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 * *
다음 날.
지구인 방위군 진영.
전 군에 연결된 무전기에서 다급한 정찰병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저 앞에 보입니다! 오 킬로미터 전방입니다!
사령관이 짧고 굵게 명령했다.
- 전투 대형으로.
드드드드.
전투 로봇과 전차들이 대열을 벌리며 넓게 퍼져 나갔다.
“어차피 놈들은 근접전밖에 하지 못한다. 삼 킬로미터까지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화력을 퍼붓는다.”
방위군이 산개하는 동안 수만의 불사인 부대는 점점 더 다가왔다.
최수영이 물었다.
“시연 때 보니까 화력이 꽤 세던데. 다 쓸어버리는 건 아닐지 몰라?”
“그건 힘들 거야. 불사인의 수가 너무 많아. 첫 번째 포격 이후엔 뿔뿔이 흩어져서 이쪽으로 달려들겠지.”
“그다음은 저 일꾼 로봇들의 차례네?”
“아무래도 맨몸보단 훨씬 낫지. 출력이 좋으니 등에 짊어진 화력도 어마어마하고.”
“그다음은 뒤에 있는 보병들? 저 사람들은 괜찮을까? 불사인들을 당해 낼 수 있으려나.”
“저 사람들까지 휘말리기 시작할 때 바로 가엘에게 신호를 보낼 거야. 그럼 가장 선봉에 있던 제1 기사단이 바로 뒤로 도는 거지. 그럼 보병들까지 큰 피해를 입진 않을 거야.”
“그래. 사상자를 최대한 줄여야지. 그럼 우리도 그때 나서는 거지?”
“일대 혼전이 벌어질 거야. 수영이 너는 여기서 최대한 제1 기사단을 엄호해. 나는 사무엘을 찾으러 가야 하니까.”
“알았어. 별걱정은 안 되지만 혹시 모르니까 몸조심해. 위험하다 싶으면 잠깐 물러서기도 하라고. 오빠가 뭐 천하무적은 아니니까.”
“무슨 소리냐.”
천마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네?”
“김수호 이놈이 천하무적이 아니면 이 세상에 누가 천하무적이란 말이냐.”
아무튼 천마 할배는 천마 할배다. 이 와중에도 그게 중요한 모양이다. 천하에서 누가 가장 강한가. 그래도 이제 자기가 가장 강하다고 우기진 않는다.
“세상은 생각보다 넓어요, 천마 할배.”
“건방진 놈. 겸손한 척하기는.”
“건방지다는 말이랑 겸손하다는 말이 동시에 쓸 수 있는 말이에요?”
“그래서 척한다고 하지 않느냐. 건방진 놈.”
“됐고. 천마 할배 역할은 잘 알죠?”
“네놈이 말해 주지 않았느냐.”
“혹시 잊어버렸을까 봐 물어보는 거죠.”
“그 간단한 걸 잊어버릴 수가 있느냐?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마주보고 있는 불사인을 모두 죽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네. 같은 쪽을 바라보고 있는 불사인은 우리 편이니까. 마주 보고 있는 불사인만 전부 죽여요. 최대한 많이. 최대한 화려하게.”
“화려함은 강함의 척도가 아니거늘. 왜 화려하게 하라는 것이냐.”
“그래야 우리 편 불사인들이 천마 할배한테 감동을 받죠. 손쉽게 수하로 부리려면 강한 첫인상 정도는 심어줘야 하지 않겠어요?”
천마의 얼굴에 미소가 서렸다. 어떻게 보면 천진난만한 미소이고 어떻게 보면 지옥에서 온 악마 같은 미소였다.
“그렇단 말이지? 흐흐.”
충분히 자제하고 감추고 있는 것 같은데 내 피부를 통해 천마의 살기가 스며들어왔다. 아무래도 저건 악마의 미소가 맞는 것 같다.
최수영, 천마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무전기로 총사령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발포하라.
위이이잉.
거대한 중장비 위에 설치된 무기들이 독특한 진동음을 내며 발포를 준비했다.
몇 초 후.
번쩍.
몇 대의 중장비에서 밝은 빛이 번쩍였다.
콰아앙! 콰앙!
동시에 불사단 진영에서 강렬한 폭발이 일어났다.
지이잉.
다음으로는 음파 공격이 발사됐다. 음파의 진행 경로를 잘 컨트롤해 아군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않고 적군 진영에 음파 공격을 내다 꽂았다.
슈웅, 슝.
