秦 書화 잦사직서.
"저 관두겠습니다.,,
"안됩니다.,,
또 시작이네.
그런 의중이 담긴 듯한 냉담한 어조였다.
그럴 만도 했다. 나와 그녀가 이러한 문답을 주고받는 건 하루 이틀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이번 주는 륽〜4번 정도밖에 하지 않은 것 같으니,
평소보단 다소나마 나은 편에 속하려나.
"이번 주만해도 벌써 20번째입니다. 사제님이 업무포기를 선언하신 게요
. 매번 사제님의 넋두리에 어울려 드려야만하는 제 입장도좀 생각해주세요.
••••이상하다.
신실한수녀님께서 신의 어전이나 다름없는 예배당 아래에서 거짓을 입에
담으실 리는 없을 텐데.혹시 이 수도교엔 나와 같은 처지인 동성동명의 동
지라도 있는 것일까. 확률이 희박한 가정이란 건 잘 알고 있었지 만, 부디 그랬
으면 좋겠다.
”수녀님 . 이번에 야말로 깨달았습니 다. 성녀님의 전속 수호사제 라는 직함
은 애초부터 제 몸에 맞지 않은 옷. 주신께서 제게 잠시 꿰어놓은 멍에일 뿐
이라는 사실을요."
"그러시겠죠."
■■무능한 인물이 중책을 꿰차고 있는 것만큼, 조직을 녹슬게 하는 악습은
없지 요. 지금이 라도 늦지 않았습니 다. 저 라고 하는 낡은 톱니 바퀴 를 한시 라
도 빨리 갈아 끼워 야만 합니 다.,,
"과연 그렇군요.,,
"제 뜻을헤아려주셔서 감사합니다.수녀님. 지금까지 신세 많이 졌습니다
. 언젠가 인연이 닿는다면 다시 만나뵙도록 하죠.그럼 이만."
”네.살펴 가십시오.레이지스수호사제님. 내일 있을 성녀님의 아침 식사
시간까지 돌아오시는 건 잊지 마시고요.,,
언제나처럼 평행선을 달리는 대화. 내 간절한 탄원을 듣고서도 코앞에
서류 더미에 시선이 고정된 수녀님의 모습은 난공불락의 철옹성을 보는 듯
했지만, 여기서 뜻을 굽힐 순 없었다.
마지막으로 체감해본 게 언제인지조차 가물가물한 평안의 한때를 손에
넣기 위해선, 내 가냘픈 육신을 짓누르는 이 무거운 직책만큼은 반드시 벗어
던져야 했으니까.
툭.
■사직서,라는문구가큼지막하게 적힌 봉투를 수녀님의 책상위에 조심스
레 내려놓았다. 언젠가드라마에서 봤던 것처럼 시원스레 내동댕이쳐볼까
도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서 행동을 아꼈다.
"이런 것까지 준비하신 걸 보니, 아무래도 이번엔 상당히 진심이신가 보군
"전 언제나진심이었습니다.,,
언제나 성심성의를 다해, 전심전력으로 그만두고 싶었습니다.
"이유를 여쭈어도 될까요?"
사무용 만년필로 책상 바닥을 톡톡 두들기며, 언짢은 심기를 은연중에 표
출 중이신 수녀님 께서 내 게 물음을 구했다. 그 의문은 지 당했다.
모름지기 성녀의 수호사제라 하면, 신을 섬기는 이들에겐 왕에게 하사받
는 작위보다도 영광스럽게 여겨지는 직책 이자, 신의 오른쪽 자리라고도 일
컬어지는 지고의 위치니까.
모처럼 당첨된 로또 1등 복권을 찢어버리는 어리석은 인간이 과연 있을까
?
내 거동을 살피 는 수녀님의 눈동자 속에 서 그러한 의 구심 이 을올히 피 어
올랐다.
"크흠. 장손으로서 친가쪽의 가업을 이어야 해서요."
