秦 10화 잦 실패
로벨 라이트.그는 천재.소위 말하는 신에게 선택받은부류의 인간이다.
그리고 그건 비단, 그의 신분이나 자산, 용모에만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
성직자로서의 역량은 재능이 차지하는 비율이 약 90%에 달한다.
꾸준한 단련과 실전에서 쌓아 올린 경험을 밑거름 삼아 성장하는 전사. 뛰
어난 스승으로부터 전수 받은 지혜와 주어진 수명 전부를 견문을 넓히는 데
할애하는 것으로 힘을 축적하는 마도사 등과는 달리.
성직자가 사용할 수 있는 기적의 가짓수와횟수는 극히 일부의 경우의 수
를 제외한다면, 태어나는 순간 그 성질이 결정되 어 평생 변화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무려 湁개에 달하는 기적의 종류. 12회에 달하는 일일 기적 사용
가능횟수.
라는, 그 규격부터가 남다른 재능을 보유한 로벨은 명실상부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세 기의 인재. 성직 자가 되 기 위해 신이 점지한 인물이 라
지칭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또래 중에서 그를 따라올 인물은 이 제도 내에선 단 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었고, 이제 막성인이 된 앳된 나이임에도최고위 성직자들과당당히 어깨
를 나란히 할 수 있을 만큼의 성망을 쌓아 올린 그가 교황청의 총애를 한 몸
에 받게 되는 것도 당연지사였다.
그렇기에, 명예롭디명예로운 성녀의 전속 수호사제 자리에 본인이 발탁
되리란걸,로벨 라이트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신 말곤,그 자리에 걸맞은
인물은 결단코 없으리 라고 까지 여 겼다.
이 세상이 조물주가 만들어낸 하나의 연극 무대라고 한다면, 자신은 주역
이었고, 주역이어야했다.
더불어 무대의 주역에겐 관객들을 매료시킬 아름다운 시나리오와 완벽한
결말이 예정되어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레이지스로우빌.
그 남자의 등장을 기점으로 순탄 대로와 같았던 로벨의 인생 수기에 처음
으로 ■오점■이란 것이 생겨나고 말았다.
碢碢碢
무엇 하나 특출난 구석 이 없는 단조무미 한 사내 였다.
얼굴은 다소 반듯한 모양새 긴 했으나, 나이 많은 과부들이 나 선호할법한
미구한 중년이란 인상이 강했고.
몸가짐 이 나 행동 양식 에 나름대 로 주의 를 기울이 고 있는 듯 보였지 만, 그
것도 어 디까지 나 타인에 게 지 적 받지 않고 넘 어 갈 수 있는 하한선을 아슬아
슬하게 유지하고 있을 뿐.
매 순간, 자신의 말과 행동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게 당연한 귀족 자
제의 입장에서 보자면, 오히려 어쭙잖은 지식으로 어설프게 귀족 흉내를 내
는듯한그의 모습은 이따금 가증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그런 변변치 않은 외견과 행동거지를 메꿔낼 수 있을 만큼, 그의
능력 이 나 재능이 뛰 어났던 것도 아니 었다.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그가 사용할 수 있는 기적은 '치유의 기적1 단 하
나뿐. 그마저도 하루에 한 번 사용하는 것이 한도인 데다, 마땅한 매개체가
없다면 신성 력을 끌어모으는 것조차 할 수 없다고 들었다.
성직자의 수치.반푼이 성직자.
그를 수식하는 가장 통속적인 말일 거란 동료들의 비아냥에 로벨은 표면
적으로만 그들을 제지하고선, 남몰래 무릎을 치며 격한 공감을 표하곤 했다
•
더군다나그는,레이지스,였다.본디 레이지스란 성은,부모 없이 자란고아
들이나 사용하는 미천한 성씨가 아닌가.
외 모도, 능력도, 재 능도, 태 생도, 자신보다 한참이 나 뒤 떨 어지는 존재 .
본래 라면 함부로 말을 섞는 것조차도 허용되 지 않을 만큼, 그와 자신 사이
엔 하늘과 땅, 아니, 드래곤과 개미에 버금가는 격차가 벌어져 있다는 건 두
말 할 것도 없을 터였다.
하지만.
임명식 때, 성녀님께서 친히 간택한 인물은 바로 그 사내. 레이지스 로우빌
이었다. 자신이 아니었다.
그날의 치욕스러운 비전은 로벨의 안검 안쪽에 달라붙은 채, 한동안은 꿈
에서까지 나와 그를 괴롭혔다.
성녀님의 아름다운 섬섬옥수가 산들바람에 흩날리는 꽃잎과도 같은 우
아한 몸짓으로 고요히,그리 고 서 서히 그 사내를 가리 킨 순간.
사내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느닷없이 한 쪽 손을
번쩍 치켜들고선, 이렇게 말했다.
"저랑 바꿔주실분?,,
그 어벙한 한 마디는 그 자리에 있는 모두를 능글맞게 조롱하게 있음이 분
명했다.
그날, 거칠게 말아쥔 주먹 안쪽에서 새어 나온 핏물의 잔향은 지금 이때까
지도 로벨의 손아귀 아래 체류하고 있었다.
성녀님의 전속 수호 사제는 오로지 성녀님의 거룩한 의지에 의해서만 임
용되는 자리. 그곳에 다른 누군가의 의지가 개입될 여지는 없고, 개입되어서
도 안 되 며 , 그 선택 에 이의 를 제 기 한다는 건 신의 뜻에 반기 를 든다는 것이
나다름 없었다.