다연장포에선 비교적 구식의 미사일이 불을 뿜으며 날아갔다.
쾅! 콰광!
구식이라고 위력이 작은 것은 아니었다.
몇 차례의 다양한 포격이 지나간 후 사령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대비하라! 곧 불사인들이 산개해서 들이닥칠 것이다!
지금까지의 차분한 말투와는 달리 한껏 격양된 음성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법사와 기사가 뒤엉킨 불사인들이 사방에서 덮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법사들은 힘겹게 기사들의 뒤에 따라붙으며 버프 마법을 펼쳤다. 버프 마법을 받은 기사들은 시퍼런 검기를 뽑아내고 지구인을 공격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콰앙!
불사인 기사 한 놈이 휘두른 검이 일꾼 로봇의 팔과 부딪쳤다. 커다란 소리와 불꽃이 튀었지만 로봇의 팔은 다행히 한번에 잘려 나가지는 않았다.
워낙 강도 높은 소재로 튼튼하게 제작된 덕분이었다.
일꾼 로봇은 불사인의 검을 막아낸 후 어깨에서 화염을 뿜어냈다. 놀란 불사인이 뒤로 물러섰으나 바로 뒤이어 수백 개의 쇠 구슬이 로봇의 등 뒤에서 발사되어 불사인의 몸에 박혔다.
예상외의 공격에 불사인 기사 하나가 순식간에 전투 불능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뒤따른 기사의 검이 로봇의 약한 부분을 정확하게 노리고 찔러 들어왔다.
푸욱.
깊이 들어가 박힌 검 끝에 로봇에 타고 있던 지구인의 몸이 뚫리고 말았다.
곳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불사인들의 검기나 마법 공격에도 쉽게 부서지지 않는 일꾼 로봇들은 제법 잘 싸워주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문제는 압도적인 불사인의 숫자였다.
게다가 죽여도 시간이 지나면 되살아나는 불사인은 지구인들에게 공포를 심어주기 충분했다.
결국 일꾼 로봇의 방어 라인이 뚫리고 말았다.
일반 병사들이 들고 있는 무기들도 제법 괜찮은 화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불사인 기사의 검기나 마법 공격이 쏟아질 때면 속수무책으로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수영아.”
“응, 오빠.”
최수영이 미리 준비해 두었던 화살 하나를 하늘 높이 발사했다.
쐐애액.
펑!
공기를 가르며 높이 올라간 화살은 잠시 후 불꽃놀이처럼 터졌다.
기사단장 가엘과 약속한 신호탄이었다.
촤악.
가엘이 가장 먼저 나섰다. 그의 옆에 있던 마법사의 목을 그대로 베어버린 가엘은 뒤로 돌아 불사인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의 모습을 본 제1 기사단 전원이 몸을 돌렸고, 제2 기사단까지 몸을 돌렸다.
가엘의 배반에 호응한 건 제2 기사단까지인 것 같았다.
곧 두 기사단과 나머지 불사인들과의 혼전이 벌어졌다. 제1, 2 기사단은 마법사의 버프 없이 싸워야 했지만 제1 기사단 한 명 한 명의 실력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그때였다.
공중에 붉은 장삼의 노인 하나가 나타났다.
천마.
마나의 흐름을 통해 그의 몸속 내공이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위기감을 느낀 마법사 몇몇이 천마를 향해 마법 공격을 퍼부었다. 하지만 그 공격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호신강기에 부딪쳐 튕겨 나갈 뿐이었다.
그의 몸을 중심으로 거대한 회오리바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주변의 마나를 활용한 것도 아니고 오로지 자기 몸속의 내공만을 이용해서 저런 짓을. 대단하긴 대단한 할배였다.
계속해서 몸집을 불려 가던 회오리는 천마의 손짓 한 번에 불사인 진영 한가운데로 휘몰아쳤다.
몇몇 불사인이 회오리바람에 휘말려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런데 이상했다. 화려한 걸 보여주라곤 했지만, 천마가 쓴 내공에 비해 너무 효율이 낮은 공격이었다. 기껏해야 토네이도를 하나 만든 것뿐.
그때 천마의 양손에서 검붉은 기운이 뿜어져 나와 자기가 쏘아 보냈던 회오리를 강타했다.
강하게 회전하는 회오리바람은 천마의 기운을 자연스럽게 감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콰과광! 콰광!
