秦 40화 잦 꺼진 등불
녹아 사그라들 것만 같았다.
내리쬐는 태양빛을 피해 바닥에 스며드는눈송이처럼, 머리를 짓누르는
열원을 이기지 못하고서 볼품없이 바닥에 주저앉고 마는 양초처럼.
아피스는 서릿발보다도 얄브스름한 자신 같은 건, 손을 휘젓는 것만으로
도 간단히 녹여버릴 수 있을 게 분명한 저 찬연한 등불이 오늘따라 유독 더
눈부시다고 느꼈다.
그래,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싶을 만큼.
차라리 까마득한 어둠 속에 의식을 내던져버리는 편이 나으리란 생각이
절로 들 만큼.
”아피스의 사역령이 파발한 이 고대 문자! 이거! 그 녀석 찾았다! 라고, 읽
는 거 맞죠! 그렇죠!,,
나뭇잎을 오려 접어 만들어낸 듯한 작은 나비. 그 정체는 아피스가 사제를
발견한 그 직후, 단잠에 빠져있던 용사를 향해 날려 보낸 비상 연락용 사역
령.
그 조그마한 목엽을 두 손으로 소중히 움켜쥔 채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
어대는 용사의 천진난만한 거동은, 유랑극단의 방문을 환영하는 어린아이
처럼 참으로해맑기 이를데 없었다.
아피스는 생 각했다.
그녀가 이렇게나순수하게 웃는 걸 보는 게 도대체 얼마 만인 걸까. 라고.
얼마만. 얼마만이라.
참으로 엘프답지 않은 사고가 아닐 수 없었다.
기 껏해 야 한 달 남짓한 시 간이 었다.
타 종족과 규격을 남달리 하는 수명을 가진 엘프족에 겐 눈을 감았다 뜨는
찰나에조차도 미치지 못하는 시간.
하지만 자취를 감춘 사제를 뒤쫓는 그 한 달 남짓이라는 시간 동안 용사
가 얼마나 힘든 나날을 지새웠는지를 똑똑히 보아온 아피스는, 그 찰나에조
차도 미치지 못하는 시간을 영겁에 필적했으리라고 회고하고 있었다.
년 단위 에도 이르지 못한 시간을 아마득하다고 느끼게 되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언젠가 그 사내가 말했던, 시간은 상대적인 것이란 기이한 말의 의미를 지
금이라면 온전히 이해할수 있을 것만 같다고 느낀 아피스였다.
지금그의 얼굴을 떠올린다는 건, 대단히 부아가 치미는 일이긴 했지만.
"그래서! 아피스! 신부님은! 신부님은 도대체 지금 어디 계신 겁니까! 같이
오시진 않으신 겁니까! 혹여나! 생활이 궁핍하여 배를 굶주리고 계시진 않으
셨습니까! 어디 다치신 곳이나 잔병치레를 앓고 계시진 않더랍니까!,,
"요, 용사! 알겠어! 알겠으니까! 일단진정하고 이것 좀놓고 말해!"
아피스의 어깨를 굳세게 붙들고서, 폭풍 같은 질문 세례를 퍼붓는 용사의
모습은, 절벽에 매달려 있기 라도 한 것처럼 절박하기 그지없었다.
입만 웃고 있을 뿐이지,그 해쓱한 낯빛은 광활한 사막 한 가운데에 고립
된 조난자가 물을 찾아 헤매는 순간 자아내는 적자생존의 발악이 어른거릴
정도였다.
"헛! 죄, 죄송합니다! 아피스! 제가 그만 또!,,
"나원 참… •.그꼴은또뭐야… •."
용사의 차림새는 적잖이 기이했다.
부엌칼을 손에 쥐고서, 앞치마를 몸에 두른 채, 코에 마개까지 끼우고 있
는모습은, 기이함을 넘어 수상쩍어 보이기까지 했다.
"요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뭐?..
그 직후, 아피스의 황망한 시 선 이 용사의 배 후에 자리 한 거실 테 이 블을 향
했고.
"세상에…•."
아피스는 경악했다.
상다리가부러지는게 아닐까싶을 만큼, 테이블 위를 빼곡히 장식한진수
성찬들도 퍽 놀라웠으나.
아피스가 놀란 가장 큰 이유는 그 음식의 양과 가짓수 때문이 아니었다.
