秦 31화 잦만남 (1)
아름다운 날이로다.
새 들은 지 저귀 고, 꽃들은 피 어 나고.
이런 은혜로운 날엔 아늑한 실내에서 나태로이 빈둥거리며, 못 읽고 쌓아
두기 만 했던 책들을 해치우는 것이 숙련된 실내 인으로서의 마땅한 도리 이 건
만.
어찌하여 나는 팔자에도 없는 중노동을 부과받은 채, 실외라는 이름의 구
천을 망자처럼 떠돌아야만 하는 걸까.
퇴직도 휴직도 허락받지 못한 지금의 내 이 비루한 생은, 빛과 소금 없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다고, 나태 복음 제 1 장에 기재하
고픈 충동이 강하게 일렁였다.
"보자彆 彆 ••.분명, 이 근방일텐데••••.
!!
켜켜이 쌓이고 쌓여, 내 시야를 가릴 정도로 탑을 이룬 드럼통들을 한손으
로 떠받친 채, 반대쪽 손 끄트머리에 집힌 꼬깃꼬깃한 메모지의 글귀를 힘겹
게 읽어내렸다.
본래라면 신도들의 아침 예배가 이제 막끝난 직후인 지금시간대는,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성녀님에게 착취당하는 내겐, 숨을 고를 수 있는 몇 안
되 는 한때 이 자, 이 따금 부족한 잠을 보충하는데 도 필수불가결한 귀 중하디
귀 중한 시 간대 이 나.
바로 어제 , 그 원 인을 짐 작할 수조차 없는 불가사의 한 경위로 인해 , 이곳
수도원의 모든 업무를 총괄하시던 수녀님이 돌연 몸져누워 버리신지라.
수녀님의 하루 업무량조차도 감당해내기 버거운 눈치인 자매님들의 간곡
한부탁. 만일 손이 남으신다면, 조금만, 아주 조금만이라도 좋으니, 힘을 보
태줄 수 없으시겠냐는 그 눈물 어린 탄원을 마음이 여린 나는 차마외면하지
못했다.
고작해야 한 사람의 결원이 생겼을 뿐일진대, 집단의 체계가 마비될 정도
라니.
대체할 수 있는 인재가 널리고 널린 나 같은 사람하곤 그야말로 천지 차이
로구나.
수녀님 이 심 각한 수준의 일 중독자라는 건 알고 있었지 만, 그 위 상을 피부
로 직접 체감하고 있으니, 한적한 한량의 삶을 모토로 삼고 있던 내 자아에
경외심과 수치심이 뒤섞인 뭐라 형용할수 없는 상념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여
댔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드디어 목적지에 도달했다.
쿵. 쿵. 쿵. 쿵.
어깨에 이고 있던 드럼통들을 차례차례 바닥에 내려놓고서, 예고 없는 노
동에 불쾌히 일그러지려는 입가에 억지로 호선을 그리며 말을 흘렸다.
"발주하신 포도주 4통. 전해드리러 왔습니다."
"어머!"
.
..
.........
그 직후, 가게 뒷문에서 앞치마를 두른 푸근한 인상의 어느 아주머님께서
한달음에 뛰 어나와 나를 반겨주셨다.
내가 자매님들에게 부탁받은 업무는 수도원의 주된 수입원 중 하나인 포
도주의 납품.
음식에 머리 카락이 한 을만 들어가 있어도 개난리를 치시는 높으신 분들
이, 순결하고 어여쁜 수도녀들이 맨발로 친히 밟아 으깬 포도즙은 환장하고
들이킨다는 건, 다소 떨떠름하게 느껴지긴 했다만.
몇몇 높으신 분들의 그 고상한 취 미 덕분에 고된 하루하루를 근근이 이어
나갈수 있는 이들도 있다는 걸 잘 알기에. 지금에 이르러선 그냥그러려니 하
게 됐다.
하지만, 이따금와인의 품질을 검사한답시고, 유니콘의 뿔을 깎아 만든 마
도구를 구비한 감찰단들이 포도주를 빚는 수도녀들의 처녀성을 감별하러
찾아온다거나.
