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잦 탈주
누군가 말했다.
힘들 때 우는 건 삼류고, 힘들 때 참는 건 이류이며, 힘들 때 먹는 건 육류라
고.
동물성 단백질을 향한 인류의 갈망을 이보다 적절히 표현해낸 명언이
달리 또 있을까.
채소나 과일 같은 것으론 결코 대체할 수 없는 그 압도적인 포만감은 인간
의 생활 전반을 지탱해왔고, 나아가, 보다 윤택한 삶의 청사진을 우리에게
자연스레 제시해주기까지 했다.
고기를썰어 먹기 위해 인간은 날붙이를손에 들었고,고기를구워 먹기 위
해 인간은 불을 발명해 냈으며, 먹음직 스러운 고기를 정 기 적으로 조달하기
위해 인간은 가축을 방목하기 시작했다.
그렇다. 인류의 진화는고기 불판 앞에서 시작됐다고 해도과언이 아닌 것
이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손님.주문하신 미노스 안심 스테이크와발틴산레
드 와인입니다.부디 좋은 시간되시길.,,
넌짓한 눈인사와 함께 소정의 팁을 건네는 것으로 웨이터에게 감사 의사
를 표했다.
무려 반년 만에 대 면하는 구성진 밥상이니 , 접대받는 쪽도 나름의 격식을
갖추는 것이 마땅한 도리일 터.
치이익. 지글지글.
고기 위로 비산하는 기름이 형형색색의 불꽃놀이처럼, 이따금 들려오는
고기 익는 소리가 관현악단의 합주처럼 느껴질 만큼의 감격이 투명한 이슬
한 방울이 되 어 눈가를 적셨다.
밍밍하고 텁텁한 감자, 누린내 나는 베이컨, 풀때기밖에 없는 부실한 스튜
로 어영부영 배를 채워왔던 지난 나날들, 그 모든 것들이,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의 감동을 위 한 조미 료였던 것이 아니 었을까.
훗날 퇴고해보면, 개소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너절한 논리가 사고를
지배해버릴 만큼, 두툼한 고기가 지닌 원초적인 마성은 어마무시했다.
도연히 코가 시큰거렸고, 식기를 든 양손은 무거운 아령이라도 쥐고 있는
것처럼 바들바들 떨려댔다. 절해의 비경에서 태산만 한 용을 마주한 순간에
도 이렇게까지 마음이 요동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아 맞다, 나그때 기절했
었지참.
가슴에 얹힌 이름 모를 상념을 날숨과 함께 덜어내고서, 다소 큼지막한 크
기로 잘라낸 고기 한 점을 조심스럽게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바싹 익힌 겉면에 선 풍겨오는 매혹적 인 불향과 촉촉하고 탱글탱글한 육
질이 자아내 는 하모니 는 그야말로 맛의 폭력 .
씹을 때마다 입안에서 범람하는 묵직한 육즙은 향이 진한 레드 와인으로
도 전부 씻어낼 수 없을 만큼의 매혹적인 자극을 내게 새겼고, 목을 거쳐 식
도로 내려가는 와중에도 본래의 거친 야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고기
의 존재 감엔 터져 나오려 는 경박한 탄성을 참아내 야 할 지 경 이 었다.
I
'살아있길 잘했어••••.
II
입이 아닌, 영혼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전생 때, 극단적인 채식주의 자들은 왜 항상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는 것일
까 종종 의구심을 품곤 했는데, 이 맛있는 걸 먹질 못하니 당연히 그럴 수밖
에.
그렇게, 새로이 깨닫게 된 이 세상의 진리 한소절을 반찬삼아,또한점,
고기를썰어 입에 넣으려 하자.
콰앙!
고요한 레스토랑에 예고 없이 내 리꽂힌 살벌한 파공성 이 태 평스레 평화
를 만끽하고 있던 내 자의식을 한순간에 마비시켰다.
"긴급 연락용 벌매를 수십 마리나 날려 호출했는데도 감감무소식이 길래,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나 했더니 •••••
II
꿀꺽.
그 직후 들려온 귀에 익은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녹록한 짜증의 기색이 가
뜩이나 팽팽한 긴장의 끈을 더욱 거칠게 잡아당겼고.