천둥이 울리고 벼락이 쳤다. 그리고 검붉은 천마의 내공을 고스란히 받아들인 회오리는, 이제 부딪치는 건 무엇이든 폭발시키고 파괴하는 무시무시한 괴물로 변해 있었다.
“미친… 대단하긴 하네. 천마 할배.”
“참 창의적이야. 그렇지?”
“응. 그럼 난 이제 대마법사 찾으러 다녀올게. 레온! 수영이 누나 잘 지켜!”
“네! 수호 형!”
* * *
“결국 기사단장이 우리를 배반했습니다!”
“나도 보고 있다.”
“그리고 공중에 떠 있는 저자는… 김수호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곳 지구에도 어마어마한 놈이 있었군. 저건 도대체 어떻게 한 거지? 마나를 이용하지도 않았다. 자연의 마나를 활용하지 않는 이상 인간 몸속에 있는 쥐뿔만큼의 내력으로는 저런 걸 만들어 낼 수는 없을 텐데.”
“기사단의 배신은 예상한 바이지만 저 붉은 옷을 입은 자와 지구인 병력의 화력이 생각보다 세다는 것이 변수입니다.”
“적당히 싸우다가 안 되면 물러나야겠지. 진영 뒤쪽에 마법진을 준비시켜라. 새로운 마법사의 탑으로 바로 연결되는 것으로.”
“네!”
“오늘의 목적은 이 싸움이 아니다. 저놈들의 힘이 강대하다 한들, 지하에 숨어 있는 나머지 지구인을 모두 없애고 나면 어차피 이 척박한 땅에서 오래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인간은 그저 뭉쳐야 살아남는 족속이니까.”
“그럼 지금 바로 작전을 시작할까요?”
“좋다. 시작하자.”
사무엘 대마법사가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높이 올렸다. 그 모습을 본 주변의 상급 마법사들 역시 두 팔을 높이 들어 올렸다.
마법사의 탑 이인자 데클란은 전령에게 뒤쪽에 마법진을 준비할 것을 지시한 후 역시 하늘을 향해 두 팔을 쭉 뻗었다.
시엠브레 마법사의 탑에서도 특히 마법 사용에 특출난 자들로 구성된 고위 마법사들 약 오십여 명. 사무엘을 중심으로 모인 그들은 모두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뻗고 있었다.
오십여 명의 고위 마법사들은 마치 한 몸이라도 된 듯 일대의 마나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무엘이 미리 알려준 마나 운용 방식에 따라 차근차근 동시에 마나를 하늘로 올려보냈다.
오늘 아침부터 잔뜩 껴 있던 먹구름이 순식간에 시커먼 색으로 더욱 짙어졌다.
애초에 오늘 내내 햇빛을 막고 있던 이 먹구름도 사무엘과 고위 마법사들의 작품이었다.
“후후. 지구인 놈들. 이제 끝이다. 우리와 전투 중인 군인 놈들 대부분은 남자. 지하에 쥐새끼처럼 숨어 있는 지구인들이 모두 죽고 나면 저놈들은 다음 세대로 이어지지 못한다.”
“이제 더 이상 이렇게 우리가 먼저 쳐들어올 필요도 없겠군요.”
“가만히 놔둬도 자멸할 것이다. 다음 세대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지. 몇 놈 제외하고는 두꺼운 보호구 없이는 지상에서 활동하지도 못하는 것 같으니 말이다.”
시엠브레의 건조한 환경 탓에 수백 년에 걸쳐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마법이었다. 원래는 넓은 지역에 비를 내리기 위한 마법이었지만, 사무엘 대마법사는 이 마법을 변형해 좁은 지역에 집중적으로 비를 퍼부을 예정이었다.
지하에 숨어 있는 지구인들은 모두 이 빗물에 의해 수장되고 말 것이다.
이를 위해 벌써 몇 주 째 이 일대에 먹구름을 모으고 있었던 사무엘이었다.
그리고 이제 곧 그 결실을 맺을 시간.
하지만 사무엘이 미처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이곳엔 마나의 흐름을 누구보다 민감하게 읽어낼 수 있는 인간이 있다는 것.
내력과 마나를 둘 다 자유자재로 운용하며, 극대화된 감각으로 마나의 아주 작은 움직임까지 모두 잡아내는 인물.
그는 이미 몇 주 전부터 하늘의 마나가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알아채고 있었다. 다만 사무엘이 본격적으로 나설 때만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지구인을 수장시킬 마법의 마나 운용의 마지막 단계가 진행될 때쯤, 어디선가 날아온 김수호가 그들의 앞에 내려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