아피스의 이목을 이끈 건, 음식의 종류.
오감이 지나치게 예민한 탓에 향이 진하거나, 잡내가심한음식을 그야말
로 칠색 팔색하던 용사가, 평소라면 학을 떼는 향이 진한 음식들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미간하나 찡그리지 않고 있었기에.
특히, 테이블 가운데 접시에 쌓아 올려진 두툼한 고기의 산과 만년설산최
고급 얼음을 한가득들이부어 놓은 얼음통 안에 자리한붉은 음료의 정체는.
미노타우로스 직화 구이와 발틴산 레드 와인.
저 것들은 유별난 향 때문에 용사가 유독 꺼 리는 음식 이 자.
그가 유독 좋아하던 음식 .
"••••혼자다한거야?,,
"아뇨! 재료의 조달과손질, 요리의 조리와 식기의 준비만 제가했을 뿐이
지! 빅팀과 다우나가 맛을 보는 것에 협력해주지 않았더라면, 이 정도의 만찬
을 준비할순 없었을 겁니다!"
그건 혼자 다 했다고 말하는 거 야.
라는 면박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용사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자아
내는 우수를 이기지 못한 아피스는 결국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야.용사…•.너이거…彆."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아피스! 여깄는모든 식재료들은 제 개인 사비로
마련한 것들이니까요! 파티 공금에는 단 한 푼도 손대지 않았습니다!,,
"아니 • 彆 • •.그게 아니라. • • •
■■하하! 재료 손질과조리 때, 냄새 때문에 단단히 혼이 났습니다! 마물의
피와 내장의 비린내는 온몸에 뒤집어써도 아무렇지도 않은데 ! 어째서 기호
에 맞지 않는 식재료의 향은 이토록 달갑잖게 느껴지는 걸까요! 헛! 과연 그
렇군요! 이것이 인체의 신비! 참으로 신기할 따름입니다!"
"하아彆 • • •.됐다• • 彆 •.것보다,그건 당연한거잖아. 어쩔 수 없이 뒤집어쓰
는 냄새랑 좋아서 입에 넣는 냄새가 똑같을 리가. •••. 잠깐 • •••.너 손에 그
거 뭐 야.,,
"헛!,,
위풍당당한 말본새와는 달리, 자신의 두 손을 황급히 등 뒤로 감추는 용
사의 부자연스러운 거동을 아피스는 놓치지 않았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긴! 그손 이리 내! 어서!"
'■아, 아피스! 하늘! 하늘 위를 한번 봐 보십쇼! 별똥별이 지나가고 있습니
다!,,
'■여긴 실내야! 이 등신아! 그런 시답잖은 간계는됐으니까! 손 보여줘 봐!
빨리!"
"네에....
떠듬떠듬 손을 내미는 용사.
그 다부진 손바닥이 크고 작은 검흔과 엉성한 붕대질로 어질러진 걸 똑똑
히 확인한 아피 스가 별안간 험한 숨을 짓씹 었다.
"이 바보가.…!"
■■하하! 재료 손질에 힘을 줄 때마다! 무심코! 칼날에 마력을 불어넣고
말았습니다! 습관이란 건 참으로무서운 것이로군요! 명색이 용사라는 이름
을 걸머지고 있는 자가 고기 한 점조차 만족스럽게 썰어내지 못하다니! 참으
로 부끄러울 따름입 니다!,,
용사의 가사 능력은 미흡하다 못해 처참한 수준을 자랑했다.
마치 싸우기 위해서만 태어난 사람처럼. 머릿속에서 전투와 연이 없는 부
속품들을 모조리 치 워 버 리 기 라도 한 것처 럼 .
접시를 들어다 옮기는 간단한 일조차도 그걸 깨버리기 일쑤일 정도로 가
사에는 젬병이 었던 그녀였기에 .
파티원이 돌아가며 도맡는 가사 당번을 용사 혼자만이 보결 처리 받기까
지 했을 정도였다.
물론, 용사가 남들에게 베풂만받고서 돌려주지 않는 건, 용사이기 이전에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도리에 어긋나는행위라며, 대뜸 집안일 특훈을 강행
하려던 통에 그 과정이 마냥 순탄하지 만은 않았지 만.
