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만남 (4)
한시라도 빨리 인적이 드문 장소로.
화살의 형상을 한 사나운 홍염이 방패 삼아 내세운 철제문을 흔적조차 남
기지 않고서 녹여 없애 버린 직후.
수명이 다해 어그러진 청광만을 자아낼 뿐인 낡디낡은 가로등처럼, 힘없
이 점등과 소등을 반복하고 있을 뿐인 내 사고회로에 명멸한 생각은 오직 그
뿐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온 사방에 폭렬을 나부끼는 저 대자연의 화신을 이
대로 마을 대로변에 풀어놓을 순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바람이여. 오라一."
두 다리에 온 신경을 할애해도 모자란 판국에, 참으로 어리석게도 뒤를 돌
아보고야 말았다.
허나, 이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저 신비스러운 선율이 얽어매고 있는 것의 정체가무엇인지, 여태껏 보고
듣고 체험해온 내 몸이, 저것으로부턴 결코 눈을 돌려선 안 된다고 평화에 해
이해진 내 정신을 따끔히 나무라고 있었기에.
폐가 타들어 가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멈춰 서지 않으리라고 다짐한 나
자신과의 약속을 황급히 철회 한 뒤 , 빙그르르 몸을 돌려 그 목소리의 주인공
을 결연히 마주 봤다.
바로 그 순간, 성난 풍랑이 내 뺨을 각쳤고, 파란만장한 여정에 사그라든
남루한 옛 기억이 불현듯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바람은 인식할 수는 있으나, 시인할 수는 없는 것이라 여겼던 어수룩한
시절. 바람은 존재할 수는 있으나, 형태를 갖출 순 없는 것이라고 폄하해 온
어리석기 그지없었던 지난 나날이 물에 푼 물감처럼 망막에 번져갔다.
"하핫… •."
무심코 자조 섞인 웃음이 새어 나올 만큼.
낯부끄럽고, 아둔하기 그지 없는 과거 가 아닐 수 없었다.
그 과오를 구태 여 지금 정 정토록 하겠다.
바람은 형체가 있고, 의지가 있으며, 누군가의 목을 물어뜯을 엄니 또한
갖추고 있다고.
파앙
그러한 깨달음을 설파할 누군가를 찾기도 전에 강대한 힘에 의해 내 몸이
허공 위로 잠시 체공한 뒤, 바닥에 나뒹굴고서, 막다른 길목에 부닥쳤다.
천지 가 뒤 집혔을 린 없을 테 니. 내 몸이 뒤 집 혔다고 보는 것이 맞는 거겠지 .
시야위편에서 대롱거리는 내 비루한두 다리의 추태를 가만히 보고 있노
라니.
평평한 바닥 위에서 몸이 뒤집힌 거북이가 된 듯한 민망함을 쉬이 떨쳐낼
수 없어, 겸연쩍은 미소로그러한 감정을 흩트려 보고자 다분히 노력해 봤다.
"정령술은 반칙이잖아요.... •.아피스.... •."
콰직.
바로그순간, 내 얼굴이 위치한 자리. 바로그 옆자리에 한눈에 봐도 억센
감정이 다분한 맺힌 듯한 발길질이 내리꽂혔다.
"여물어."
네. 여물겠습니다.
지금 입을 열었다간, 화살 한 두발로 끝나지 않으리란 건 눈에 훤했기에.
그녀의 요구대로 내게 내 리꽂힌 그 모진 목소리 엔 말없이 , 마음속으로만
화답했다.
碢碢碢
"자, 바른대로 불어. 너 지금까지 어디서 대체 뭘 하고 있었어."
"잠시자아를 찾는 여행을 좀••••."
"••••뒤진다?,,
입을 다물라곤 할 땐 언제고, 침묵을 허용치 않는 아피스의 질문 공세는
그야말로 한도 끝도 없었다.
여태 어디서 뭘 하며 먹고 살아왔는지부터, 왜 안부 연락을 하지 않았는지,
잔병치레는 없었는지 같은 사소한 사안까지도 꼬치꼬치 캐묻는 그 모습은,
자식의 자취방을 방문한 어머니의 인영이 어른거릴 정도였다.
