秦 22화〉배신
"한데 사제님.요전에 건네드린 외출허가증 말인데.혹시, 몇 장남아 있으
신지 좀 알 수 있을까요?,,
향수 냄새가 진득이 밴 옷을 벗어 던진 뒤, 여분의 사제복으로 한창 갈아
입고 있던 와중, 탈의실 문 너머로부터 수녀님의 차분한목소리가새어 들어
왔다.
"• 彆 彆 •도로뺏어가려는 건 아니시죠?,,
"저를 뭐로 보시는 겁니까••••."
앞뒤 꽉 막힌 직장 상사.
근래 들어선 그래도 사려심이 아예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는 호인상과 보
기보다 흉부가 비대하다는 극호인상이 추가되긴 했다만.
그래 봤자 '앞뒤 꽉 막히 고 가슴 큰 가끔 유도리 있는 직장 상사, 이 기 에.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보자••••.5장정도 남아있네요."
"생각보다 많군요. 진작에 다 써버리신 줄 알았는데."
'■식사 문제가 개선된 이상 딱히 쓸데가 없기도 했고, 그렇다고 또 별일 아
닌 데 허비하기 엔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주위에 한 사람씩은 꼭 있지 않나. 슈팅 게임에서 폭탄 아끼고 아끼다가,
결국 제대로 써먹질 못하고 명을 다하는 나 같은 사람.
우유부단함이 습관화된 사람보다 비 참한 사람은 없다고들 하지 만, 이 우
유부단함 덕에 이 험난한 세상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사람으로선, 우유
부단함과 신중함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말에 보다 공감하게 되는 건 별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 오늘도외출하실 생각은 딱히 없으시겠네요?"
"뭐,특별한 일이 없으면 아마그렇겠죠?"
"••••"
碢碢碢
"성녀님.
노크 없이 오로지 목소리 만으로, 그것도 길거리에서 마주친 들고양이를
부를 때만큼이나 조심스러운 성량으로.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간신히 체득해낸 이 방법만이 지금의 성녀님께 건
네는 게 허락된 유일한 서두. 단 하나뿐인 의사소통 수단이었기에.
바늘구멍에 실을 꿰어 넣는 기분으로 신중에 신중을 가해 목을 울렸다.
끼이이.
이윽고, 눈앞의 웅대한 문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비록, 생쥐 한 마리조차도 드나들 수 없을 만큼 작은, 고작해 야 소리나 냄
새 정도가 겨우 오고 갈수 있을 법한 실낱같은 통로였지만.
일단, 문이 열리긴 했다.
그것만으로도, 성 녀님으로부터 반응이 라고 부를 수 있을 법한 무언가가
되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세심히 공을 들여 말을 읊조린 보람은 충분하다
고볼수 있었다.
'화. .... 났어 .•••?"
화안 났어요.
문틈 사이로 새 어 나온 그 주눅 든 목소리 가 애처로운 불안으로 점철되 어
있다는 건 일목요연해 보였다.
내가 내 손에 칼침을 꽂아가며까지 성녀님을 호되게 야단친 그날 이후.
아무래도 성녀님은 태어나서 처음 당해본 꾸중을. 여태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내 단호한 태도를.
내가 자신에게 화를 낸 것이라고. 지극히 일차원적으로 받아들이고 만 모
양이었는지라.
지금에 이르러선, 이렇게 내가화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사전에 시인해
두지 않으면, 얼굴도보여주지 않는지경에 이르고야말았다.
"지인짜아. ...?"
"진짜.,,
"지인짜로. .... 지인짜아. 彆 彆 .?"
"진짜로진짜."
끝없이 반복되는 이 도돌이표 같은 문답에 이따금 한숨을 쉰다거나, 난처
하다는 기색을 내보이는 것 또한 용납되 지 않았다.
그저 무념무상• 명경지수의 마음가짐으로 성녀님의 경계심이 누그러지기
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낚싯대 끝의 찌를 바라보는 강태공이 그러하듯,
비소한 문틈 사이로 하올거리는 그녀의 감정 상태를 예의주시했다.
바로 그때였다.
끼이익.