"어떠셨나요? 간만의 휴가는 즐거우셨나요? 물론 즐거우셨겠죠. 제 긴급
연락 같은 건 하등 귀에 들어오시지 않을 만큼, 즐겁고즐거워서 여념 없으셨
을 테죠.,,
또각또각.
서서히 음량을 불리는 그 기계적인 발걸음 소리가 어느덧 내 배후에 다다
라 등을 두드릴 무렵.
콰직!
내 식탁위에 자리한고기를포크로 내려찍은그녀가 여태껏 들어본것 중
독보적으로 살벌한 음색으로 고고히 말을 읊조렸다.
"대답.,,
"저기 • • … 일단, 그포크부터 내려놓고 이야기해 주시면 안될까요彆 彆 •• ?
수녀님 ••••?"
碢碢碢
이래선 안된다는 일말의 불안, 소위 말하는 양심의 가책 정도는 느끼고
있었다.
하던 일 멈추고 하루바삐 귀환하라는 수녀님의 긴급호출을 읽씹하고서
희희낙락 식도락을 즐기고 있었던 내 죄 질이 극심하단 건, 나 스스로가 제일
잘 알고 있었으니 까.
하지만무려 반년 만에 주어진 휴가, 언제 다시 맛볼 수 있을지 모르는 자
유를 목전에 두고, 차마 발을 돌리지 못한 나를 떳떳이 꾸짖을 수 있는 위 인
이 과연 몇이나될까.
그 어떤 성인군자라 하더라도 직장인의 탈을 쓰고 있는 이상, 한 번 줬던
휴가를 다시 빼앗으면 사자후를 내지르란 것이 자명하듯, 모처럼 얻은 황금
같은 휴가를 영위하기 위해, 눈물의 대탈주를 감행한 내 판단은 어느 정도
정삭참작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된다.
"말이나 못하면…•.
fI
처마 밑의 고드름을 연상케 하는, 차갑고 날카로운수녀님의 말이 연신 내
양심을 들쑤셔댔다.
우리 사이에 더 이상 잃어버릴 신뢰 같은 건 없으리라 여겼건만, 이전보다
눈에 띄게 냉랭해진 수녀님의 태도를보아하니, 나와수녀님 사이의 우호 관
계는 내 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보다 꽤 원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던 모양이
다.
뭐, 그것도 옛말이지만.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충분히 반성하고 있습니다. 한 번만 봐주
세요.,,
봐라. 성심성의를 담은 사죄에도 대꾸조차 없다.
짤랑, 그런 나의 비참한 몰골을 비웃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내 목 둔덕에
매달린 금속 조형이 몸을 뒤 챘다.
목걸이 라고 하기 엔 지 나치 게 몸집 이 비 대 한, 세 간 사람들이 흔히들 목줄
이 라고 부르는 흉흉한 물건.
일부 특수한 취향을 지닌 인종들을 제외 한다면, 억만금을 주어도 목에
두르고 싶지 않을 쇠붙이를 강제로 착의 당한 채, 그 쇳붙이에 자신의 행선
지까지 강요당하는 기분은 상당히 고까웠지만, 별수 있나.
이 모든 건 내 행실이 불러온 재앙인 것을.
'■저기 절대 도망가지 않겠다고신께 맹세할테니, 하다못해 이 목줄만이
라도 좀 풀어주시면 안 될까요?,,
"안됩니다.,,
버릇이 잘못 든 강아지를 훈육하고 있는 듯한 단호한 어투로 수녀님께서
내 목에 걸린 목줄 끝의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웅성웅성.
주위가 시끄러워졌다.
마을 대로변에서 목줄을 찬 사제를 태연한 얼굴로 산책시 키고 있는 수녀
님의 모습은 퍽 볼만한 구경거리긴 할테지. 나도 생판남의 일이었다면 먼발
치 에 서 그 참극을 비웃으며 무료한 일상에 흥을 돋기 위 한 술안주로 삼았을
게 뻔했으니.