하지만 로벨의 머릿속에서 광염처럼 이글거리는 충동은 아무리 시간이 지
나도 좀처 럼 사그라들 기 미 가 보이 지 않았다.
이럴 리가 없었다. 무언가가 잘못된 것이 분명했다. 착오가 발생했다. 순리
가 틀어졌다. 톱니바퀴 가 어긋나고 만 것이다.
어째서 저런 보잘것없는 사내가.
모든 사제들이 선망하고 동경하는 명예로운 직책을 한낱 청소 당번 정도
로 취급하고 있는 작자가도대체 성녀님께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내가저 녀석보다못한게 대체 뭔데.
질투. 자신의 상념 안 편에서 사납게 태동하는 그 감정의 진명을 로벨은
애써 외면했다.
본디 질투란 건, 하잘것없는 존재가 자신보다 월등히 우월한 존재에게 품
는 감정이기에.
잘못된 건 바로잡는 게 당연하다는 비이성적인 교정 욕구를 대의명분 삼
아, 로벨은 저 자신의 굳은 결의를 어긋난 위치에 고정하고 말았다.
주인을 잘못 찾아간 저 멍청한 왕관을 반드시 제 것으로 만들겠노라고.
그리고 머 지 않아 그 기 회 가 도래 했다.
碢碢碢
"이곳이 소문으로만듣던 성녀님의 알현실 ••••!"
감탄, 경탄, 괄목, 탄복.
설령, 전 세 계를 유랑한 경력이 있는 베 테 랑 음유시 인이라 할지 라도, 지금
그의 상념에서 요동치는 벅찬 심정을 말로써 온전히 외현한다는 건 불가능
하리라.
마치, 그 어떤 더러움도 입석을 허용치 않는 순백의 낙원을 보는 듯했다.
밤의 시 간이 도래해 , 한창 땅거미 가 활개를 치는 시 간대 인 바깥세 상의 패
악을 피해, 온 세상의 빛과 광명이 이 공간 하나에 전부 수렴됐다는 착각에
사로잡힐 만큼, 눈이 부시고 또 아름다운 이공간.
신이 이 세상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들만을 엄선해서 담아놓기 위한요람
을 만들었다면, 필시 그곳은 이 티 없이 맑고 드넓은 세상을 지칭하는 것이리
란 생각까지 들 정도로, 로벨이 겪고 있는 감동의 요동은 비대한 것이었다.
그렇게, 태어난 이래로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종류의 전율
을 체감하며, 로벨은 신이 난 발걸음으로 앞을 향해 걸어 나갔다.
사실, 그가 수녀로부터 하달받은 임무는 레 이 지스가 돌아올 때까지 알
현실의 입구를 경호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사욕에 눈이 먼 상태인 지금의 로
벨에게 있어, 레이지스가 없는 이 찰나의 유예는신께서 내려주신 절호의 기
회라고 밖엔 생각되 지 않았다.
사실 로벨의 지나친 향상심에 대해선 수녀도 어느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
지만, 설마 따로 허가도 받지 않은 상태로 다짜고짜 알현실에 들이닥치는 미
친 짓을 자행할 거라곤 꿈에도 생각못 했기에 벌어진 참극.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다는 건, 그야말로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일 터
였다.
■제아무리 성녀님이 이 세상의 이치에서 벗어난초월적인 존재라하시더
라도, 성녀님의 연령은 올해로 아직 16살에 불과하셔! 아직 사고력이 채 무
르익지 않은 성년기의 나이시니! 실책을 범하실 때도 있고! 잘못된 선택을 하
시는 때도 분명 있으셨던 걸 거야! 그러니, 성녀님께 그 녀석의 무능함을 깨
우쳐 드리고, 내 유능함을 어필한다면, 충동적으로 정하신 수호사제 자리도
분명 재고해주실 테지! 나라면 할수 있어!,
축복받은 환경과 재능을 타고나, '실패,란 것을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경험
해보지 못한 인간. 선의와호의에 취해, 그 안온함에 중독되어버린 인간의
말로는 이처럼 독선적이고 추악해지기 일쑤였다.
실제로, 그는 다른 이에게 한요구가 거절당한 경험이 손에 꼽았고, 그 상
대 가 여성 일 경우엔 단 한 번도 거절당한 전적 이 없었다.
"오오!"
사막 한 가운데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사람처럼, 격양된 감탄을 터트린
로벨이 걸음을 멈추었다.
이윽고, 신의 존안에 자리한 성해포를 들추듯, 경건히 무릎을 꿇은 그의
앞에 나타난건 고결한소녀의 인영이었으니.
성직의 길에 몸을 담고 있는 이들이라면 결코 몰라볼 리 없을 휘광. 거룩한
축복을 몸에 겹겹이 두른 신성한 존재.
성녀. 웰나안제라스 애쉬스.
이때 로벨은 자신이 지금 이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란 미련한
착각을 퇴고해볼 일말의 이성마저도 소실해버리고야 말았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성녀님.오늘부터 성녀님 새로운 전속수호
사제가될 로벨 라이트! 지금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더욱이.
지금 자신이 결코 건드려선 안 되는 누군가의 역린을 짓밟고 말았다는 것
또한 깨닫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