秦 24화 잦 냄새
요 며칠, 수녀의 낯빛은 밝아지려야 밝아질 수가 없었다.
믿을 만한 눈과 귀 로부터 입수한 어느 충격 적 인 정보.
용사 파티의 일원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제도 각지의 수도원을 전전
하며, 특정 인상의 사제와 수녀를 종횡무진 찾아 헤매고 있다는 그 흉흉한
소문을 전해 듣게 된 이후론, 그녀의 상념 안에 드리운 먹구름은 단 한
순간도 잦아들지 못했다.
더욱이, 그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다는 수녀의 인상착의 가 아무리 봐
도 본인을 수식하고 있다고밖엔 볼 수 없었기에.
그날을 경계로 수녀는 지진이 나 해일과 같은 자연재해 가 자신 혼자만을
겨 냥하고 있는 듯한 중압감을 항시 떠 안고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 었
다.
어느 반푼이 사제가 그들로부터 도망쳐 나온 그 심정을 그야말로 뼈저리
게 공감하게 될 정도로 말이다.
수백에 달하는 마수 무리와 혈혈단신으로 맞서 싸울 만큼 강인하며, 하늘
을 지 배 한 용조차도 단칼에 베 어버 릴만큼 위 대 한, 이 른바 초월 적 인 영웅.
인류의 아군이라고 여겼을 땐 너무나도 든든하고 믿음직스러운 존재였지
만, 그런 존재가 확고한 목적의식을 지닌 채, 자신의 뒤를 쫓고 있을지 모른
다는 불안감은 품어왔던 동경심을 전부 공포심으로 변질시켜 버리기에 충
분하고도 남았으니 까.
허 나 참으로 다행스럽 게 도 살아날 구멍. 돌파구가 아예 없는 건 아니 었다.
아무리 상대 가 상식 의 범주를 벗어 난 존재 라 하더 라도, 인간이 라는 겁을
쓰고 있는 이상, 신분이나 직위와 같은 사회적인 위치를 지니고 있는 이상.
이념에 기반한 사상이 있을 것이며, 마땅히 지켜야 하는 책무가 있을 것이
고, 준수해야만 하는 법도가 있을 터.
한두 명정도라면.
어떻게 회유해낼 수 있을지도모른다는 한낱희망, 일말의 가망 정도는 가
져볼법했다.
그래, 한두 명정도였다면.
碢碢碢
"명단을 넘겨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벼, 별말씀을요…•."
벌써부터 계획이 틀어졌다.
하지만지금의 사태가순연히 수녀의 섣부른 판단 때문만이라고 힐난하
는 건 너무나도 가혹한 처사였다.
인류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걸 자신들의 직분이라고, 긍지라고 여기고 있
을이들이.
본인들의 책무를 나 몰라라 한 채, 한마음 한뜻으로 딴 길로 샜다는 초유
의 사태를 어느 누가 감히 예상할 수 있단 말인가.
초인이 범인과는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건 유명한 속설이나,
그것도 어느 정도의 상한선이 있는 법.
수녀가 남몰래 자기 허벅지를 꼬집으며, 순간적으로 지금 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이 생생한 악몽인 게 아닐까 라는 현실도피를 꿈꾼 것도 별수 없
는일이었다.
■■역시 절실한 마음을 담아 호소하면, 인간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로군요! 혹여나 이런 순간이 오지 않을까 싶어 연마해둔 신기술! ■용사큰 절,
이 이렇게 빛을 발하게 되니! 참으로 감격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글쎄다. 내가볼 땐 바닥에 머리 꼬라박은 건 하등 소용없었고, 순전히 용
사라는 이름값 때문에 일이 순탄히 풀린 것 같은데."
내면에서 터져 나오는 감격을 주체 못하는 듯한 용사의 경동한 행실을 만
류해주는 건, 그 자리에선 아피스의 냉소적인 반응만이 유일무이했다.
다우나는 건네받은 명단을 속독하느라 바쁜 눈치였고, 빅팀에 이르러선
그저 꾸벅꾸벅 졸고만 있었기에.
