秦 30화 잦 동화책
빼앗은 것과 빼앗지 못한 것.
대의나 명분 같은 번드르르한 부품 없이, 그러한 간단한 것들로만 세상이
이분법 되던 시절이 그녀에게도 있었다.
부드러운 빵보다 딱딱한 빵을 더 선호하는 것. 겨울보다 여름을 더 좋아하
는 것. 아늑한 침대보다 차가운 바닥에서 잠들 때 더욱 안정감을 느끼는 것.
이 러한 모든 것들이 그 부박한 시 간의 잔재 이 자, 피 막 안에 깊숙이 뿌리 내
린 염습이었기에.
두꺼운 베일로 온몸을 칭칭 둘러 감은 지금에 이르러서도, 그녀는 저 자신
의 안검 안쪽에 달라붙은그날의 부박한 상념들을 완전히 씻어내진 못했다.
빼앗지 못하면 빼 앗긴다.
굶주림에 지쳐 의식이 흐릿해질 무렵, 머리만 남은 들쥐를 으적으적 씹어
먹고 있는 고양이를 바라보고서 깨닫게 된 진리.
한때나마그것은,그녀의 삶의 지침이자,궤도이자, 기준이었다.
아비가일.
신께 기쁨이 된다는의미.
자신의 이름이 그러한 뜻을 내포하고 있단 걸 처음 깨닫게 된 날. 그녀의
갈라진 입술이 최초로 자아낸 말은 이러했다.
"좆까는소리하고 있네."
트리아나 아비가일. 당시 나이 12세.
훗날용사의 재목으로서 칭송받게 되는 그녀가, 어느 작은 마을을 주름잡
던 희대의 악동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碢碢碢
"심려를 끼쳐 드려 정말이지 죄송합니다!,,
짝을 찾는 꾀꼬리를 연상케 하는 청아함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야수와 같
은 기백 마저 겸비한 고명한 목소리를 향해, 그 주변의 이목이 모두 쏠리는 건
당연지사 한 일이 었다.
하지 만 그 자리의 어느 누구도, 그 원 기 넘치 는 목소리 에 화답할 생 각은
차마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그럴 것이, 그들은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굳게 닫혀 있으리라 여겼던
문이 저렇게나 시원스레 열어젖혀졌다는게 그저 경악스러울 따름이었기에.
목소리의 주역을 제외한그 자리의 모든 청중은 연신 벌어지려 하는 입의
꼴사나운 추태를 손으로 가리고 있어 야 할 지 경 이 었다.
■■용사! 장장 하루를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다니! 우리 가 얼마나 걱정했는
지알고 있는가!,,
다우나가 걱 정스런 어투로 말을 건넸다.
평상시에도 톡 치면 쓰러질 것만 같은 피비한 인상의 소유자인 다우나이
나, 그 얼굴은 불과 어제와 비교한다고 하더라도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다.
행 방불명된 사제 가 은닉된 가장 유력한 장소로 지목된 수도원 에 서, 그의
채취를 포착하고, 그가 이곳에 거주하고 있단 걸 확신하기까지 한 용사가.
자신의 촉이 빗나갔다는 걸 깨달은 직후 보인 그 흐트러진 모습은, 이지적
인 사고의 소유자인 다우나조차도 뇌 가 마비 될 만큼 충격 적 이 었기 에 .
아피스의 제지가 없었더라면, 다우나는 용사가 틀어박힌 방문을 문째로
뜯어내 서라도, 용사의 상태 가 괜찮은지를 육안으로 시 인하려 했을 게 분명
했다.
"야••••.너 괜찮아•…?"
다우나 보다야 침착했으나, 아피스 또한 말에 눅눅한 걱정이 스며들어 있
긴 매한가지였다.
힘과재량은 파티 내에서, 아니, 이 제도 내에서 이견의 여지 없는최강임
을 입증해낸 용사였으나.
그 내면은 아직 미성숙한 상태. 정신적 인 면모는 한창 성장하고 있는 도중
이라는 건, 파티 내에선 공공연한 사실이었기에.
다우나도 아피스도, 이따금 자신들이 용사를 대할 때, 그녀를 소중한 막냇
동생을 대하듯 대하고 있다는 걸 어느 정도 자각하고 있을 정도였다.
"걱정 감사드립니다! 아피스! 다우나! 하지만 정말! 진심으로 전 괜찮습니
다! 오히려 용사라는 이름에 걸맞지 못한 모습을 보여드린 게 죄스럽고! 부
끄러울 따름입니다!,,
꼿꼿하고 다부진 자세.우렁찬성량.환한 미소.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모습이 었다.