"그거 이상하군요. 사제님께선 고아원 출생의 천애고독한태생이시지 않
으셨나요?,,
"사, 사실은 학생 시절 알고 지내던 교수님께 대학원생 제안을 받아• • …."
"사제님 아카데미 중퇴하셨잖아요.,,
"고향에 •••• 장래를 맹세한 약혼녀가 彆 • • •
■■성인식 날,급우분들에게 억지로끌려간 창관에서 여자손 한번 못잡아
보고 돌아오신 분이 퍽이나 그러시 겠군요."
"....손은 잡았어요."
급조해낸 궁여지책들이 차례차례 논파 당해버리자, 척추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 한 방울이 내게 위 기를 경종했다.
하기야, 성녀와 그 주변 인물에 관해선 몸의 새겨진 점의 개수까지도 암기
하고 있는수녀님에겐, 성녀의 전속 수호사제인 내 개인정보 같은 건 객관식
1점짜리 문제나 다름없을 터.
어설픈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 허나, 내게 닥친 현실을 있는 그대로 털어
놓을 용기는 차마 나지 않았다.
요근래 성녀님의 신체접촉이 도가 지나쳐도 너무 지나쳐, 더 이상 성직자
로서의 자신을 유지할 자신이 없기에 수호사제를 그만두고 싶다고.
그 말 같지도 않은 진실을 다른 누군가에 게 토로할 수 있을 리 없지 않은
가.
망상에 사로잡힌 광인 취급 받지 않는다면 그나마 다행이고, 어쩌면 성녀
의 명예를 실추시 켰다는 죄 목으로 종교 재판에 끌려 가게 될 지도 모를 일이
었다.
더군다나 바로 어제, 난데 없이 성녀님 에 게 가호를 하사 받고서,수 시 간 정
도의식을 잃어버리며 생긴 기억의 공백이 앞서 말한불안의 불씨에 기름을
부어대고 있었다.
의식이 끊어지기 직전의 직전까지 입술만큼은 안된다며 능욕계 소설 속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애원해봤으나, 성녀님의 지금까지의 행실로 봤을 땐
아마 저질러 버렸을 테지.
의식을 되찾은 직후, 내 상의 안쪽에 몸을 욱여넣고서, 굴속의 토끼처럼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성녀님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싫어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성 녀를 비호해 야 할 수호사제 가 고의 가 아니 라긴 하나, 그녀의 입술을 취
하고만 것이다.
하루빨리 이 나라를 떠 야 한다. 그 직후, 내 몸을 움직 이 는 사고회 로는 오
로지 그것 하나뿐이 었다.
"이유가 뭐 가 중요한가요. 애초부터 저 같은 것에 겐 과분한 자리 잖습니 까
. 제 자신의 한계는 제가 제일 잘 알고 있습니다. 저를 대체할 만한 재목은 주
변에 널리고 널렸고, 저보다 뛰어난 인재는 그 갑절은 있겠죠. 제 보잘것없는
능력으론 성녀님의 방패가되기는커녕 걸림돌이 될 게 분명합니다. 다른 사
람도 아닌 수녀님께서 그 사실을 모르실 리 없잖습니까.,,
11하아.... 彆
더는 못 들어주겠다는 듯, 한껏 구긴 미간에 손을 얹는 수녀님.
안다. 나도 잘 알고 있다. 시종일관 자기 비하를 일삼는 사람을 상대하는
것만큼 기 빨리는 일은 없다는 거.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렇게라도 안하면 이
곳에 뼈를묻게 생겼는데.물론물리적으로.
"알겠습니다. 사제님의 사직서. 수리해드리도록 하지요.,,
■■제 고국에는 독수리는 파리를 못 잡는단 말이 있습니 다. 이는 각자 능력
에 맞는일은따로있다는.... 彆 뭐라고요彆 •••?"
"사제님의 퇴직을 승인해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저기. . 彆 彆 저,정말요....?"