지금의 이 곤혹스러운 상황을 다른 누군가가 중재해 줄 것이란 헛된 소망
을 수녀는 결국 내 려놓아야만 했다.
”이름 모를 기사님의 정체가그 용사님이셨다니. 정말이지 놀랍기 그지없
군요. 사전에 공지를 하신 뒤, 방문하실 일시를 따로 지정해두시고서 찾아
오셨다면 그에 걸맞은 대접을 해드렸을 텐데. 아쉬울 따름이네요.,,
■■죄송합니다! 확실히 정체를숨긴 채, 남들의 시선을 피해 움직인다는 건
비겁한 소행일지 모르나! 이번만큼은 그럴 수밖에 없는 마땅한 사유가 있었
기 때문에 ! 부득이하게도 이런 수단을 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난데없는
무례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아니, 무례라고 할 것까지는•••••"
"사죄드립니다!"
말에 감춰둔 가시를 가시 째 으적으적 씹어먹어 대는 용사의 언행이 가뜩
이나 어수선한 상태인 수녀의 상념을 더더욱 헤집어 놓고 있었다.
그렇게 차분함과 산만함. 불과 물이 뒤섞이고 있는 듯한 어지러운 문답이
한창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아피스가 부서진 테이블 모서리에 불
량스럽게 다리를 걸치며 말을흘렸다.
"아, 미안. 지금용사가하는 이야기의 幏할정도는그냥대충흘려 넘겨줘.
피치 못할사정이 좀 있어서, 이 녀석 지금유례없는흥분 상태니까."
"무슨 소리입니까! 아피스! 전 언제나 냉정 •침착한 정신 상태를유지하고
있습니다! 전 용사니까요!,,
"그래그래. 어련하시겠어.,,
용사를 다루는 아피스의 그 피로한 태도는 철부지 동생을 어르고 달래는
데 도가 튼, 다인 가정의 맏누이를 연상케 했다.
그 모습으로부터, 지금 이 파티의 고삐를 쥐고 있는 인물은 용사가 아닌,
그녀라는 걸 직 감한 수녀 가 대화의 주체를 바로 잡았다.
"용사 파티의 아피스님이시로군요. 이야기는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습니
다. 만나뵙게 되어 참으로 영광彆 •••.
II
”아! 됐어! 그런 거 안 해도 되니까! 그냥 가만히 있어! 걱정하지 마. 말 안
해도 필요한 용건만 끝마치면 잽싸게 여길 떠줄 테니까."
이러한 문답에 이골이 났다는 듯한 말투.
용사가 대화의 포문을 헤집어 놓고, 그녀가 그 난장판을 뒷수습하는, 그
녀들의 여태까지의 여정이 훤히 그려지는광경이었다.
파라락. 파라락.
바로 그때, 수녀가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명단을 훑어 보고 있는 다우나 쪽을 향해 시선을 흘겼다.
무려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수도원에서 여태껏 몸담은 모든 사제의 이
름이 개 재된 그 막대 한 양의 종이 뭉치 는, 수녀 가 고의 로 그 순서를 뒤 섞 어
놓기까지 해, 자료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엔 아무래도 부적합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물건이었으나.
”허탕일세. 아무래도 이 번에도 헛걸음한 모양이로군. 그나저 나 자네! 이
곳 수도원은 다른 곳에 비해 자료 관리 가 상당히 미흡한 것 아닌 가? 나였으
니 망정이지.평범한사람이었다면 이런 엉터리 자료로부터 정보를취득한다
는 건 불가능한 곡예 였을 걸세. 읽는 김에 내 가 손수 시간순으로 재배 열해
놨으니, 앞으로는 자료 정리에 더욱 심혈을 기울이도록 하게나."
"가, 감사합니다.,,
식당에 메뉴판이라도 읽어낸 것처럼 무심히. 불과 몇십여 분만에 명단을
완독하고서, 따로 정리까지 해낸 그녀의 믿을 수 없는 소행에.
혹시 몰라 명단에서 그의 이름을 사전에 빼놓길 잘했다고 여긴 수녀가 마
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 었다.
