들의 합공을 받아낸다면 내 직접 소협을 상대해 드리겠소.”
“왜, 그냥 직접 나서시지.”
쌍둥이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닥쳐라, 이놈! 어디서 나타난 천둥벌거숭이인지 몰라도 지금이라도 대화산파 장문인께 예를 갖추지 못하겠느냐!”
놈의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섯 무인이 동시에 검을 빼 들었다. 과연 화산의 후기지수들답게 검을 뽑는 모습만 봐도 얼마나 깊은 수련을 한 건지 알 수 있었다.
나도 천천히 마그네타 검을 뽑아 들었다.
다섯 무인의 검에서 동시에 검기가 발현되는 것이 보이자마자, 사방으로 산개한 화산의 일대 제자들은 동시에 내 몸으로 검을 뻗어왔다.
간결하지만 완벽한 보법과 검로. 게다가 다섯의 합까지 뛰어났다. 동시에 파고들어 오는 다섯 개의 검은 퇴로나 피할 공간을 전혀 주지 않고 내 몸을 압박해 들어왔다.
하지만 애초에 퇴로나 피할 공간에는 나도 관심이 없었다.
검기조차 뽑아내지 않은 순수한 마그네타 검이 검은 잔상을 남기며 휘둘러지기 시작했다.
슥, 스윽, 슥.
마그네타 검이 검은색 선을 하나 그릴 때마다 화산 일대 제자의 검이 하나씩 잘려 나갔다.
1초도 지나지 않은 시간. 다섯 무인의 합이 워낙 좋아 오히려 시간이 더 단축되었다.
깜짝 놀란 화산의 일대 제자들이 튕겨 나가듯 뒤로 물러섰다.
그들의 검은 모두 절반이 잘린 채였다.
“아, 아니 어떻게.”
“이게 무슨.”
여기저기서 놀라움과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제 직접 나서시죠. 화산파 장문인.”
“개소리!”
아직 포기하지 않은 일대 제자들이 다시 달려들었다. 잘린 검을 만회하기 위해 더욱 짙고 긴 검기를 뽑아낸 상태였다.
이번엔 커다란 마법구를 다섯 개 만들어 동시에 쏘아 보냈다.
쾅! 콰앙!
제법 마나를 밀도 있게 운용해 만든 마법구였지만, 화산의 일대 제자답게 그들은 마법구를 모두 베어버리거나 쳐내는 데 성공했다.
제법이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바로 뒤이어 마그네타 검이 칠흑처럼 짙은 검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으악!”
“커헉!”
마그네타 검의 검기가 검은 부채와도 같은 호를 그릴 때마다 화산파 일대 제자의 팔다리가 하나씩 떨어져 나갔다.
“끄으윽.”
순식간에 다섯 무인이 팔다리가 잘린 채 바닥을 나뒹굴었다.
이번엔 이를 지켜보던 무인들에게서 일말의 탄성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넓은 분지엔 화산의 일대 제자 다섯의 고통스러워하는 신음만이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휘잉.
산 너머에서부터 날아온 커다란 바람 한 점이 이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모두 훑고 반대편으로 떠나갔다.
혈도를 짚어 지혈을 끝낸 다섯 제자는 이제 신음 소리까지 속으로 삼킨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자, 이제 나오시죠. 장문인.”
“뭐 하느냐! 어서 부상자를 옮겨라!”
일대 제자들을 챙긴 곽무진 장문인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어린 나이에 대단하군.”
“무림인들은 꼭 붙어봐야 안다니까.”
“건방진 놈.”
“저 대사도 다 똑같고 말이야.”
곽무진 장문인이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왼발을 앞으로 내고 오른발은 한껏 구부린 자세. 왼발과 함께 쭉 뻗은 왼팔 옆으로 오른손으로 가볍게 쥔 얇은 검이 위치해 있었다.
곽무진은 섣불리 달려들지 않고 몇 차례 자세를 바꿔가며 천천히 주변의 흐름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확실히 무림에서 본 중엔 꽤 높은 수준의 경지였다.
천천히 움직이며 자세를 바꾸는 와중에 그의 검은 검로를 만들고 그의 몸은 자연의 흐름을 제 것으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어차피 저러고 있는 도중에 먼저 공격을 펼칠 생각은 없었다지만, 나도 모르게 멍하니 곽무진의 부드러운 움직임에 시선을 뺏기고 말았다.
촤아악.
드디어 곽무진의 검이 커다란 호를 그리며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그의 검은 한 번에 나에게 닿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조금씩, 앞으로.
얼핏 보면 허공을 베며 조금씩 다가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검이 한번 휘둘러 질 때마다 나는 내 몸이 잘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지간한 무인이었다면 이제 그의 검을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이 가만히 서 있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일 것이다.
정말 대단한 검격이었다. 그가 천마와 붙어 이기리라는 보장은 없었지만, 이 검격은 나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줄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시엠브레의 미친 황제 마티아스가 검의 극치를 깨달아 자신이 곧 검이 되어 신검합일을 이루었다면, 화산파의 곽무진은 저 얇은 검 하나로 주변의 흐름과 상대방을 완전히 자신의 무(武) 안에 집어넣었다.
어느새 그와 나의 거리는 다섯 보. 한 걸음만 크게 내디디며 검을 휘두르면 나에게 닿는 위치.
지금껏 은빛 검신만을 뽐내던 그의 검에 이제야 짙고 푸른 검기가 맺혀 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