”아니, 근데 도대체 무슨 사단이 벌어졌길래, 비번인 저까지 불려 나와야
하는 겁니까? 혹여나 있을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저보다 갑절은 유능한
대타까지 구비해놓으셨으면서 ••••. 솔직히 그 친구가 해결하지 못할 문제
라면 제 가 나선다고 해도 별 • • …."
"그 '갑절은 유능한 대타, 때문에 사단이 난 겁니다. 군소리할 여유가 있으
시다면 걸음이나 재촉해주시죠. 레이지스 수호사제님.,,
11 • • ••/
O"
碢碢碢
얼이 빠져 있다. 넋이 나가 있다.
이 런저런 창작물에 서 종종 보고 듣곤 했던 표현들이 지 만, 그 전형 이 라고
할 수 있는 표본을 두 눈으로 목도한 건, 아마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
"이거 살아는 있는거예요?,,
새하얀 석조 바닥 위에 우두커니 선 채 허망이 허공을 주시하고만 있는 낯
익은 사내를 가리키며, 수녀님에게 자세한 자초지종을 요구했다.
흡사 장인이 만든 밀랍 인형을 보는 것도 같았고, 조금 께름칙한 표현일지
모르나, 살아있는 인간을 그대로 박제 시켜 놓은 것이라 해도 무심코 납득해
버릴 만큼, 눈앞의 사내에게선 생자라면 마땅히 드리우고 있어야 할 기척들
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결여되 어 있었다.
로벨 라이트. 속칭, 라노벨 사제.
불과 오늘 아침까지 만 하더 라도, 쉴 새 없이 깐족거리 기 바빴던 그가 잠깐
사이에 이런 과묵한 인물로 변모한 건 내게 있어 호재라면 호재일지도 모르
겠으나, 그가 이렇게 된 경위 가 어땠느냐에 따라선, 그 뒷감당을 내가 하게
될 지도 모를 판국이 니, 마냥 기뻐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었다.
"담당의에 진단에 따르면 호흡과고동이 모두 정지해있으면서도, 일부 신
진대 사와 동공반사는 제 대 로 기 능하고 있는 기 형 적 인 상태 라고 하더군요.
실제로 최초 발견자인 메 이드 분은 그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여겼던 듯
하고요."
과연, 예배당 바깥에서 몇몇 메이드들이 대성통곡하며 초상을 치르고 있
었던 건 그런 이유에서였군. 다른 건 몰라도 자기 사람한테만큼은 살뜰했던
양반이 었으니 , 이 세 상 하직 했다고 하면 눈물 흘릴 하객들이 야 수두룩할
테지.
"성수나기도로는어떻게 안되던가요?"
"최상급 성수는물론이거니와, 현재 예배당에 대기 중인 최고위 사제분들
을 있는 대로 불러모아 치유를 시도해봤으나, 두 시도 모두 별다른 효력을
보진 못했습니다. 애당초 현재 그의 몸에 벌어진 이상상태를뭐라 정의해야
되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니까요."
그렇군요. 그럼 할 만큼 한 것 같으니 그냥 깔끔히 포기하고, 잘 빠진 마네
킹 하나 공짜로 얻은 셈 치면 되 겠네요.
라고 말하려 다, 한껏 미 간을 찡그린 , 누가 봐도 심 기 가 불편해 보이 는 수녀
님의 표정을보고서 눈치껏 입을 다물기로했다.
한가지 첨언하자면, 나도수녀님도, 딱히 이 산송장의 미래 안부를 걱정
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우리가 염려하고 있는 요점은 이 양반이 이대로 죽은
송장이 되 어버렸을 시 벌어질 후폭풍에 있었으니까.
매년 억 소리 나는 금액의 기부금을 교황청에 꽂아주고 있는 명망높은 귀
족 가문의 자제 이 자, 훤칠한 외 모와 뛰 어 난 재능이 라는 이목을 끌어모을
수밖에 없는 요소들 덕에 대외적으로도 명성이 자자한 젊은 유망주가, 던전
오지도 아닌 수도 한복판에서 의문사를 맞이했다는 괴소문이 세간에
새어나가기라도 했다간, 돈과 명예에 환장하는 교황청 높으신 분들이 게거
품물고 난리 칠 게 분명할테니 말이다.
