秦 28화〉소꿉놀이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잘못 중 가장 큰 잘못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조차 모르는 것이란 말이 있다.
최초 유포자가 누구인진 불명이 나, 누군가 말을 하긴 했으니 사람들의 입
에 오르내리는 것일 테지.
그 말을 탄생시킨 사악한 장본인을 어떻게든 찾아내 잡아 족치는 것이 인
류가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 한 하나의 과업이라고. 적어도 나는 그렇
게 생각한다.
오빤. 오빠가 뭘 잘못했는지 몰라?
미안. 내가 주관식엔 좀 약해서.
"성녀님.제가대체 뭘 잘못한걸까요.
응어리를 털어놓은 마땅한 상대가 없어, 지금 내게 남은 유일한 말동무인
성녀님께 대뜸 고해성사를 부탁해 봤다.
나로선 종잡을 수조차 없는 모종의 이유로 수녀님에 의해 알현실에 감금
된지 어언 수시간.
혹시, 급사님에게 식후 디저트도 좀 추가해달라고 몰래 건의드린 게 들키
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한창 읽고 계시던 소설 내용을 본의 아니게 스포일러 해버린 걸 아
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계신 걸까.
여성이 남성에게 화를 내는 이유를 생각하는 것만큼 비생산적인 일은 달
리 또 없다고들 하지만.
저 할 일 찾지 못한 채, 빈둥빈등 놀고만 있는 뇌를 마냥 방치하고만 있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서, 한 번 상념에 잠겨보기로 했다.
그렇게 한참의 장고끝에 내가 도출해낸 결론은 이러했다.
모르겠다.
오죽했으면 그 성녀님한테 자문을 구하고 앉아 있을까.
자신이 화가 난 원 인을 이 세상의 이 치 에 서 삭제하고, 화가 났다는 결과만
을 남겨두는 그 비 열한 술수에, 한낱 남자인 내 가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수
단은 이렇게 누군가에게 조언을 구하는 구차한 방법뿐이었다.
I
'으음?
fI
내 다리 위에 걸터앉은 채, 물끄러미 날올려다보던 성녀님이 도연히 고개
를 갸웃거렸다.
.
!..
.........
..
내 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조차 모르겠단 눈치 였다.
그래. 몰루겠지.
솔직히 성녀님이 알 것 같다곤조금도 생각지 않았다.
기대가 없으면 배신 또한 없다는 게 이런 뜻이로구나.
오늘도 또 한 걸음 진리에 다가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거 먹어.,,
아무것도 올려져 있지 않은 빈 그릇을 내 입가에 가져다 대며, 대뜸 내게
허무를 먹으라고 종용하는 성녀님.
이 의문스럽기 짝이 없는행동이 '소꿉놀이,의 일종이란걸 깨닫기까지, 내
가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왔는진 그닥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그냥 내가요 며칠 사이, 접시에서 무슨 맛이 나는지, 먹었을 때 입 안이 어
떤 꼴이 나는지를 알게 됐다는 것만 알아주었으면 한다.
"크흠! 와! 너무 맛있다! 역시 우리 웰나요리가최곤걸!"
내 혼을 담은 연기가상당히 만족스러웠던 모양인지, 내 다리 위에 걸터앉
은 그 자세 그대로, 성녀님이 몸을 폴짝거 렸다.
여 전히 그 표정 에 선 감정의 미동을 찾아보기 힘들었지 만, 입꼬리 가 약 5m
m 정도 올라간 것으로 보아, 상당히 신이 난 상태라는 건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이 나이 먹고 하는 소꿉놀이는 제법, 아니, 상당히 많은 자존감을 소모하
는 위험천만한행위이나, 안해주면 해줄 때까지 빈 접시를 입에 들이미는
성녀님의 그 광증 어린 모습에 그냥 시원스레 굴복하기로 마음먹게 됐다.
다행히 성녀님이 주체하는 소꿉놀이는 복잡한 설정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 등장인물도 그리 많지 않았다.
오빠. 동생. 그리고 언니.
내가오빠고, 성녀님이 동생.그리고 성녀님의 손에 그때그때 대충 잡히는
적당한 사물이 언니의 역할을 위 임받는다.
