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 * *
“그래 건물이 많이 폐허가 되어 있긴 했지만, 처음부터 없는 것보단 낫겠지.”
스테노가 답했다.
“공기 중 먼지 농도 수치가 급격히 줄고 있어. 자외선 양도 그렇고. 십 년쯤 후면 천천히 지상으로 나올 준비를 해도 될 거야.”
“언니, 캡슐이랑 메타버스만 운영하고 있는 게 아니었구나?”
“그럼, 당연하지. 어떻게든 지구인들이 다시 예전처럼 생활할 수 있게 만드는 게 내 목표야.”
“그럼 스테노, 그건 어떻게 돼가? 메타버스 생명체들이 넘어오는 거. 막을 방법은 찾았어?”
“아니. 하지만 이번에 테라 행성 불사인들을 물리치고 나면, 현실에 위협이 될 존재는 별로 안 남아. 그래서 게이트를 닫아버리겠다는 거야. 더 이상 서로 엮이지 않으면 되니까.”
“그런가. 어쨌든 이번 불사인들이 마지막 고비이긴 하겠네.”
“그래. 수호 네가 이번 일만 처리하면 현실 지구의 인류에게 큰 위협은 없을 거야. 나도 수호 너를 현실로 불러올 생각은 못 했는데. 그 허염환이라는 애도 참 대단해. 조직을 만들고 활동하는 걸 그냥 놔두길 잘했어.”
“다 알고 있는데 놔둔 거야?”
“당연하지. 처음엔 사람들한테 캡슐에 들어가면 안 된다고 말하고 다니고… 얼마나 방해됐다고. 그 별종들을 다 없애버릴까 생각도 했었으니까.”
최수영이 깜짝 놀란 눈으로 물었다.
“없애버릴까 했다고?”
“응. 자꾸 사람들 선동하고 날 방해하잖아. 방위군 동원해서 없애버릴까 했는데, 그 사람들도 뭐 링크 감도가 낮게 태어나고 싶은 것도 아니니까 그냥 두기로 했지. 그랬더니 허염환이 이번에 큰 건을 하나 했네? 역시 인간은 대단해. 분명 내가 더 똑똑해야 하는데 인간은 뭔가 다르단 말이야.”
참… 인간을 좋아하는 AI였다. 스테노와 대화하다 보면 인간에 대한 애정을 떠나 존경심까지 느껴졌다.
“아무튼 다행이네. 염환 오빠가 우릴 불러줘서. 메타버스 기억도 없이 생전 처음 보는 금속 인간들한테 죽을 뻔했네.”
“그러게. 나도 그 생각했어. 지금처럼 뭐 어떻게 싸워보겠다는 생각도 못 해보고 벙커에서 벌벌 떨다 그놈들한테 죽었겠지.”
“전부 허염환 덕분이네.”
레온이 뛰어들어왔다.
“놈들이 왔어요?”
“응. 오고 있어.”
“저도 갈게요!”
“넌 안 가도 돼. 식물 연구나 계속해.”
“저 새로운 공격 마법도 연구해 뒀어요. 저도 갈 거예요. 정 그러면 후방에서 수영이 누나 주변에 실드라도 치고 있을게요.”
“그래? 그럼 너무 나서지 말고 꼭 후방에 있어. 수영이 다치지 않게 실드 확실하게 쳐주고.”
“네! 수호 형.”
* * *
한 달 후. C-197 구역 상황실.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허염환이 외마디 단어를 내뱉었다.
“온다.”
외부 카메라 중 이곳에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곳. 불사인 본거지와 지구인 구역의 길목에 새로 설치한 카메라의 영상이었다.
“역시 빙 돌아온다거나 하진 않는군.”
“카메라 같은 게 있다는 건 모를 테니까.”
“그 정도도 생각 못 하는 놈들에게 인류의 존속이 걸려 있다니.”
“저들에겐 카메라 대신 불사의 금속 몸과 마법이 있지.”
“방위군에 연락해.”
방위군과의 통신을 맡은 조직원이 고개를 돌렸다.
“방위군 사령부에서도 이미 영상을 확인한 것 같습니다!”
허염환이 고개를 끄덕이며 벌떡 일어났다.
“좋아. 마중 나가 보자고.”
망설임 없이 상황실을 나서는 허염환에게 물었다.
“너 정말 괜찮겠어?”
“뭐가?”
“여기 있는 게 낫지 않아?”