나와수녀님은 그래도 나름 높은 직급에 위치해 있는지라, 그 패악질의 마
수로부터 제 몸 하나 지킬 수 있는 정도의 안전 사거리는 확보할수 있겠지만
, 라노벨 사제의 죽음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비교적 급이 낮은 직무를 수행
하는 이들에 겐 부당하고 불합리한 처벌이 가해지리 란 건 불 보듯 뻔한 일이
었다.
파문 징계 정도면 그나마 다행, 종교 재판으로까지 사안이 번져, 연좌제로
인해 일가족 전원이 옥에 끌려가게 되는 참극도 충분히 가능할 법했다.
11하아.... 彆
거룩한 수녀복을 착의한 채로는 차마 험한 말을 내뱉을 순 없었던 모양인
지, 입 모양만으로 나지막이 속어를 읊조리신 수녀님께서 짙은 한숨을 허공
에 흩트렸다.
'저 머저리한테 일을 맡기는 게 아니었는데.,
딱히 독순술엔 소양이 있는 건 아니었다만, 수녀님의 그런 말을 짓씹었단
건 어렵지 않게 해득할수 있었다.
나원참.....
II
내 메마른 입술에서도토막 난숨이 새어 나왔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지금의 이 어지러운국면을 타개할방도는 내가 일기
론 단 하나뿐이 었으니까.
라노벨 사제를 살아있는 마네 킹으로 만들어버 린 장본인이 자, 나를 괴
롭히는 모든 근심 • 걱정의 근원과도 같은 존재. 그녀와 직접 담판을 지어, 라
노벨 사제를 원 상복구 시 켜놓게끔 잘 구슬리는 것 말곤, 이 총체 적 난국을
호전시 킬 방법은 지금으로선 전무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리고 애 석하게도, 유감스럽 게도, 통탄스럽 기 그지 없게도, 이 자리 에 서
그러한 기예를 성공해낼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인물로선, 그녀의 전속 수호사
제 이자, 원인 모를 이유로 그녀에 게 지대한 호감을 사고 있는 나 말곤, 마땅
한 적임자가 없었다.
"••••사제님.,,
"괜찮아요. • • •.도망안가요••••.
fI
마른세수를 하며, 때아닌 두통에 신음하고 있던 나를 보고서 도주의 우려
가 있다고 판단한 것일까. 수녀님 께서 걱정스러운 어투로 나를 호명했다.
하지만, 수녀님의 우려와는 달리, 이번엔 차마 도망칠 엄두조차도 나지
않았다.
사명 감 같은 게 아니 다. 구태 여 분류하자면 죄책감.
내 몸 하나 건사하자고, 몇 명의 인생을 나락으로 보낼지 모르는 폭탄을
나 몰라라 방조한 채 도주하기 엔, 나라고 하는 인간의 천성은 그리 모질지
못했다.
사고 치는 사람이 따로 있고, 그걸 수습하는 사람이 또 따로 있는 건, 인간
이란 종이 무리생활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결코 근절해낼 수 없는 재해인 걸
까.오늘도또 한 걸음, 이 세상의 진리에 다가간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근데 저 양반은 도대체 뭣 짓거리를 했길래, 그 무뚝뚝하다 못해 매
사에 무심하기까지 한 성녀님을 저렇게까지 빡돌게 한 거랍니까? 뭐, 입에
피망이라도 쑤셔 넣었대요?"
"모르겠습니다. 다만듣기로는, 몇몇 친한동기분들에게 오늘부턴 자신이
성녀님의 전속이 될 것이라고 호언하고 다녔다고 하더군요. 아마, 그것과 유
사한 언행을 성녀님 앞에서도 웅변해댄 게 아닐지 ••••."
■■뭔••••;■
무슨 애새끼들 반장 선거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언제까지고 탁상공론만 하고 있을 순 없다는 자명한 결론에 도달한 내 무
거운 육신이 중력을 거스르며 그 자리를 박찼다.
터벅터벅.
월요일 아침 날 직장인을 연상케 하는 내 피로한 발걸음이 멈춘 장소는 그
요주의 인물이 은닉된 거룩한 성소.
성녀의 알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