사제가세 치 혀를굴려 순진한용사를 어떻게 잘구워삶은 덕분에 용사가
부엌에 발을 들이는 불상사는 성공적으로 저지해낼 수 있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까진.
"애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왜 아무도 이걸 안말린 거야!?,,
아피스의 신경질적인 고성에 잔뜩 죽이 든 듯한 용사가 어깨를 움찔거렸
다.
그러 자, 부모에 게 자신의 잘잘못을 고백 하는 아이 처 럼, 용사가 한쪽 손을
조심스레 거수하며 아피스에게 말을 건넸다.
"죄, 죄 송합니 다. 아피스. 사실, 빅 팀이랑 다우나도 여러 차례 저를 말리 려
하긴했지만,그,그게… •."
..뭐!..
참으로 면목 없다는 듯이 용사가 바들거 리는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
다.
그렇게 용사의 손끝을 따라간 아피스의 시선이 발견한 건.
"뭣! 다우나!? 빅팀!? 너히들 바닥에서 뭐 해!?,,
"끄으으••••."
"꺼어. . • •;'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입에 고기가잔뜩 쑤셔 넣어진 채, 바닥에 주검처럼 나뒹굴고 있는 다우나
와 빅팀를 향해 아피스가 낭랑히 목을 울렸고.
그 바로 옆에서 허리를 꾸벅꾸벅 숙여대며 격한 사죄를 반복하고 있던 용
사가 이 일련의 자초지종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그, 그게! 맛보기용으로 건네드린 몇 종류의 고기에 아무래도 독이 들어
있었던 모양이 었는지 라! 제 가 맛봤을 때는 괘, 괜찮아서! 제 가 만독불침 이 란
사실을 망각하고서! 그,그래서!"
”아, 알았어! 대충 어떻게 굴러간 상황인지는 알겠으니까! 입 닫고! 머리
숙이는 것도 그만해 !,,
"네, 넷!,,
아피스의 단호한 어투에 차렷 자세로 회답한 용사.
엄격한 누나와 말썽을 일삼는 철부지 동생을 보는 것만 같다.
이 따금 아피스가 용사의 철없는 행동을 다그칠 때마다, 그 사제 가 우스갯
소리로 하던 말이었다.
"하아. 彆 彆 •.해독약은 이미 먹여 놓은 거지?"
"네 ! 물론입니다! 혹시 몰라서 기력에 보탬이 되는 두툼한 고기도 입에 한
가득 넣어드렸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 금세 정신을 되찾으실 게 분명합니 다
!"
"그래… •.장하다장해… •."
"하하! 감사합니다!,,
그렇게 독극물과 고기로 인한 기도 압박의 이중고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
던 파티원을 가까스로구조해낸 아피스가, 테이블 위에 가득놓인 음식을 쓱
한 번 훑어보곤, 다시금 용사를 향해 시선을 옮길 무렵이었다.
"그래서 말입니다! 아피스! 찾으셨다던 신부님은 언제쯤 이곳에 와주신답
니까! 곧오시는 겁니까! 아니면 한 시간뒤? 두 시간뒤? 헛! 혹여나 내일이
나 모레 오실 예 정이십니까! 그건 큰일입니 다! 모처 럼 준비 한 축하 요리 가 식
어버릴지도 모릅니다!,,
"그, 그건…彆."
한눈에 봐도 잔뜩 신이 난 기색인 용사가 산타의 선물을 고대하는 어린아
이처럼, 연신 아피스를 보채고 있었으나.
■전 앞으로 제게 남은 평생 동안, 두 번 다신, 용사님의 얼굴은 보고 싶지 않
아요.,
희망을 듬뿍 머금은 순진무구한 얼굴이, 그 차가운 미소, 냉담한목소리의
베일에 가로막혀버렸기 때문일까.
"미안. 彆 彆 •.내 착각. 彆 • •.착각이었어•• 彆 •."
"어어....?"
결국 아피스는 그 냉혹한 진실을 있는 그대로 고할 용기를 내지 못했고.
그 구차한 변명, 비겁한 선택은, 용사의 보석 같은 눈망울에서 빛을 뿌리
뽑기에 이르렀다.
"미, 미안••••.용사••••."
”• • • •”
파스락.
기름을 다 써버린 등불이 어둠을 찢어 흩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