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 종장 】
“누구냐!”
“전쟁에서 내 얼굴을 본 놈이 있을 텐데. 천마라고 한다. 기사단장이라는 놈을 만나러 왔다.”
“감히 단장님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비켜라. 죽기 싫으면.”
초소를 지키던 불사인 검사 한 명이 검을 빼 들었다.
그때 옆에 있던 기사가 다급히 검을 빼 든 기사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이봐, 우리가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뭐? 고작 지구인 한 명이다.”
“본거지를 지키느라 전투에 나가지 않아서 그러는 거다. 말도 안 되는 자이니 어서 검을 집어넣어라.”
그때였다.
“어억!”
천마가 허공섭물로 검을 빼 든 기사의 몸을 잡아당겼다. 기사는 속절없이 천마 쪽으로 끌려갔다. 공중에 몸을 조금 띄운 천마가 불사인의 두꺼운 목을 틀어쥐고 말했다.
“함부로 나에게 검을 빼 드는 놈은 모두 죽는다. 넌 처음이니 한 번만 봐주지.”
천마가 팔을 가볍게 휘두르자 불사인은 초소의 벽을 뚫고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기사단장에게 안내해라.”
“네, 네!”
한 시간 후, 기사단장실.
“전쟁 때 봤던 얼굴이군. 네놈이 기사단장이구나.”
“천마라고 하셨소?”
“그렇다.”
“전쟁 때의 그 인상적인 모습은 잘 보았소. 그런데 오늘 여기는 무슨 일이오?”
“보아하니 불사인 기사단은 마법사들의 지원을 받아야 제대로 된 싸움을 할 수 있더군.”
기사단장 가엘의 미간이 대놓고 찌푸려졌다.
안 그래도 마법사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가엘인데 기사단이 마법사의 지원을 받아야 싸울 수 있다니.
“보조 수단일 뿐이오. 기사라면 응당 개인적인 자존심보다 전투의 효율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뿐이오.”
“그래도 자세가 제대로 된 녀석이군.”
“뭐요?”
“무(武)에 심취한 놈 중엔 전투의 승패보다는 제 자존심이나 챙기는 놈들도 많은 법이니까.”
“강한 것은 알고 있지만 가르치려는 그 말투는 거슬리는군. 나 역시 수백 년간 불사의 몸으로 살아오며 검술을 연마해 온 몸이오. 물론 그런데도 그쪽보단 약한 것 같기도 하지만.”
“왜 수백 년간 수련한 네가 나보다 약한 줄 아느냐?”
콰득.
기사단장 가엘의 주먹에 핏줄이 돋아났다.
“약한 것 같기도 하다고 했지, 그런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을 만한 실력인 건 아니오. 어디 한번 붙어보시겠소?”
“되었다. 이제 내 제안을 들려주도록 하지.”
“제안?”
“단 십 년 안에. 너희 기사단 전원이 마법사의 버프인가 뭔가를 받았을 때보다 빠르고 강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들어 주겠다.”
“당신이 말이오?”
“그래. 아까 물은 질문에 대한 답을 내가 직접 하도록 하지. 왜 수백 년간 수련한 네가 나보다 약한 줄 아느냐? 나는 심지어 불사의 몸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데 말이다. 내공을 다루는 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걸 고쳐줄 수 있다.”
“이유는?”
“심심하다. 부하가 만 명도 넘었는데 이곳엔 하나도 없으니까.”
가엘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저 조그만 사내가 마티아스 황제나 사무엘 대마법사보다 훨씬 더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심해서라니. 지금 심심해서 기사단을 부하로 삼겠다고 혼자서 온 것이란 말인가.
“어떠냐.”
“무엇이 말이오.”
“내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있느냐?”
“터무니없다는 걸 알고 있지 않소. 지금 설마 우리를 모두 부하로 삼겠다는 말이오?”
“그렇다. 어차피 지구인들과 어울려 살기로 한 거 아니었느냐.”
“그렇다고 지구인의 부하가 되겠다는 말은 아니었소.”
“엄밀히 말하면 나도 이곳 지구인은 아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 강한 적이 나타날지 모르는 이 세상 속에서 더욱 강해질 방법이 있다는데 그걸 무조건 거절만 하고 있을 것이냐. 오히려 네놈들이 나에게 먼저 와서 무릎을 꿇어도 모자를 상황이다.”
