秦 9화 잦 바보상자
끼이익.
크고 오래된 문을 열어젖힐 때, 낡은 경첩이 비명을 내지르는 듯한그 특유
의 소음은 언제 들어도 불길하고 꺼림직한 전운을 내 피막에 새 겨넣는다.
그 문 너머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내 흐릿한 이지 따위는 가볍게 표백해
버 릴 것만 같은, 비 정 상적으로 드넓 고 황량한 백 색 이 공간이 라면 더 더욱.
차갑지 않고, 보드랍지 않으며, 발자국조차도 남길 수 없는 광활한 눈밭에
발을 내 딛는 듯한 이 뒤숭숭한 감각은 아무리 시간이 지 난다고 한들, 도무
지 익숙해지려야 익숙해질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서, 성녀님…•.저왔어요…•."
한 손으로 간이 확성 기를 만들어 부족한 성량에 힘을 보태 보았으나, 소리
의 원전 자체가 보잘것없던 탓에 모처럼 만들어낸 메아리도 비리비리해지고
말았다.
별수 없는 일이 었다.
지금부터 내가상대해야 하는 건, 저 자신의 심기를 거스르는 인간을 영혼
없는 인형으로 만들어버릴 능력을 갖추고 있고, 또 그러한행위에 억제력이
되어줄 최소한의 인간성마저도채 무르익지 않은 인물이었기에.
그런 위험인물이 거주하고 있는 장소에 제 발로 기어들어 가고 있는 지금
의 내 행위는 이를테면, 타들어 가는도화선을 이정표 삼아 다이너마이트를
찾으러 가고 있는 머저리와 같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 다이 너마이트에 불을 붙인 진짜 머저리는 지금쯤 폭발 부지로부터 멀
찌감치 떨어진 저 강건너에서 멍하니 운기조식이나하고자빠져 있을 텐데,
어째서 아무런 죄도 없는 내가 그 무거운 총대를 짊 어지고서 목숨을 건 폭발
해체쇼를 해야만하는걸까.
참으로 지당한 의구심이 가뜩이나 무거운 발걸음에 묵직한 회한을
더하고 있었지 만, 그래도 죽기 전에 꿈에도 그리던 두툼한 고기 한 점은 먹고
죽을 수 있었다는 찰나의 위안 덕분일까. 두 다리의 힘이 동이날 정도는 아
니었다.
와락!
그렇게 한창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다. 선통 없이 닥쳐온 충격에 몸
이 기울었다.
"어?"
마치 석궁에 장전된 볼트가방아쇠가 당겨진 순간을 기점 삼아제 몸을 날
리듯, 내가 목소리를 낸 그 직후,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내 하복부를 들이박
은 이름 모를 투사체는 누군가를 해하기 위한 것이라기 엔 너무나 무르고 연
약한 무언가.
아니, 누군가였다.
"서, 성녀님.…!?"
예기치 못한습격에 꼴사납게 엉덩방아를 찍고 만 나와 달리, 면밀하게 내
허리를 끌어안고 부여잡은 성녀님의 작은 손이 넝쿨처럼 내 몸을 조여왔다.
문 입구에서 멀찍이 떨어진 위치에서 누가 들어오건 말건 고장 난 티비 화
면만 주야장천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무심한 모습에 익숙해져 있던 나로선,
상상할 수조차 없던 불의의 일격에 어안이 벙벙해질 무렵.
파들파들, 마치 생이별한 가족을 수년 만에 조우하기라도 한 것처럼, 다
시는 놓지 않겠다는 듯이 내 몸에 파고드는 흐느낌에 젖어 든 가냘픈 몸짓이
사태가뭔가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음을 내게 서서히 짐작게 했다.
■■흐, 흐으••••.끅, 끄으, 우으읏••••.끅, 흐읏…•;■
11성녀彆 • • •.님• …?"
눈과 귀를 의심했다.
얼핏 영혼 없는 인형처럼 보일 만큼 무뚝뚝한 성녀님이지 만, 그녀 또한 사
람의 겁을 쓰고 있는 이상, 이따금 내게 자신의 감정을 내보이는 경우는 드문
드문 있어 왔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편린이나, 조각이라고 불러야 할 법한 극히 일부
분으로 분류해 야 하는 것들뿐.
지금과 같이 표정이 일그러지고, 선연한 감정들이 눈동자에서 방울방울
떨어지며, 누군가에 절절한 호소를 내지르는 성녀님의 모습은 여태껏 단 한
번도본적 없는달의 이면이었다.
"흐,흐아아• • • •.아, 아아우 • • •.흐아,흐아아아아앙一!,,
"으아아! 우, 울지 마세요 성녀님! 자, 뚝 뚜욱!,,
머리를 꿰뚫린 듯한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서러움을 양껏 머금은구슬
픈 메아리가고요하던 백색 공간을 가득 메웠고.
쾅.
그 소란스러운 정경은 내 바로 뒤에 있던 커다란문이 굳게 닫혀버린 것조
차 깨닫지 못하게 할 만큼 내 상념을 거칠게 뒤흔들어 놓았다.
碢碢碢
한참이 지나서야. 그야말로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성녀님께선 울음을 그
쳐주셨다.
아니 , 이 걸 그쳤다고 표현하는 건 마땅치 않을지 모른다.
울다가 또 울다가 제풀에 지쳐 쓰러졌다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이
란 생각이 들 정도로, 그 비명에 가까운 구슬픈 통곡은 한 눈에 흘겨봐도 예
사롭지 않은 상념들을 가득 끌어안고 있었으니 까.