사실, 그렇게 낯설게만 느껴지는 광경은 아니었다.
장수족 특유의 은혜받은 수명으로 인해 , 파티 내 에 서 최 연장자의 포지션
담당하고 있는 아피스가, 나를 포함한 파티원 모두를 동생 내지는 조카 정도
로 취급하고 있다는 건, 파티원 모두가 알고 있고, 아피스 본인만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사실 이 었으니 까.
아피스와 다우나.
파티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견원지간으로서 명성이 자자한 그녀들이 눈
만 마주치 면 충돌하는 가장 근본적 인 원 인을, 나는 아피스의 이 러한 면모가
크게 한몫하고 있으리 라고 보고 있었다.
하루의 태반을 독서에 할애하며, 자신의 건강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듯한
다우나의 생활 방식은, 동료들을 가족처럼 여기는 아피스의 눈엔 상당히 고
까워 보였을 것이 분명할테니.
이제 막사춘기가온 아이와그런 아이의 일탈에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갈
피를 못 잡고 있는 서투른 부모.
별 시 답잖은 일로도 매 일 투덕 거리 기 바쁜 두 사람을 보며 , 적 어도 내 가 느
낀 인상은 그러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우리가 던전에서 뼈 빠지게 고생하고 있는동안, 넌 줄
곧 이 근방의 수도원에 어영부영 몸담은 채로 별 탈 없이, 호의호식하며 잘
먹고 잘살고 있었다. 이 말이지?"
'네 彆 彆 ••.그렇습니다.... •.죽을죄를참으로몸둘바를 모를 彆 •••."
"진짜야?"
"네?,,
"내 눈 똑바로 보고 말해. 그 말 진짜냐고."
아이의 거짓말을 판독하려는 부모의 얼굴이 연상될 만큼 단호한 어투.
그녀와 함께 지낸 시간이 결코 짧은 편이라곤 할 수 없는 나조차도, 그저
낯설게만 느껴질 뿐인 생소한 분위기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 아피스?"
"진짜냐고. 내가 묻고 있잖아."
누추한 골목길의 막다른 벽. 그곳을 등지고선 나의 양옆을 양팔로 가로
막으며, 서로의 콧등이 맞닿을 거리까지 내게로 거리를 좁히는 아피스.
몸 어딘가를 화살로 꿰뚫릴 걱정만 하고 있던 나로선, 내게 무언가를 성토
시키려는듯한 아피스의 그 애절한눈빛 앞에선, 입가에 호선을 그려 넣어 분
위기를 누그러뜨리는 것 말곤, 마땅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무, 물론이죠.,,
"••• •그래. 그렇겠지. 당연히 그렇겠지.,,
큰 시름 덜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돌연 아피스가 안도의 기색이 역력한 진
한숨을게워냈다.
하지만, 그러한 아피스의 의미심장한 행동에 의구심을 품을 겨를조차 없
이.
"드디어 찾았다! 이 남창새끼!,,
참으로 듣기 거북한 호명을 부르짖는 사내의 고성이 고요한 골목길에 쩌
렁쩌렁 울려 퍼졌다.
碢碢碢
'■형님! 저놈이야! 저놈! 저놈이 날 벽에다 집어 던진 그 얼어 죽을 남창
새끼야!,,
"하! 바로! 네놈이란말이지!? 세상에 둘도 없는 내 귀여운 아우를벽에다
집어 던진 찢어 죽일 새끼가!,,
말투만 대충 흘겨 들어도, 그 체 격과 신분이 능히 짐작될 만큼 걸걸한 목소
리 가 두 개 . 그중 하나는 상당히 귀 에 익 은 목소리 였던지 라, 소리 가 들려 온
방향으로 시선이 옮겨가는 건 불가피했다.
!
...
그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불과 조금 전에 내 가 벽에 다 실수로 내동댕
이친 거한의 사내였다.