저런 미치광이 같은 자의 주장이 정말 더 무서울 때는, 나름의 논리를 갖추고 있을 때이다. 그래서 가엘은 저 천마라는 자가 정말 무서운 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혼자 결정할 수 없는 일이오.”
“계속 대장 노릇을 하고 싶은 게냐?”
“당신 밑으로 들어갈 생각도 없지만, 대장 노릇을 하고 싶어서는 더욱 아니오.”
“그럼 선택을 좀 더 쉽게 해주마.”
천마의 양손에 엄청난 내공이 몰려들었다.
깜짝 놀란 가엘이 검을 뽑아들었다.
“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오늘 이곳 기사단 인원의 딱 절반을 죽이겠다. 그 절반엔 네놈도 포함이다.”
“이런 미친 자가!”
‘저자는 분명 나보다 강하다. 일을 벌이기 전에 내가 먼저 베어버린다.’
가엘이 먼저 움직였다.
가엘의 검에 푸른 검기가 맺히며 순식간에 천마의 허리를 베어 들어갔다.
검이 천마의 허리춤에 거의 도착했을 때쯤, 천마가 왼발을 움직여 가엘의 검을 차올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방어.
가엘의 검이 순식간에 위로 튕겨 올라갔고, 그의 몸에는 커다란 허점이 생겼다.
‘끝이군.’
상대가 되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공격 한 번 성공해 보지 못하고 바로 뒤이은 반격에 죽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가엘의 예상과는 달리 더 이상 공격은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천마의 양손에서 강한 내공이 뿜어져 나와 기사단장실 뒤쪽 벽을 강타했을 뿐이었다.
건물 뒤쪽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배우고 싶지 않느냐? 네놈의 수백 년의 노력이 잘못된 방향이었다는데. 그걸 바로잡아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이냐? 네놈들이 그 엄청난 불사의 몸으로 내가 알려주는 무공을 익히면 어디까지 강해질지 나조차 가늠이 되지를 않는데. 그걸 거부하는 것이냐?”
“이렇게까지 우리를 거두려는 이유가 무엇이오. 정말 심심해서 이러는 것이오?”
“무(武)의 끝을 보았고, 나는 유한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 나는 죽어 없어지더라도 내 무공을 후세에 남길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의미 있는 일이 아니겠느냐.”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온 천마가 가엘의 허벅지를 퉁퉁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하물며 내 무공을 전수할 자들이 늙지도 죽지도 않는 금속 몸을 가진 놈들이라니. 너희들이야말로 스승인 나를 뛰어넘을 수 있는 존재들이다. 물론 내가 죽고 난 후에도 나를 넘어서려면 몇백 년이 걸릴지 몇천 년이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하하.”
지구인들의 세력은 점점 더 커질 것이다. 그들은 이런 거대한 도시를 만들 만큼의 과학과 공학 기술을 가지고 있고, 무엇보다 자손 번식이 가능하다.
반면 불사의 몸을 얻은 대신 불사인은 더 이상 번식을 하지 못한다. 테라 행성에서도 그렇게 강압적으로 일반인을 찍어 누르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게다가 천마의 말대로 갑자기 또 어느 차원의 어떤 적이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은 세상.
더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최대한 이용해야 했다. 게다가 천마는 일반인이니 무한정 살 것도 아니지 않는가.
노인의 외모를 가지고 있는 천마가 죽기 전에 그의 무공을 배워 둔다면, 그가 죽은 후에는 지금처럼 일반인의 지배를 받지 않고 불사인끼리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그래. 이용하는 거다. 천마의 부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저자가 가지고 있다는 그 무공을 배우기 위해 이 상황을 이용하는 것이다.’
“…회의를 통해 결정하겠소. 바로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이니 시간을 주시오.”
“그래? 좋다. 여기 머물 것이니 내일까지 결정해라.”
“내일까지 말이오?”
“더는 못 기다린다.”
“…알겠소.”
* * *
같은 시각. 메타디펜스 본사 대표실.