“인류의 존속이 걸린 날이야. 한 명이라도 더 나가야지.”
불현듯 메타버스 속에서의 허염환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이미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줄 알았던 녀석. 이 녀석은 결코 염세적인 놈이 아니었다.
저게 진짜 허염환이었구나.
최수영과 천마가 상황실로 들어왔다.
“놈들이 온 게냐?”
“네. 천마 할배 오랜만에 몸 좀 푸시겠네요.”
“예전 같은 호승심은 없어진 지 오래다만 여기 지하실에만 갇혀 있었더니 몸이 찌뿌둥하긴 하구나. 그래. 몸 좀 풀어야겠다.”
“수영이도 컨디션 괜찮아?”
“안 좋을 게 뭐 있어?”
“좋아. 가자.”
* * *
방위군 사령부.
“모든 구역 방위군에 전달하라. 전 부대 지상으로 집결.”
“예!”
“신병기는?”
“어제까지 팔백 대 조금 넘게 준비되었습니다.”
“천 대라도 채웠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군. 모두 지상으로 올려라.”
“예!”
“이 모양으로 두더지처럼 살고 있지만 지구의 주인이 누군지 알려줘야지. 상황병만 남고 모두 지상으로 나간다.”
“네!”
한 시간 후.
방위군이 모두 지상으로 나와 출병 준비를 마쳤다.
소행성 충돌 이후 지구상에 살아남은 생명체는 이곳 벙커에 자리 잡은 인간들뿐.
때문에 방위군의 주된 업무는 사실 치안 유지 쪽에 가까웠다. 외부엔 혹독한 자연환경만 있을 뿐 지구인을 위협할 적은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몬스터 브레이크 이후 얘기가 달라졌다. 김수호나 C-197 구역의 조직원들은 방위군을 답답해하고 있었지만, 이들도 이들 나름 새로운 적으로부터 인류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쌓아오고 있었다.
김수호가 마족과의 전투 영상을 방위군에 넘긴 이후 그 노력은 더욱 속도를 올렸다.
소행성이 충돌한 반대편에 자리를 잡다 보니 이곳엔 문명의 흔적이 드물었다.
대도시 아래 터를 잡았다면 비록 폐허가 되었더라도 건질 것이 있었을 텐데, 여긴 그러지 못했다.
방위군이 눈을 돌린 건 벙커 공사를 위해 투입된 중장비였다.
방위군은 과학자와 기술자들을 총동원해 방치되어 있던 로봇들과 중장비를 개조하기 시작했다.
소행성 충돌 당시, 애초에 벙커 공사를 전제로 이동해 왔기 때문에 인류는 각종 건설 로봇이나 중장비를 비행기에 싣고 와 이곳에 터를 잡았다.
게다가 건설 장비 대부분은 인류가 비행기를 타기도 전, 그러니까 소행성이 충돌하기도 전에 비밀리에 이곳으로 옮겨져 있었다.
그렇게 인류를 모두 수용할 수 있는 벙커가 완성된 이후 방치되어 있던 로봇과 중장비들이 인류를 지키기 위한 병기로 탈바꿈하기 시작한 것이다.
방위군 부대 맨 앞에는 땅을 파기 위해 개발된 로봇들이 각종 화기를 장착한 채 대열을 맞춰 서 있었다.
일부는 로봇인 채였지만 일부는 안에 병사가 타도록 개조되었다.
그 뒤엔 거대한 전술 탱크가 줄지어 있었다.
얼핏 보면 전술 탱크지만 자세히 보면 모두 건설용 중장비 위에 공격 화기를 설치해 만든 전차였다.
그 외에도 예전 기술을 바탕으로 급히 제작한 각종 병화기가 지상을 가득 메웠다. 그 중엔 음파 공격기와 레이저 무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급히 만든 탓에 모양은 허술했지만 모두 메타버스 지구의 무기보다는 훨씬 진보된 것들이었다.
C-197 구역에서 나온 병력도 대열 맨 오른쪽에 합류했다.
그 수는 스물 남짓. 많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가장 강력한 병력.
김수호, 최수영, 천마, 레온이 방호복을 입은 채 가장 앞에 서 있었고, 그 뒤엔 건설장비를 개조해 만든 전투 로봇에 조직원들이 타고 있었다. 그 중심에 있는 가장 큰 로봇엔 허염환이 타고 있었다.