"네.오는 사람을 마다하지 않고, 가는사람을붙잡지 않는 게 저희 교단의
교리이니까요. 사제님 같은 귀중한 인재를 잃는 건 저희에게 있어 크나큰 손
실이 되겠지만, 사제님의 뜻이 그렇게까지 확고하다면 저로선 더 드릴 말이
없네요.,,
너무나도 시원스러운 수녀님의 태도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평소였다면 여기서 수십 분 정도 더 실랑이를 벌이다, 울며불며 애원하는
나를 다른 사제들을 호출해 물러나게 했을 수녀님이 이토록 간단히 내 청을
수락해줄 줄이야.
열 번 찍어 안넘어가는 나무 없다더니, 드디어 내 진심이 하늘에 닿은 게로
구나.
가슴 안쪽에서 용솟음치는 벅찬 감격을 호흡으로 다스리며, 이번 생 가장
큰 은혜를 보우하신 은인에 게 감사를 표했다.
"가, 감사합니다! 수녀님!,,
’'별말씀을요. 아, 그 대 신이 라기 엔 뭐 하지 만, 부탁 한 가지 만 드려도 될 까
요?"
"네! 당연하죠! 다른 누구도 아닌 수녀님의 부탁인걸요! 제 능력이 닿는 범
위 내에서라면 뭐든 해드리겠습니다!,,
"그럼, 이 서신을 제 대신 우체국에 전달해주세요. 그리폰 우편으로."
"네! 알겠습니다! 그리폰우편 말씀이시죠!,,
수녀님의 마음이 바뀌 기 전에 냉큼 받아든 서신은 한 눈에도 봐도 고급스
러운물건이었다.
종이의 재질, 봉납, 향수, 그 모든 것들이 왕실과 관계된 인물에게 보낼 때
나 사용하는 고급품들이었고, 더욱이 이 제도에서 가장 빠른 그리폰 우편으
로부쳐야한다고했으니, 상당히 급한용무의 서신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짐
작할수 있었다.
■■무척 이 나 귀 중한 서신이 니 관리 에 심 혈을 기울여주셔 야 합니 다. 혹여 나
그 서신을 훼손하시 기라도 한다면, 방금 말씀드린 전속 수호사제 사퇴 건은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그, 그 정도로 중요한서신이라니 •彆 ••이거 혹시, 왕실과관계된 •彆 彆 •."
"아뇨.왕실과는하등관계없는, 지극히 제 개인적인 용건이 적힌 서신입니
다.,,
"예? 그게 무슨…•."
지독한 겨울날의 한기처럼, 나와 수녀님 사이를 도연히 훑고 지나간 서늘
한 정 적 이 아주 잠깐 사고를 정 지 시 켰다.
이윽고, 호수에 물방울이 하나 떨어지는 듯한, 태연자약한목소리가 내 자
의식을 붙잡았다.
”갑자기 묘연해진 어느 사제의 행방을 오매불망 찾아 해메고 있는, 이 제
도에서 모르는 이 없는 유명 모험가파티에게 그 사제의 거주지를 기재해 보
내는지극히 개인적인… •"
"오물은 소각이다一!!!,,
내 몸을 지키기 위한 반사적인 행동이 었다. 손에 있던 편지를 가까운 화로
를 향해 황급히 집어 던졌다.
이글이글. 편지가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불타버리 기까지 그리 오
랜 시 간이 걸리 지 않았지 만, 새하얀 종이 가 시 꺼 먼 잿더 미 가 되 어 가는 그 찰
나의 시간 동안, 내 호흡이 멈춰 있었단 건 의심할 여지 가 없었다.
그만큼수녀님의 입에서 미끄러진 정보가 내게 있어 충격적인 것이었기에.
"어…•어떻게!,,
"서신을 불태워 버리셨으니 약조한대로수호사제 사퇴 건은 없던 일로하
겠습니다. 사제님.,,
"어떻게!도대체 어떻게!그걸••••!"
”아니면 이렇게 불러드리면 될까요? 전 용사파티 출신. 레이지스 로우빌
사제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