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 * *
오 년 후.
천마신교 가장 깊숙한 곳. 천마의 거처.
천마와 첨예한 대결을 펼치고 있는 인물이 있었다. 둘은 열 보 정도의 거리를 두고 천천히 맴돌며 서로의 빈틈을 확인했다.
김연희의 양손에서 뿜어져 나온 내력이 하나로 합쳐져 원구 모양이 되었다.
김연희의 상체만 한 원구 형태의 내력은 그대로 천마의 가슴팍에 날아가 꽂혔다.
퍼엉!
“크윽!”
내력 공격을 가슴에 정통으로 맞은 천마가 짧은 신음을 내뱉으며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으윽. 내가… 졌다.”
평생을 패도의 길을 걸어오고 마흔 살 넘어서는 그 누구에게도 졌다는 말을 내뱉어본 적이 없는 천마였다. 백오십 살이 넘었으니 백 년 넘게 아무에게도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던 셈이다.
그런 그의 입에서 졌다는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너무 쉽게 내뱉어진 패배의 한마디였다.
천마의 패배 인정에 김연희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꺄르르.”
천마가 앞섬을 툭툭 털며 일어났다. 그의 얼굴엔 흐뭇한 미소가 배어 있었다.
“이 늙은이를 이겨 먹으니 좋으냐?”
“재미써. 꺄르르. 천마 할부지랑 노는 게 제일 재미써. 체고!”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천마가 허공섭물로 김연희의 몸을 들어 올렸다. 많이 해본 솜씨인 듯 연희는 천마의 목마를 타고선 손뼉을 짝짝 쳤다.
“재미써! 재미써!”
“나도 재미있다, 요 녀석아. 살다살다 엄마 아빠 내력을 유전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녀석은 처음 보는구나.”
“유전? 그게 모야?”
“괴물 같은 네 아빠의 힘을 연희가 물려받았다는 뜻이다.”
그때, 넓은 거처의 한쪽 문이 열리며 한 쌍의 남녀가 들어왔다.
“뭐요? 괴물이요? 누가 괴물이에요?”
“왔느냐, 이놈아. 늦었지 않느냐. 여기가 무슨 어린이집인 줄 아느냐.”
“아빠! 엄마!”
* * *
김연희가 천마의 목 위에서 그대로 점프해 뛰어내리더니 나와 최수영이 있는 곳으로 달렸다.
어린아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달려든 연희는 그대로 내 품에 포옥 안겨 볼을 비벼댔다.
최수영의 등 뒤에는 연희보다도 한참 어린 갓난아기가 업혀 있었다.
천마가 최수영 뒤의 아기를 바라보며 물었다.
“둘째 놈도 똑같으냐?”
최수영이 답했다.
“뭐가요?”
“내력을 가지고 태어났냐는 말이다.”
“뒤집기 하다가 팔로 쳐서 침대 난간을 부숴버린 걸 보면 얘도 가지고 태어났나 봐요.”
“엄청난 가족이군. 무림 역사를 통틀어 부모를 잘 만나 타고난 강골로 태어난 경우는 봤어도, 날 때부터 부모의 내력을 물려받는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다.”
연희가 내 몸을 이리저리 타고 다니며 장난을 쳤다.
“저희도 들어본 적 없어요.”
“벌써부터 저런데, 제대로 수련을 하면 어떻게 성장할지 감도 오지 않는군. 아직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느냐?”
“천마신교에 입교시키는 거요? 에이. 괜찮아요, 천마 할배. 애들 교육은 우리가 시키도록 할게요.”
나와 최수영이 게이트를 깨버리고 이곳으로 넘어온 지 육 년.
우리 사이에는 네 살, 한 살 아이가 생겼다. 첫째는 딸이고 둘째는 아들이었다.
특이한 점은, 이 아이들이 태어날 때부터 아빠와 엄마의 능력을 물려받았다는 것이다.
연희가 막 걸음마를 뗐을 무렵, 갑자기 높이 점프해 펄펄 끓는 곰솥을 엎어 그 물을 다 뒤집어 썼을 때도 화상은커녕 흔한 물집조차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희는 마음대로 손바닥으로 내력을 발산하고 지붕 위로 한 번에 올라가거나 밖에 지나가는 강아지를 잡는다며 이 층 제 방 벽을 부숴버리기도 했다.