전 부대에 연결된 무전기에서 사령관의 목소리가 퍼져 나왔다.
“출격!”
드드드드.
거대한 로봇과 전차들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뒤에는 각종 무기를 쥔 보병이 방호복을 입고 뒤따랐다. 보병의 수는 약 만 명.
다행히 오늘은 두꺼운 먹구름이 잔뜩 껴 있어 강렬한 자외선을 어느 정도 막아주었다.
* * *
불사인 진영.
앞서 행군했던 정찰대가 다급히 돌아왔다.
선봉에 서 있던 기사단장 가엘이 물었다.
“무슨 일이냐.”
“지구인들이 이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숫자는?”
“테라 행성에서 보았던 그 전차와 유사한 것들이 수백. 그리고 인간은 만여 명입니다.”
“전차가 있단 말이냐?”
“예. 오히려 테라 행성에서 본 것보다 더 크고 기괴하게 생겼습니다.”
“지구인도 대비를 철저히 한 모양이군.”
가엘은 뒤로 돌아 진영의 중심부로 향했다.
중심부엔 마법사들에 둘러싸인 사무엘 대마법사가 걷고 있었다.
“대마법사님.”
“가엘. 무슨 일이오.”
“지구인이 단단히 준비를 한 것 같습니다. 강철 전차를 앞세워 이곳으로 향하고 있다고 합니다.”
“전차라… 쉽지만은 않겠군.”
“이곳에 진을 치고 지구인들을 맞이합니까?”
“아니. 계속 진격한다. 최대한 놈들의 지하 기지와 가까운 곳에서 맞붙어야 한다.”
“그러면 여기부터는 진열을 맞춘 채 전진하겠습니다.”
“진격 속도가 너무 늦어지지 않도록 주의하게.”
“알겠습니다.”
기사단장이 다시 선봉에 서기 위해 뒤로 돌았다. 그때 사무엘이 기사단장을 다시 불러세웠다.
“가엘.”
기사단장이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네.”
“저쪽에 김수호가 있겠지?”
가엘의 눈빛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하지만 숙련된 기사답게 흔들림은 길지 않았다.
“정찰대로는 그것까지 확인이 힘듭니다.”
“먼저 보냈던 마법사들이 지구인들의 구역에서 속속 살해되지 않았나. 나는 이곳에 김수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자가 있던 지구와 이곳이 다른 곳이니 여기에 없을 확률이 더 높겠지요. 소환진을 위해 먼저 보냈던 마법사 정도는 가볍게 해치울 수 있는 인물이 이곳에 있는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사무엘이 가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알겠네. 어쨌든 잘 살펴보게.”
“네, 알겠습니다.”
가엘이 다시 선봉에 서기 위해 자리를 떴다.
사무엘이 데클란에게 물었다.
“어때 보이느냐?”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애써 이곳에 김수호가 없을 거라고 단정하는 게 수상하긴 합니다.”
“가엘이 딴 맘을 품는다면 전력에 큰 구멍이 생긴다. 제1 기사단이 우리에게 등을 돌린다면 나머지 기사단을 모두 잃을 각오를 해야 해.”
“그런데 다른 기사단은 등을 돌리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시는 겁니까? 가엘을 존경하는 자들이 제법 될 텐데요.”
“차기 제1 기사단의 명예와 기사단장 자리를 약속했으니 어떻게든 공을 세우려고 할 것이다. 그게 칼이나 다루는 멍청한 기사 놈들의 한계이지.”
“이미 다른 기사단장들을 모두 포섭하셨군요.”
“가엘이 우리 시엠브레를 배신할 거라고 먼저 말해 준 것밖에는 없다. 그리고 그 공석에 대한 약속을 살짝 얹었을 뿐이지.”
“가엘이 배신을 하지 않으면요?”
“지구인과의 전쟁 후에 더 쉽게 숙청할 수 있겠지. 증거야 만들면 그만이니. 아무리 가엘이라고 해도 나머지 기사단장이 모두 힘을 합쳐 달려들면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가엘의 운명은 달라지지 않는군요.”
“어쨌든 동태를 잘 살피도록 해라. 중요한 순간에 등을 돌려버리면 큰 피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으니.”
“네, 알겠습니다. 전투 마법사들에게도 단단히 일러두었습니다.”
사무엘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잔뜩 낀 먹구름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 마법은 잘 준비되고 있겠지?”
“네. 지금 보시는 대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