사제 본인은 이 세상에서 제일 안전한장소에 은닉해두었고,교단내에서
의 입막음도 확실히 해둔 데다, 하나뿐인 서면적 단서는 오히려 사제의 부재
를 증명해주는 증거물로서 기능하고 있으니.
이 고비 만 무사히 넘긴다면 모든 일이 순탄하게 넘 어 가리 란 건 분명해 보
였다.
'죄 송합니 다. 여러분. 하지 만 지금의 성녀님에 겐 레 이 지스 사제 님이 꼭 필
요합니다!,
가면 안쪽에 자리한 두 눈을 질끈 감아가며, 수녀가 차마 내뱉을 수 없는
사죄 를 속으로만 짓씹고 있을 무렵 이 었다.
'■그렇군요! 이번에도 허탕이로군요!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난데없는 무
례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수녀님 ! 이건 수녀님의 귀중한 시간을 뺏은 것에
대한소정의 사례이니 부디 받아주시길 바랍니다!,,
”아, 아뇨! 무례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더군다나 이, 이렇게나 많은 사례
금을 넙죽 받아버린다면, 신께서 욕심에 눈이 먼 절 벌하실 게 분명합니다!"
상반신을 꾸벅 숙인 或 자 자세를 유지한 채, 묵직한 금화 자루를 막무가내
로 건네주려 하는 용사의 거동을 수녀는 필사적으로 저지했다.
안그래도죄책감으로 인해 마음이 불편스럽기 그지없는데, 여기서 용사
에게 성금을 받기까지 했다간, 이젠 두 번 다신 태양빛 아래를 당당히 걸어
나갈 수 없으리란 신실한 마음에서부터 비롯된 행동이었다.
'■이런!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별수 없군요! 그러면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성녀님께 인사를 한 번 올리고 가도괜찮겠습니까!,,
"그,그건 안될 말씀입니다!,,
용사의 느닷없는 제 안을 들은 수녀가 소스라치 게 놀라며 언성을 드높였
다.
'■가호 수여식이 있기 전까진 성녀님과 용사님은 절대로 대면하시면 안 된
다는 걸 혹여나 그 누구에 게도 전해 듣지 못하신 겁니까!? 물론 가호 수여
식까지 채 반년도 남지 않긴 했지만, 성녀님의 귀경이 성인이 되어 가호가온
전한 형태를 이루기 전까진! 두 분의 만남은 절대로 성사돼선 안 된다는 걸,
다른 누구도 아닌 용사님께서 모르실 리 없으실 텐데요!,,
용사가성녀의 가호에 힘입어 마왕을무찌른다.
이 제도에선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이도 알고 있을 법한 유서 깊은 전승이
지만.
일찍이 성녀의 빼어난외모에 눈이 먼 어떤 용사가 아직 가호가완성되지
않은 상태의 성녀를 섣불리 동료로 삼은 채 마왕에게 도전했다가 크나큰
참패를 겪 었다는 전승은 극히 일부에 해 당하는 관계 자들만이 후대의 용사
에게 구전하는 게 허락된, 역사의 오점 중 하나였다.
그로부터, 용사와성녀는두 사람이 성인이 될 때까지 결코 만나선 안된다
는 엄격한 법도가 생겼고, 이는 이제 곧 성인이 될 나이대인 용사도 사전에 전
해 들은 바가 있는 정보였다.
"아참! 그랬었지요! 깜빡 잊어먹고 있었습니다!,,
'용사. 너 말이다.....
"후, 후우…
그렇게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직후.
"그럼 마지막으로! 수녀님께 질문을 하나드려도괜찮겠습니까!"
"네네! 물론이지요!"
”어째서 수녀님에게서 제가 너무나도 잘 아는 신부님의 냄새가 나는 겁
니까!,,
"••••네?,,
또하나의 거대한폭풍이 그녀들 사이에 장엄히 도래했고.
"그 가면. 벗어주실 수 있으신지요."
매섭게 솟아오르는 증기를 연상케 하던 지금까지의 분위기와는 지나치게
상반된.
자욱한 안개처럼 바닥을 기는 그 목소리에 명도를 짐작할 수조차 없는 질
척한 감정들이 배어있단 건 너무나도 자명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