11하아 .... 彆."
한차례 폭풍이 라도 지 나간 것 같았다.
재난 영화에서 화재가 난 산에 고립된 주인공 일행이 하늘에서 내리는 비
를 보며 만세를 부르짖는 걸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의 내 기분을
고스란히 통감할 수 있으리 라 생 각된 다.
당초의 목적과결의 같은 건 이미 흐릿해진 지 오래다.그저 세상떠나가라
울어대는 성녀님을 성공적으로 달래냈다는 옅은 안도감만이 예상 밖의 사
태에 소스라치게 놀란 내 심신을 다독이고 있었다.
새근새근.
울며불며 난동을 부릴 땐 언제고, 내 품 안에서 얌전히 잠을 청하고 있는
성녀님을 보고 있으니, 방금까지 있었던 파란의 사태가 사실 백일몽이었던
게 아닐까 라는 합리적인 의구심을 떨쳐내기 힘들었지만.
성녀님의 눈가에 스며든 붉은 흔적과 귓전을 맴도는 아렴풋한 이명이 그
모든 게 현실이었다는 걸 내게 끊임없이 자각시키고 있는 탓에 눈앞의 사태
로부터 눈을 돌리는 건 사실상 불가능해 보였다.
"자그럼, 이제어쩐다••••."
사건의 실마리를 쥐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 잠에 들어 버렸는지라, 안그래
도 난항에 빠져있던 항행이 더더욱 불투명해졌다.
그렇다고 간신히 재운 성녀님을 다시 깨울 엄두는 차마 나지 않았다.
아이들은 자고 있을 때가 가장 예쁘다는 말은 깨어 있을 때는 살짝 밉 다는
걸 에둘러 표현한 것이란게, 이번 일을통해 내가새로이 깨닫게 된 교훈이
었으니까.
더욱이 설사 성녀님을 깨운다고 한들, 말주변이 그렇게 뛰어난 편이 아닌
성녀님으로부터 일련의 사태에 대한 자초지종을 알아낸다는 것도 다소 무
리 가 있는 이 야기 였다.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성녀님의 인간 침대 노릇을 하고 있
기를 한참.
■■하다못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라도 알수 있다면 어떻게 될 것
도 같은데••••.
fI
갑갑한 마음에 무심코 내뱉은 나지막한 혼잣말이 허공을 향해 스러져가
고 있음을 느끼고 있던 찰나였다.
쿵.
마치, 일시 정지 버튼을 눌러 놓은 동영상을 10초 정도 빨리 감았을 때처럼
그 어떤 전조도, 징조도 없이, 처음부터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처럼.
난데 없이 내 눈앞에 나타난 그 인공적 인 조형물은 늘어지고 있던 내 자의
식을 다시금 팽 팽 하게 고무시 켜 놓기 에 충분하고도 남을 존재 감을 보유하
고 있었다.
"어....?"
다리 가 달린 작은 브라운관 티 비.
성녀님이 하루종일, 그야말로 뚫어버릴 기세로 쳐다보고 있는지라, 내 시
야에도 자주 어른거리던 이 친숙한 입방체가, 누가 가져다놓았을 리도 없을
터인데 어찌하여 내 코앞에 대령 되어 있는것인지에 대해 사소한의문이 싹
틀 무렵.
왜 이쪽 세상에 '티비'가 있을수 있는 거지 ?
자욱한 안개 가 서서히 개 어가듯, 너무나도 지 당한 의구심 하나가 한참이
나뒤늦게 내 머릿속에서 구체화됐다.
그래. 이를테 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내 사고회로 속에서 ■저것■을 배 제
해 놓기라도 한 것처럼.
마법과 이능이 인류 발전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이 세상의 통념과는 도저
히 맞물리지 않는위화감의 덩어리 같은 '저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라
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물건이라고, 누군가가 내 머릿속에 각인이라도 시
켜놓은것처럼.
전신 마취에서 깨어난 순간, 서서히 되돌아오는 몸의 감각에 옅은 위화감
을 느끼는 것과 한없이 유사한, 뇌 내 퍼즐이 본래의 형태로 다시 짜 맞춰지
고 있는 듯한 시큰한 두통에 머리를 움켜쥐고 있자.
[궁금해?]
언제나 지직거리기 바빴던 화면에 떠오른 선명한 녹색 글귀가 어쩐지
내게 말을 거는 것처럼 보여,눈두덩이를주무르며 일단 내 시야에 문제가 있
는지부터 체크했다.
[궁금하냐고]
다행히 시야에는문제가 없어 보였다.허나 그렇다면, 이번엔 내 정신에 문
제가 있는지를 걱정해야 하는 판국이니, 가슴에 얹힌 무거운 시름이 덜어지
진 않았다.
"••••뉘신지?,,
바보상자에 말을 걸고 있는 바보 인간의 탄생 이 었다.
하지만 화수분처럼 샘솟는 의문을 단번에 해소 할 수 있는 방도는 지금으
로선 이것뿐이라 여겼기에.
어차피 누가 보는 것도 아니고,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일단 한 번 던
져 나본 충동적 인 물음이 었다.
[나?]
그리고 되 돌아온 대 답. 그 직후 내 뇌 리를 스쳐 지나간 사고는 내 가 미 치
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아닌, 정체불명의 존재와 소통이 성사되고 말았다는
어스레 한 두려움이 었다.
[신]
아, 아니구나.
그냥 내가 미친거구나. 휴,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