품질이 인증된 고급 포도주 라벨에 '처녀 확실!, 이라는 상스러운 문구가
대문장만하게 개재되어 있는초현실에 익숙해지기까진 다소의 시간이 필요
하긴 했다.
지금도 종종 눈에 걸리면 어깨가 흠칫거릴 정도니까.
”세상에나! 이 허벌나게 무거운 걸 혼자서 다 들어다 옮긴 거야? 사제 총
각? 오매 ! 호리호리하게 생긴 거에 비해 의외로 허릿심은 두둑한가 보구먼
그래! 나중에 짝지가될 색시는 밤에 고생 꽤나하겠어 하하하!"
11하하. ....."
내가 들어다옮긴 드럼통들을 한 차례 헤아리고는, 내 배후에 일행이 없다
는 게 상당히 놀라운 눈치인 듯한 아주머니께서 연신 호들갑을 떨어댔다.
물론힘들기야했다만,소싯적에 동료들의 단련에 휘말린 것에 비하면 이
정도 수고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 었기에, 마땅한 대꾸가 떠오르지 않아
멋쩍은 미소만 지 어 보였다.
사람 몸통만 한 마수의 알을 등에 짊어진 채, 그 마수에 게 뒤쫓기며, 직각
보다 아주 조금 완만한 수준의 경사를 자랑하는 산을 쉼 없이 오르내 리는 고
행은 이젠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직 장 상사에 의 한 반강제 적 인 등산 징용도 목숨의 안전 정도는 보장해 준
다던데.
덕분에 근력과 다릿심 이 비 약적 인 발전을 이루긴 했다만, 그러한 볼품 없
는 부산물들은 그날 겪은 그 끔찍한 트라우마에 비한다면 너무나도 보잘것
없는 피해보상금이라고, 적어도 난그렇게 생각한다.
"하이고! 얼굴 벌게진 것 좀보게! 여와! 물이라도 한잔하고 가! 그렇게 땀
을 뻘뻘 흘리는 와중에도 몸은 옷으로 꽁꽁 싸매고 앉아 있으니! 당연히 더
워 죽지! 하다못해 팔이라도 좀 걷어붙이던가! 보는 이쪽에서 답답할 정도구
먼!,,
"아, 아니요! 전 괜찮습니다!"
선심 쓰듯, 내 소매를 걷어붙여 주려는 아주머니를 피해 황급히 몸을 뒤로
뺐다.
목을 완전히 가리고 있는 내의 . 잠글 수 있는 단추는 모조리 잠가 놓은 갑
갑한검은 사제복.
열사병 걸리 기 딱 좋은 상태 인 날 배 려해서 한 행동이 란 건 잘 알고 있으나
,아쉽게도 지금 내 목 주위와 팔엔 남들 보여주기 남사스러운 것들이 득실거
리고 있는지라, 이런 마을 대로변에서 함부로속살을 내보인다는 건 안될 말
이었다.
그리고 얼굴이 빨개진 건 더워서 그런 게 아닙니다.
"아무튼 고마워! 힘센 사제 총각! 다음에 또 봐!"
"네. 신이 당신께 미소 짓기를.
다소 형식적으로 들릴지도 모를, 사제들의 인사말을 끝으로, 재빨리 다음
목적 지 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 번 외 출은 외 출허 가증에 카운트되 지 않는 외 출이 니 까.
소기의 할 일을 모두 끝마친 지금, 내 게 주어진 이 황금 같은 자유는 노동
에 대 한 합당한 대 가라도 봐도 무방할 터. 즐기 지 않으면 손해 였다.
"책이라도 살까.,,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서점을 향했다.
내가 왜그랬을까.
碢碢碢
이 주변의 치안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수준이다.
그래, 어디까지나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수준.
이 말은 즉슨, 자주는 아니지만그리 드물지도 않은 빈도로 악행이 자행되
고 있으며, 적어도 그 횟수만큼의 악인은 도사리고 있단 소리다.
"이 쓰레기 같은새끼가!,,
'어억! 으윽!"