그녀들의 기억 속에 자리한 가장 올바른 형태의 용사라고 단언할 수 있을
만큼 완연했고, 그 자태는 빠진 조각 하나 없이 완벽히 짜 맞춰진 퍼즐을 보
고 있는 듯 무결했다.
하지만 그러한 완벽 이 산산이 비산하는 광경을 불과 어제 목격한 바 있었
던 그녀들에 겐, 용사의 이런 말끔한 모습은 되 려 불안감을 가증시킬 뿐이 었
다.
그녀들은 알고 있었다. 모를 리가 없었다. 지난 한 달간, 용사가 얼마나 절
박하게 사제를 찾아 헤맸는지를. 걱정했는지를. 그리워했는지를.
그가 파티를 처음 떠 났을 때만 하더 라도, 사제 가 스스로의 의 지 로 파티를
떠난 것이 라면, 자신들에 게 그를 붙잡을 명분이나 자격 같은 건 없는 것이라
고, 담담히 현실을 받아들이려 노력했던 용사가.
사제의 신변에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난 걸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급부상한
이후론, 그야말로 인격이 뒤바뀌기라도 한 것처럼 돌변하였기에.
아무리 사제의 신변을 납치했을지도 모를 인물을 향한 것이라곤 하나, 용
사가 비 전투원에게 검을 겨누고 있던 그 광포한 모습은, 직접 보지 못했더라
면 가당찮은 거짓으로 치부해버렸을 게 뻔한광경.
용사의 청렴결백한품행에 익숙해져 있던 그녀들에겐 질 나쁜 백일몽과
하등 다를 바 없었다.
빅팀이 용사의 검신을 손으로 움켜쥐며 그 살의를 목전에서 틀어막은 순
간까지도, 역전연마의 영웅인 그녀들이 전투 태세를 만전이 갖추지 못했던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 었다.
"마음 같아선 결례를 끼친 수녀님을 직접 찾아봬 진심 어린 사죄를 드리고
싶으나! 설사 그 의도가 선하다고 한들, 제 가 가해자고, 수녀님 이 피해자인
이상, 직접 얼굴을 마주한 채 행하는 모든 행위는 그분께 폭력이 될 우려가
있으니 ! 그건 안될 말일 테지요!"
!.
.
불과 어제, 이성을 잃고 칼을 휘두르다, 결국, 울다 지쳐 잠든 인간의 입에
서 나온 것이라곤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 정돈된 논리, 차분한 어투였다.
다우나와 아피스의 시선이 찰나의 순간 교차했다.
그 두 갈래의 목광 안 편엔 눅눅한 불안이 , 거무죽죽한 위화감이 깃들어
있다는 건 명명백백해 보였다.
"그러니 ! 서신으로 하여금 사죄의 뜻을 전달하고자 마음먹었습니 다! 참으
로 다행스럽게도 종이에 성심성의의 사죄를 기술하는 방법은 이전에 체험
해본 바가 있었기에! 바로 지금이야말로! 그날의 경험을 밑거름 삼아 완성한
신 오의! ■용사필기,를 선보일 절호의 기회라고! 저는그렇게 생각한 것입니
다!,,
품 안에 보관하고 있던 고급스러운 편지 봉투 하나를 의 기양양이 치켜든
용사가돌연 언성을 높였다.
그 위용 넘치는 거동은 팔랑거리는 종이가 한순간이 나마 전설 속의 성검
처럼 보일만큼의 눈부신 위세를 자랑하고 있었으나.
용사의 요란한 행실에 익숙해져 있는 그녀들을 기만하기 엔, 그 빛은 평상
시보다 다소 탁한 기색이 없잖아 있어 보였다.
"밤새 틀어박혀서 당최 뭘 하고있나했더니 ••••."
다우나가 허탈한 숨과 함께 말을 게웠다.
인제 보니 용사의 새하얀 얼굴과 손은 잉크 특유의 걸쭉한 검은색으로
군데군데 얼룩져 있었고, 활짝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용사가 틀어박혀 있던
방 안 풍경은 꼬깃꼬깃 꾸겨진 종이 뭉치들로 인해 바닥이 보이 지 않을 지 경
이었다.
전투와 연관된 사안을 제외 한다면 워낙에 일머리 가 없는 용사인지라, 때
아닌 서류 업무에 밤새 머리를 싸매며 고민하고 또 고민했을 그 갸륵한 모습
은 어렵지 않게 상상할수 있었다.