스테노에게 불사인들과의 전쟁에 대한 얘기를 간략히 말해 주었다.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스테노가 말했다.
“대단해. 결국 마물에 이어 테라 행성 불사인들까지 다 물리쳤네.”
“다 물리친 건 아니지. 마법사들에게 반기를 든 기사단은 그대로 남았으니까.”
“거긴 천마를 보냈다며?”
“응. 천마 할배가 알아서 찾아갔어. 불사인 기사단을 전부 다 자기 부하로 만들겠대.”
최수영이 물었다.
“그런데 기사단장이 천마 어르신의 밑으로 들어가려고 할까?”
나 대신 스테노가 답했다.
“그렇게 될 거야. 몇백 년을 검술만 수련한 불사인들이야. 그런데 불사의 몸도 가지지 않은 천마가 자기들보다 훨씬 센 걸 봤으니. 천마의 무공을 당연히 배우려고 들 거야.”
“아무래도 그렇겠지. 천마 할배 아주 당분간은 즐겁겠어. 지금쯤 얼마나 신났을지 안 봐도 뻔히 알겠다.”
최수영이 스테노에게 물었다.
“언니. 그럼 이제 여기 메타버스는 게이트 다 닫을 거야? 불사인들 처리하고 나면 닫는다며.”
“응. 이제 닫으려고. 당분간은 여섯 개 메타버스 행성들은 서로 왕래를 할 수 없을 거야.”
최수영이 이번엔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오빠, 그럼 재외공관 사람들은 어떡해?”
“별수 없지. 그 행성에서 적응하고 살아야지 뭐. 돌아오려고 해도 쉽지가 않은 상황일 거야. 이미 꽤 자리도 잡았을걸.”
“그래. 다 데리고 다시 돌아오는 것도 일이긴 하겠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고.”
“응. 그 과정에 분명 또 현실 지구인과 연관된 죽음도 생길 테고. 그럼 현실에 실체화될 생명체들이 또 늘어나겠지.”
“아! 그것도 그러네. 근데 그럼 이제 메타디펜스는 어떡해? 게이트가 다 사라지면 이 회사는 할 일이 없잖아?”
“이미 다른 영역으로 사업도 많이 확장했고, 디펜서들은 이제 대한민국의 사설 방위 부대가 되어야겠지. 국력에 많이 도움이 될 거야. 기획실이랑 신사업개발팀에 미리 언질을 줬으니 다른 사업들도 잘 준비하고 있을 거고.”
스테노가 박수를 짝 쳤다.
“자, 그럼 이제 게이트 다 닫는다. 일주일 정도 걸릴 거야.”
“한 번에 다 닫히는 게 아니고?”
“응. 계산식이 워낙 복잡해야 말이지. 블랙 게이트랑 화이트 게이트랑 짝을 맞춰서 천천히 하나씩 사라질 거야.”
“이제 이곳 지구에는 평화가 찾아오겠네.”
“저쪽 현실 지구도 마찬가지지 뭐. 수호 네가 있으니 종종 실체화되어 나타나는 별문제도 되지 않을 거고.”
커피를 다 마신 최수영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제 밥이나 먹으러 가자.”
“오늘은 어디로 갈까?”
“프랑스.”
“프렌치 오랜만이긴 하네. 가자. 스테노 너도 괜찮아?”
“프렌치 완전 좋지.”
* * *
같은 시각. C-197 구역 지하 벙커.
삐이. 삐이.
경보음과 함께 붉은 경고등이 켜졌다.
“D 구역 상층부에 몬스터 출현! 에너지가 꽤 높게 나옵니다!”
“영상 띄워.”
“네!”
뒤에서 상황을 살피던 조직원 한 명이 허염환에게 물었다.
“천마도 없는데, 김수호 님을 캡슐에서 깨울까요?”
잠시 모니터를 응시하던 허염환이 대답했다.
“아니. 방위군에나 연락해.”
“네? 김수호 님 없이는 피해가 꽤 클 텐데요?”
“예전의 방위군이 아니야. 그리고 인류를 지키는 일인데 피해가 좀 있을 수도 있지. 수호가 큰 위협은 다 해결해 줬는데 우리도 이 정도는 스스로 해결해야지.”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