사람이 사람을 걷어차는 소리는 생각보다그 성량이 별 볼 일 없다.
들고양이 가 실수로 화분을 떨 어뜨렸을 때 나는 파열음보다도 하찮고, 강
아지 가 낯선 사람을 경 계 할 때 부르짖는 울음소리 보다도 새 들하다.
북적북적한 시가지에선 구태여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놓쳐버리기 쉽상
인 대수롭지 않은 소리.
그럼에도그 소리에는 인력이 있으며,특유의 마성이 있다.
적어도, 이제 곧 서점에서 펼쳐질 새로운 책과의 만남에 아이처럼 설레고
있던 내 의식을 붙잡고, 뒤숭숭하게 만들기엔 충분하고도 남을 만큼 말이다.
옛 직장에선 저러한 악행을 결코 용서치 않는 정의의 화신 같은 사람이 리
더역을 도맡고 있었던지라, 당시의 내 역할은 리더가 악당을 교화하는 과정
을 먼발치에서 구경하고만 있는, 이른바 '지나가는 행인 1’ 이라고 볼 수 있었
다.
하지만.
악인을 교화해줄 정의의 화신이 부재중인 지금 이 순간, 여태껏 그래왔던
것처럼 '지나가는행인 1’배역에 태평스레 몰입하고 있기엔 이곳엔 연기를
방해하는 요소가 너무나도 많았다.
"죽어! 죽어! 이 쓰레기 같은 놈아!,,
11 으윽! 죄, 죄송! 죄송합니! 으윽!"
사람들의 시선이 쉽게 닿지 못하는 구석진 골목에서 사람이 사람에 의해
곤죽이 되 어가는 처참한광경. 드물지만그렇게까지 드문 건 또 아닌 광경.
예전 같았으면 그냥 무시해버렸을 게 뻔한 남일. 나랑은 하등 상관없는 일
•
내가 얽히면 손해일 뿐인 저런 자질구레한 세사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성가신 인간이 되어버린 것도.
필시, 그 리더와, 그 주변인들과 함께 보낸 지난 나날의 영향이 지대하리라
고본다.
"저기•彆 彆 •.거기까지만해두시면 안될까요彆 •••?"
"후욱후욱..... 넌또뭐야….?"
내 목소리가 들린 직후, 사내가 돌연 내 쪽을 주시했다.
분이 덜 풀린 모양인지, 발길질이 끝났음에도, 자신의 거칠어진 호흡을 아
직 원 상태로 되돌리지 못하고 있는 듯한 그 모습은 고삐 풀린 짐승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건장한체격. 훤히 드러난어깨에게서부터 손등까지 내려온 흉흉한 문신.
자신이 험한 생 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이 란 걸 표를 못 내서 안달이 난 듯한
그의 외견에 벌써부터 후회 가 막급했다.
'■저기 • • • 어떠한 연유로 그러고 계신 건지는 잘모르겠지만, 일단폭력은
••• • •
11
"두 번 말 안한다. 죽기 싫으면 꺼져.,,
11하하. • •.죄송합니다• • •.그,그래도제가보시는바와같이 명색히 사제
인 지라,이런광경을못본척 할수는. ••."
"하아. • •.시발. ••.샌님 새끼들은 이래서 문제야. • •."
바로 그때였다.
한눈에 봐도 짜증이 기색이 역력한 거동으로 사내가 천천히 내 쪽으로
천천히 거리를좁히기 시작했다.
"그래,그렇게 처맞고싶으면 소원대로 해줘야지.그렇지 사제 양반?"
"하, 하하. • •."
사내의 그늘이 내 몸을 뒤덮을 만큼 그와 나의 거리가 가까워질 무렵, 사
내가내게 질문을 던졌다.
"댁 뭐야? 대체 무슨 자신으로 이러는 건데? 어? 자신있어? 자신 있냐고?
'웨, 웬만큼은••••.
If
"크하하!"
참고로 난 싸움이 싫다. 못하니까. 자신도 없다.
그러니, 제발, 제발 부탁이니까.
어디 부러지지만 말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