거대 한 문이 다시금 신음을 토하며 몸을 뒤 챘고, 그 좁은 틈 사이로 이쪽
을 살피는 루벨라이트색 눈동자를 포착한 그 순간.
던져 놓은 낚싯대를 거둬드려야만 하는 때는 바로 지금이란 걸 내 직감이
경종했다.
수녀님.,
'알고 있습니다.,
시선으로 주고받은 뜻이 행동으로서 구체화 되는 그 일련의 흐름으로
부턴 일말의 군더더기도 찾아볼 수 없으리란 생각이 절로 들 만큼, 나와
수녀님의 합은 완벽한 완성도를 자랑했다.
양팔을 활짝 벌린 채 지금 당장이라도 무언가를 거세게 끌어안을 기세인
나와. 맞은 편에서 그런 내 자세를 거울처럼 재현하고 있는수녀님.
이윽고, 모양새가 딱들어 맞는 두 개의 블록이 합쳐질 때처럼, 서서히 거
리를좁히기 시작하는 나와 수녀님이 사전에 준비해 놓은대사를 차례대로
읊조리기 시작했다.
■하. 성녀님이 날 안 만나주네. 그럼 어쩔 수 없지. 다른 사람을 찾아볼 수
밖에.,,
"꺄아아."
나름 합격점이라고 볼 수 있는 나완 달리, 척 보기에도 하기 싫단 의지가
절절히 새 어 나오는 수녀님의 국어책 연기는 두 눈 뜨고 못 봐줄 정도로 끔찍
했지 만, 다행히 상대가 그 성녀님이다보니, 이 무대에서 배우의 질은 그렇게
까지 중요한 요소는 아니 었다.
"아, 안돼一!!!,,
■큽!"
민첩한 날다람쥐를 연상케 하는그아담한도약의 종착지는 내 명치였다.
인간의 급소 중, 머리를 제외한다면 가장 저명한 인지도를 자랑하는 명소
에 귀빈께서 친히 하차해주신 게 어지간히도 영광스러웠던 걸까.
예의 바른 상반신이 점점이 앞쪽으로 고꾸라지며 누추한 곳에 방문한 귀
빈께 친히 예절을 표명하려 했으나, 의식 밖의 통증을 견디지 못한 입에서
연기처럼 새어 나오는 볼품 없는 신음이 그 고명한 분위 기를 죄다 망쳐 놓고
있었다.
"으으으••••."
이 작은 몸으로 어떻게 저 큼지막한 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탄환처럼 뛰쳐
나올 수 있는 것인지, 타당한 의구심 이 부표처럼 뇌 리 에 떠올랐지 만.
생 각해 봤자 별수 없는 문제는 무시하는 상책 이란 걸 그간의 경험을 통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내 이 지 가 떠 오른 의 문을 다시 금 의 식의 수면 속으로
가라앉혔다.
"내 꺼 ! 내꺼 !! 내꺼 !!!,,
아끼는 장난감을 뺏긴 어린아이처럼, 내 웃옷을 굳세게 움켜쥔 채, 내 몸
이 자신의 소유임을 어떻게든 명확히 하려는 성녀님의 강경한 태도는 퍽 살
벌하긴 했으나, 명치에 가해진 물리적인 충격으로부터 아직 헤어나지 못한
내 정신은 그 감정이 자아내는 파동을 온전히 체 감하진 못하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사제님? 혹여나 말씀드리는 건데 통증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기적을 남용하시면 안 됩니다. 사제님의 기적은 오로지 성녀님을 위한
것이시니까요.몸이 부러진다거나, 어디 한군데 꿰뚫리는 정도의 중상이 아
니라면 절대로 본인한테도, 타인한테도 사용해선 안됩니다.
■■하마터면 잊어버릴 뻔한 주의사항을 친히 알려주셔서 눈물 나게 고맙습
니다••••."
'별말씀을요.
그렇게 고목에 붙은매미처럼, 내 몸에 찰싹달라붙은채 연신 칭얼거리기
바쁜 성녀님을 살살 달래 가며 몸을 일으켰다.
"내 꺼••••.안줘••••.내 꺼야••••.내 꺼••••."
"암요.그럼요. 전성녀님 꺼죠."