성인이 된 후에 내력을 얻은 우리와는 또 다른 양상이었다.
어린아이의 스폰지 같은 학습력. 그것도 날 때부터 자연스럽게 가지고 있던 내력. 어떨 때 보면 연희가 나보다 내력을 더 자유롭게 다루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리고 태어난 동생 연호. 내력을 가지고 태어난 건 누나를 쏙 빼닮았다. 너무 어린 탓에 높이 점프하거나 내력을 발산하진 못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누나처럼 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감히 나에게 어린애를 맡겨 놓고 다녀온 일은 잘되었느냐?”
천마 곁으로 가까이 다가간 최수영이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에이, 천마 어르신. 연희 보는 거 좋아하시면서.”
“크흠. 그저 신기해서 그런 것이다.”
“엄마! 연희가 천마 할부지 또 이겨써! 할부지 약해!”
“에이, 연희야. 할아버지가 봐주시는 거야. 천마 할아버지가 얼마나 세시다고. 연희 빤짝이 삼촌들이 얼마나 힘이 센지 알지? 그런데 그 삼촌들 다 합친 것보다 천마 할아버지가 더 세.”
“빤짝이 삼춘들 다 합친 것 보다? 빤짝이 삼춘들 힘 엄청 쎈데?”
빤짝이 삼촌들은 불사인 기사단을 뜻했다.
“그렇다니까. 할아버지가 연희랑 놀아주시느라 그런 거야.”
“흥. 어째뜬 연희가 이겨써! 그리고 천마 할부지 조아. 헤헤.”
나도 곁으로 다가가 천마의 질문에 답했다.
“말도 마세요. 헬리콥터까지 동원해서 다녀왔는데, 다른 수원(水源)은 너무 멀어요.”
“하지만 이제 곧 끌어다 쓰는 물이 부족할 거라고 하지 않았느냐.”
“무슨 수를 내봐야죠, 뭐. 굴착기로 수로를 파다가는 몇 년이 더 걸릴지 몰라요.”
“그럼 네가 파주면 되지 않느냐.”
“그렇긴 한데… 이제 좀 웬만하면 그런 일은 자제하려고요. 몇 번 안 나서보니 저 없이도 잘들 하던데요, 뭘.”
“그렇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나이가 고작 수로 파는 일이나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법이긴 하지.”
“꼭 그래서 그런 건 아니고. 어쨌든 방법을 좀 찾아보라고 해야죠. 겨우 얻은 수원이 벌써 말라가다니.”
나와 최수영이 가정을 꾸리고 두 아이를 낳는 동안 이곳 지구의 환경도 많이 변화되었다.
아직 오래 노출되는 건 위험했지만 평범한 인간들도 잠시 동안은 방호복 없이도 외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하우스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거대하기 짝이 없는 온실에서는 갖가지 농작물들과 가축들이 길러지고 있었다.
4천만 명에 달하는 인류가 먹기에는 아직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지만, 그래도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실제로 지구인들은 한 달에 두세 번은 캡슐에 들어가지 않고 현실에서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인류는 벙커에서 완전히 빠져나와 이곳 뉴시티에 자리를 잡았다. 처음 불사인들이 자리를 잡았던 그 도시였다.
고칠 수 있는 건물은 고쳐서 쓰고, 일부는 새로 건물을 짓기도 했다.
뉴시티의 동쪽 끝엔 천마와 불사인들이 지내고, 나머지 도시엔 지구인들이 골고루 분포되어 다양한 소속으로 나뉜 채 살아가고 있었다.
예전 지구로 치면 ‘나라’의 개념이 될 만한 집단이 여섯 개가 꾸려졌다. 아직은 유니온 상태였고, 여섯 개의 나라는 서로 협력하며 인류를 번성케 하기 위한 모든 일에 집중했다.
중간중간 반목도 있고 의견 충돌도 있었지만, 인류라는 존재는 위기 상황에선 정말 초월적인 단합력을 발휘하였다.
중앙은행이 생겨나고 새로운 화폐가 생겨났다. 물론 종이나 동전으로 된 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한 달에 한 번꼴로 있었던 메타버스 생명체의 실체화도 이제는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이제 넘어올 놈들은 거의 다 넘어온 모양이었다.