소꿉놀이의 조예가 깊지 않은 몸인지라확실하진 않다만. 보통은 엄마. 아
빠. 아이. 강아지 정도가 일반적 인 구성이 라고 들어왔기에 .
옅은 의구심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으나, 지금에 이르러선 그냥 그
러려니 하게 됐다.
솔직히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가상으로라도 슬하에 자식을 두는 건
달갑지 않은 일이기도 했고.
고아원에서 나고 자란 내가 평범한 가족 구성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만
큼 우스운 꼴은 또 없겠다 싶어, 그냥 가정의 다양성을 존중하기로 했다.
그래도, 넌지시 질문을 한 번 던져본 적은 있었다.
■성녀님. 언니가 있으셨어요?'
그 물음에 답이라고 부를 수 있을 법한 무언가가 되돌아온 적은 없긴 했지
만.
내 질문을 들은 성녀님은 여태 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 이 따금 눈을 끔뻑 거
리며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만할뿐.
애석하게도 성녀님의 소꿉놀이에 빼먹지 않고 등장하는 언니의 정체는
성녀님 본인조차도 모르는 눈치 였다.
그렇게 한참을 회상에 빠져있던 바로 그때.
"쪼옥."
"어허."
간발의 차였다.
상반신을 내던지듯, 또다시 내게 달려들어 입술을 들이밀려고 하는 성
녀님의 존안에 너무늦지 않게 아이언 클로를 먹여 그공세를 저지했다.
의식하고 행한 것이 아니었다.
눈앞에 공이 날아오면 일단 잡고 보는, 인간의 반사 신경으로부터 비롯된
행동.
스스로 생 각해봐도 상당히 무엄한, 다른 신도들이 본다면 졸도를 일으킬
수준의 불경을 저질렀다는 건 자각하고 있으나.
이렇게라도 안 하면, 내 입술과성녀님의 입술 사이에 불편한 랑데부가 재
차 성사되고 말았을 것이 뻔했기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성녀님 . 제 가 입술에 하는 쪽은 안 된 다고, 지 난번에 도 지 지 난번에도 누
누이 말씀드리지 않았었나요?,,
■■••••■'
내가 이래서 방심을 못 한다. 방심을.
던전의 마수들도 이것 보단 생각할 여유를 줬었는데.
"할거야.,,
"안됩니다.,,
"할거야.,,
"안돼요.,,
또 시작이네.
양팔을 붕붕 돌려대며 어떻게든 내게로 거리를 좁히려 드는 성녀님을 여
러 차례 제지한뒤,그녀에 양 겨드랑이에 손을 끼운채 고양이를들어 올리
듯,그옥체를 번쩍 안아올렸다.
대롱대롱.
놀이터의 그네처럼 대롱거리는 성녀님의 모양새가퍽 우습긴 했다만, 여
기서 웃어버리면 말짱 도루묵이었기에.
하마터면 새어 나올 뻔한 허실한 웃음을 짓씹고서, 미간의 힘을 이끌어 모
아 근엄히 말을 읊조렸다.
"웰나. 오빠랑 약속했잖아. 쪼옥은 하루에 몇 번?"
"하루에 몇번?,,
”
• • • •세 번.
II
인간의 원초적인 동정심을 자아내는 저 구슬픈 목소리에 도대체 몇 번이
나 속아 넘어갔는지.
허나, 더는속지 않는다.
"웰나. 이거 봐봐."
허공에서 체류 중이던 성녀님을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놓은 뒤, 사제복의
목 부분을 검지 손가락으로 걸어 늘어뜨렸다.
"이게 다뭘까?,,
내가 어느 정도 성이 났다는 걸 표하되, 그녀가 겁먹지는 않게끔, 목울대에
살짝, 아주 살짝 힘을 주어 말을 읊조렸다.
그러자, 성녀님의 붉은 눈망울이 내 쇄골 쪽을 향해, 한밤중의 헤드라이트
불빛처럼 황급히 비틀렸다.
그럴 만도 했다.
현재 내 목 주위에는 누군가의 이목을 이끌어 모으는 데 최적화된 음흉한
자국들이 빼곡히 도배되어 있었으니까.