그 눈에 선히 보이는 기특함에 다우나의 긴장의 끈은 아주 살짝 풀린 듯
보였으나.
매사에 신중한 아피스는 여전히 미심쩍다는 눈초리로 용사의 일련의 행
동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니 다우나! 혹여나 실례가 안 된다면, 이 편지를 저 대신 수도원에 전
달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애석하게도 지금의 저의 몸 상태는 정신적인
피로에 찌들어! 적절한수면 시간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 같은지라!"
'■졸리면 그냥 졸린다고 말하면 되는 걸 자는 늘 말에 사족이 많구먼
그래 .... 彆. 알겠네. 이 편지는 내가책임을 지고수도원에 전달해 둘 테니. 자
네는 일단눈을 좀 붙이게나.,,
"감사합니다!,,
못 이기겠다는 듯이 용사에게서 편지를 건네받은 다우나가 자신의 가슴
팍 안에 편지를 수납하며 , 실외로 걸음을 옮겨갈 무렵이 었다.
"으그그극!"
께느른히 기지게를 하며, 삐걱거리는 몸 관절을 가벼운 체조로 풀어주고
있는 용사를 향해 , 아피 스가 고요히 말을 읊조렸다.
야. 용사.
"음! 무슨 일이십니까! 아피스!"
"너. 진짜괜찮은 거 맞아?,,
"네! 괜찮습니다!,,
언제나처럼 해맑게 회답하는 용사.
허나, 밤을 샌 피로의 여파인 걸까.
평소였다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곧장 고개를 틀어,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에 응했을 용사가.
어째서인지 그순간만큼은, 저 자신을 부르는목소리로부터 등을 진 채, 내
리 담긴 감정을 쉬 이 정의할 수 없는 잠잠한 어투로 넌지시 말을 던질 뿐이었
다.
"전 용사니까요.,,
碢碢碢
암담하고 참담했다.
붉은 머리는 불을 부르는 흉조라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고향 마을에서
추방당했을 때조차도, 이 정도로 막막한 심정은 아니 었다고, 아피스가 회고
했다.
한달.고향마을에 있었을 시기엔 찰나라고부르기에도 애매한,그야말로
한 톨에 불과한 시간.
하지만그 한톨의 시간의 대부분을 허비해버린 지금 이 순간, 아피스는 어
째서 인족이 서너 개에 달하는 짧은 단위로 시간을 쪼개 헤아리는 것인지를,
그야말로 절절히 통감하고 있었다.
그것은 용사 본인이 사제를 찾아내는 일에 할애하겠다고 단언한 유예 기
간이자, 그동안은 용사로서 마땅히 수행해야만 하는 과업을 잠시 내려놓겠
다는 폭탄 선 언까지 도 동방한 맹 세 였기 에 .
그러한 기간이 이제 불과수일밖에 남지 않은 지금, 아피스는 매 순간이 초
조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사전 정황들과 여태껏 보고 들어온 증거와 증언으로부터 성녀가 안치된
이곳 수도원에 그 사제 가 있으리란 걸 파티원들 모두가 확신했었던 만큼.
그러한 기대가보기 좋게 허물어진 현재, 상념에 들이닥치는 허탈함의 파
도는 이루 말할 수조차 없었다.
"굼벵이처럼 느려터진 주제에 몸을 숨기는 재주만큼은 여전하구먼 ••••."
어디 걸리기만 해봐라.
원 망 어 린 상념을 애 써 다독이 며 , 아피스는 숙소 인근의 자리 한 작은 서 점
을 향했다.
정 보수집 을 위 함이 아니 었다.
제도 곳곳의 자리한 크고 작은 서점에서 인족의 진귀한 동화책을 수집하
는 건, 아피스가 저 자신의 술렁 이는 마음을 추스르기 위 한 일종의 루틴이 었
다.
아피스가 처음으로 마을 바깥세상에 동경심을 품기 시작한 것도, 우연히
강을 타고 흘러들어온 동화책 쪼가리를 발견한 것이 그 계 기 였을 정도였고.
용사파티에 들어오게 된 경위도, 지금의 용사에게 언젠가동화책에서 봤
던 영웅의 면모를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 었다.
그렇기에 아피스에게 있어, 인족의 동화책은 삶의 불꽃이자, 영혼의 길잡
이. 인생의 지침이라고칭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 아피스?,,
"어?"
그래.결단코과언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