그리고 그의 옆에 자리한 건, 그와 똑 닮은 외모에 수염만 덥수룩한, 그의
친형으로 추정되는 인물.
그들의 배후엔 못해도 20명은 돼 보이는 험상궂은 떡대들이 줄지어 있었
고, 오래된 핏물로 얼룩진 연장을 저마다 하나씩은 손에 꼭 쥐고 있는 그들
은, 안 그래도 좁아터진 골목길을 후덥지근한 땀 냄새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
”길 가던 날 다짜고짜 붙잡더니 !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세기의 남
창이 될 재목이라는 개소리를 씨불이던 녀석을 한창 손봐주고 있었는데 ! 저
놈이 다짜고짜 그놈을 도와주고는 함께 달아났어! 생 긴 것도 딱 기 생 오라비
같이 생긴 것이 ! 그놈이랑 한패인 게 분명해!,,
"그래! 그렇단 말이지! 하나뿐인 아우가그런 치욕을 당했는데! 여기서 가
만히 있으면 나는 너희들의 형님 노릇을 할 자격도 없는 거겠지! 안 그러냐
아그들아!,,
"예 맞습니다! 형님!,,
그가 손가락으로 내 쪽을 거듭 가리 키 며 울분을 토해내 자, 그 비통한 목소
리를 화롯불의 불씨 삼아, 뜻을 한데 이끌어 모은 사내들이 우렁찬 기합과
함께 자신들의 투기를 연마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내가의도치 않게 벽에 내동댕이친 사내는 자신의 수모를 되갚
아줄 듬직한 뒷배를 보유한 인물인 듯싶었다.
동료의 아픔을 자신들의 것인 양 공감하는 저들의 눈물겨운 전우애는 퍽
감동스럽긴 했으나,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지금의 난의도치 않게 억울한누명을쓰게 된 울분을 치아끝자락에 깨물
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친 상태 였으니까.
작은 선행이 적당한 오해를 불러일으켜, 이렇게 큼지막한 불행으로 열매
를 맺는 기적을 지근거리에서 보게 된 것이니.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도 별수
없는 일이었다.
"저기 ••• 彆.저희들사이에 사소한오해가생긴 모양인••••."
"하! 오해는 얼어 죽을! 얘들아! 지금 당장저 새끼의 가죽을 산채로• •• •.'
'
"물이여. 오라一."
바로 그때였다.
내 가 그들과 나 사이 에 생 긴 오해를 말로 중재해 보려 한 바로 그 순간.
날카로운 격랑이 한 차례 내 시 야를 휩쓸었고, 귓전을 덮친 파도의 포효
안 자락에 희 끄무레 한 비명들이 뒤섞여 있다는 걸 내 아둔한 지 각 능력이 떠
듬떠듬 인식해갈 무렵.
일말의 예고조차 없이 등장한 격파가 이따금 몸을 비틀 때마다 어른거리
는 백색 포말이 짐승의 어금니처럼 꿈틀거리고 있음을 너무나도 뒤늦게 포
착한 내가.
이 살인적인 물보라를 일으킨 유력한 범인을 제지하기 위해, 갈라진 흉성
을 다급히 부르짖었다.
"아피스!"
그 직후, 파도가 거쳤고, 그 푸른 장막이 가리고 있던 참극이 서서히 그 모
습을 드러냈다.
"쿠, 쿨럭!,,
"커억!"
"꼬아아아! 내 팔이 ! 팔이 !"
흡사, 지진해일이 민가를 휩쓸고 난 이후의 광경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군데군데 무너진 벽. 움푹 패인 바닥. 성난 파도에 몸 이곳저곳을 물어뜯긴
사람들이 자아내는 고통이 가득들어찬 통곡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그러한 것들에 의식을 할애할 여유는 지금의 내겐 존재치 않았다.
"너 彆...! 저게 무슨 소리야.... 彆! 남창이 ....彆 라...彆 니.....,,
격양된 감정으로 난폭하게 흔들리는그녀의 금빛 동공이 물에 젖어 훤히
드러난 내 상의 쪽을 향해 흉흉히 미끄러지고 있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