이것 때문에 나는 실내에서도 목까지 올라오는 실내복을 결코 벗을 수 없
는몸이 되어버렸다.
"몰라.,,
모르긴 뭘 몰라.
성녀님이 내 목주위에 친히 매설한이 무수한자국들의 정체는히키.흔히
들 키스 마크라고 부르는 남사스러운 물건이 었다.
키스 횟수를 제 약한 뒤, 천천히 그 횟수를 줄여나가는 것으로 성녀님의 못
된 버릇을 고치려고 시도해 본 것까진 좋았으나, 이에 맞서 성녀님은 한 번의
키스 시간을 가급적 길게 늘어뜨리는 것으로 그 부족함을 충당하려 했으니.
그러한 비극적인 서사가 불러일으킨 참극이 바로 이것이었다.
”아까도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라고 해서 봐준 건대. 오늘 웰나가 오빠와
의 약속을도대체 몇 번이나 어겼을까?,,
”
••••
”
표정근이 제 할 일을 소홀히 하기로 유명한 성녀님의 얼굴에 보기 드문 의
문 부호들이 무수히 떠오르고 있었다.
구부러진 미간. 먼 곳을 바라보는 시선. 살짝 벌어진 입.
한눈에 봐도 좀처럼 답이 떠오르지 않는 무언가를 골몰히 생각하고 있단
걸 능히 짐 작할 수 있는 모양새 였다.
그야 그렇겠지. 모를 테지. 알 턱이 없지.
나조차도 30번을 넘긴 이후론 세질 않았으니까.
수녀님이 내가 알현실에서 자고 간다는 희대의 거짓부렁을 내뱉은 그 직
후만 놓고 보더 라도.
성녀님은 못해도 10번 정도는 내게 입술을 갈겨댔기에.
"이것도 봐봐."
이번엔 팔을 걷어붙였다.
손바닥에서부터 팔목에 이르기까지.
초등학생들이 마라톤완주했을 때 몸에 찍는도장처럼 촘촘히 새겨진 이
수상쩍은 문신들의 정체는, 언젠가 라노벨 사제를 살릴 방법을 알려달라 했
을때 성녀님이 내게 새겨줬던 그문양이었다.
아니, 사람몸이 무슨 도화지도 아니고.
성녀님 본인은 아이들이 아빠 얼굴에 낙서하는 것과 유사한 가벼운 감
각으로 저지른 일일지 모르겠으나, 나는 이 모든 걸 가볍게 넘길 수 있을 만
큼의 강단도, 넉살도 갖추지 못한 인물이었다.
그나마 키스 마크는 가만히 내버려 두거나, 냉찜질을 하면 머지않아 사라
지기라도 하지. 이 정체 모를 문양들은 비누로 빡빡 문질러도 좀처럼 사라질
기미가보이지 않았다.
이 문양이 성녀님이 내게 키스 할때마다새겨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건,
그나마 다행 이 라고 볼 수 있었지 만.
성녀님의 키스를 저지해내 지 못하는 이상, 머지 않아 내 몸은 배달 쿠폰이
다닥다닥 달라붙은 냉장고처럼 변해버릴 것이란 사실은 변치 않았기에 .
딱히 마음이 여유로워진다거나 하진 않았다.
"이걸 보고서 무슨 생각이 드니. 웰나."
"....이뻐."
내 생각은 좀 다른데.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툭.
성녀님의 식사용 식기인 목제 포크가 갑작스레 바닥에 나뒹굴며 희미한
소음을 자아냈다.
고작 물건이 하나 떨 어졌을 뿐이 었다.
평소였다면 대수롭지 않게 넘 어갈, 주변이 고요하지 않았더 라면 눈치채는
것조차 난항이 었을, 사소하다 못해 하찮기 까지 한 헤프닝 .
하지만. 본디 물건이 지닌 가치란 늘 상대적인 것이기 에.
"언 彆 ••. 니 彆 彆 ••."
"성녀님••••?■'
바닥에 볼품없이 흐트러진 그 하찮은 물건은,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
도, 일련의 극에서 '언니,라고불리던,하나의 역할을 배정받은배우였으니.
그 순간, 성녀님의 시선이 처음으로 굳게 닫힌 문 쪽을 향해 미끄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