"지, 진짜아. •••?"
"네. 대신 오늘분 식사를 말끔히 다드셔야만 절 가지실 수 있습니다. 혹여
나 남기 시 거나, 식 사 중에 또 한눈파시 거 나 하시 면 바로 압수할 거 예요. 아
시겠죠?,,
"성녀님?,,
"으응••••."
귓전에서 울리지 않았더라면 놓쳐 버렸을 게 뻔한, 산들바람에도 휩쓸려
버릴 듯한 그 나지막한 긍정을 수신한 내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마음속에
얹힌 시름을 조금씩 덜어내고 있자.
수녀님이 넌지시 내게 말을 건넸다.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성녀님의 거동 하나하나에 쩔쩔매시던 분이 이
젠 아예 도가트셨네요. • • •.무슨심경의 변화라도생기신 건가요?"
”아…
… . 언제까지고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니까요
• • • •. 게다가 잘 아시다시피, 예전부터 성질이 드센 누군가의 비위를 맞추는
건 신물이 날만큼해왔었던지라••••."
"아, 과연…..,,
사실, 애독서를 바꾼게 컸다.
《고양이 말메뉴얼! 고양이가당신을 따르지 않는 1이가지 원인!》.
이 책과의 우연한 만남이 없었더라면, 난 여전히 성녀님이 거동 하나하나
에 쩔쩔매며, 마땅한 소득 없는 공회전을 끝없이 반복하고 있었을 테지.
솔직히 책 하나 바꿨다고 이 정도로 두드러진 변화가 생겼다는 사실에
약간의 허탈함을 느끼고 있을 정도였다.
주인의 애정을 갈구하는 고양이의 행동 습관들이 그간 성녀님이 내게 보
여줬던 행동들과 기막힐 정도로 똑 닮았단 걸 깨달았을 땐, 척추를 간드르는
오한으로 인해 바닥에 풀썩 주저앉기 까지 했다.
■■역시 성녀님의 수호 사제 역할을 도맡을 수 있는 인물은 사제님뿐인 것
같네요.,,
11하하. ....."
성녀님을 끌어안은 채론 거센 반박을 내지를 수 있을 리 만무하였기에 어
색한 미소로 적당히 화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 손으론 성녀님의 끌어안고서, 남은 한 손으론 성녀님의 식사를
떠받친 뒤 , 알현실을 안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겨갈 무렵이 었다.
"성녀님.
수녀님께서 느닷없이 성녀님 쪽으로 다가왔다.
fI
아, 안줘.....
fI
"괜찮아요. 안 뺏어갈 거예요.,,
마치 천적을 만난 고양이가 저 자신의 털을 한껏 부풀리는 모양새를 보는
듯했다.
내 목을 조를 기세로 끌어안은 성녀님은 갑자기 시 야 전방에 나타난 수
녀님이 상당히 못마땅했는지, 한눈에 봐도 경계심이 다분한 말과행동을 그
녀에게 쏘여 붙였고.
반면, 수녀님은그런 성녀님의 행동이 그저 귀엽다는듯이, 가면 너머로도
선연히 보이는 인자한 미소와 함께 참으로 해맑게 말을 뱉었다.
"성녀님! 오늘 사제님여기서성녀님이랑 하룻밤 자고 가신대요!,,
"어?"
"예?"
뇌 가 말의 전문을 받아들이 는 걸 한사코 거부한다고 느껴 질 만큼 충격 적
인 내용을 내포한그 한마디는 평안에 절여져 있던 내 머리를 거세게 가격했
고, 그로 인해 더뎌진 사고가몸에 명령 신호를 하달하는 과정에도 이상을 발
생시킬 무렵.
"죄송합니다. 사제님.,,
등을 떠미는 누군가의 힘에 의해, 내 몸이 알현실 안 쪽으로 이전보다 더
깊숙이 밀어넣어졌다.
쿵.
그렇게 문이 닫혔다.
그 직후 바깥쪽에서 아련히 들려오는 자물쇠 정도 크기의 쇠붙이가 꿈틀
거리는 소리는 내 상념 속에 불길한의혹을 가증시키기에 충분하고 남을 만
한위력을 걸머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