얼마 전엔 여섯 유니온의 대표자도 선출되었다. 놀랍게도, 지난 사오 년간 급격한 지지율을 끌어올린 허염환이 그 주인공이었다.
지지율 상승에는 메타버스와 현실의 기억을 모두 가지고 있는 허염환과 그의 조직원들이 지구인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를 넥시트가 모두에게 공표한 일이 크게 작용했다.
넥시트는 그 일 외에도 인류가 지구에서 생존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제시하고, 직접 참여했다.
한사코 거절했지만 나도 결국 한 자리를 차지하고 말았다. 대외안전보장국장. 현재 내 직함이었다.
“온 김에 불사인들 훈련 성과 좀 보고 가겠느냐.”
“지지난주에 봤는데요, 뭘. 저희 넥시트랑… 아니, 스테노랑 약속이 있어서 가봐야 해요.”
“뭐? 또 가본다고? 연희는?”
나는 연희를 내려놓고 물었다.
“연희 천마 할부지랑 더 놀고 싶어?”
“응!”
“더 놀고 싶다는데요?”
“걔 말고 나한테 물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연희랑 노는 거 좋아하시면서요. 뭘.”
“그저 신기해서 그렇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사이 최수영이 등에 업고 있던 연호를 내려두었다.
이제 막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연호는 몇 발짝 걷다가 앞으로 콩 넘어지고 말았다.
우리 부부의 아이들을 향한 사랑이 결코 부족한 건 아니었지만, 이 방에 있는 누구도 연호가 넘어지는 걸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저거 좀 넘어진다고 어디 다치거나 할 녀석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금세 벌떡 일어난 연호는 천마에게로 아장아장 걸어가기 시작했다.
“지금 뭐 하는 것이냐?”
“연호도 천마 어르신이랑 놀고 싶대요.”
“부창부수(夫唱婦隨)라더니. 수영이 너도 수호 저놈 따라 뻔뻔해져 버렸구나.”
“부탁 좀 드릴게요. 천마 어르신 말고 얘들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말이죠. 아시잖아요. 천마 어르신 말고는 아무도 이 애들을 감당할 수 없다는 거.”
은근히 천마를 치켜세우는 말투.
“크흠. 저녁 전엔 돌아올 것이냐?”
“그럼요. 스테노가 또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꼭 메타버스로 넘어오래요. 할 말이 있다고.”
스테노는 한 번씩 나와 최수영을 메타버스로 불러들였다. 긴히 할 말이 있다는 게 핑계였다.
나는 이미 몇 번이고 ‘여기서도 휴대폰이나 노트북을 통해 충분히 소통할 수 있지 않냐’고 주장했다.
하지만 스테노는 중요한 얘기인데 넘어오지 않으면 말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아 우리 둘을 기어이 메타버스로 넘어오게 했다.
막상 그렇게 넘어가 보면 절반 정도는 중요한 얘기이고 나머지 절반 정도는 그냥 심심해서 놀자고 부른 것이었다.
어쨌든 한 번씩 정말 중요한 정보를 주거나 논의거리를 던지기도 해서 우리는 스테노의 부름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럼요. 저녁 전에 돌아올 거예요. 좀 부탁드려요, 천마 할배.”
“크흠. 알았다. 이번엔 소고기를 단단히 준비해야 할 것이다.”
“소고기를요? 애들 하루 봐주고요?”
“왜, 싫으냐? 이 녀석들을 봐줄 수 있는 사람이 지구에 나밖에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럼 그 정도 지불은 당연히 해야지.”
황당해서 뭐라 대꾸하려는 내 팔을 최수영이 잡아끌었다.
“네, 어르신. 소고기 가져다 드릴게요. 저희 집에 보관해둔 게 좀 있어요. 오늘 저녁에 같이 먹어요.”
“좋구나. 내 오늘은 특별히 귀한 술을 내오도록 하겠다. 무려 오 년 산 백주(白酒)다.”
“그럼 다녀올게요, 할배. 연희! 연호! 할아버지 말씀 잘 듣고 있어! 말썽 피우지 말고. 벽도 부수면 안 돼.”
“네 아빠! 꺄르르. 천마 할배, 대련 또 해요.”
“응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