秦 54화 잦 라디오
"허억!"
악몽에 시달린 사람들이 으레 그러하듯, 그녀 또한무언가에 쫓기듯, 다급
히 몸을 일으켰다.
자면서 꾸는 꿈은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지고, 이루고 싶은 꿈은 시간이
지날수록 선명해진다지만.
그녀의 경우엔 반대였다.
잊어버리고 싶은 악몽은 날이 갈수록 선명해져 갔고, 이루고자 했던 비원
은 날이 갈수록 흐릿해져 만 갔기 에 .
그녀는 꿈이 부상하기 쉬운 고즈넉한 잠을 늘 기피해왔다.
"후우….,,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건 무의식적인 행동이 었다.
구태여 거울을 보지 않더라도, 지금 자신의 얼굴이 추구해오던 이상과 동
떨 어진, 추레 한 몰골일 것이 란 건 뻔하디 뻔했으니 까.
평소의 완벽한상태로되돌아오기 위해선,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음!..
짝. 양손으로 자신의 뺨을 거세게 두드린 그녀가 기합을 다졌다.
평소였다면, 이 정도만해도 정신에 불이 들어왔을 텐데.
아직 의식에 흐릿한 안개가 끼어 있는 걸 보아하니, 아무래도 술기운이
조금 남아있는 모양이 었다.
술기운?
몽롱한 의 식 에 명 멸한 사소한 의 문 하나. 그녀 가 고개를 갸웃거 렸다.
만인이 선망하는 이상의 영웅이 될 것이라고, 굳게 다짐했던 그녀였기에.
남들 앞에 함부로 내보여선 안 되는, 자신의 결함 정도는 당연히 자각하고
있었다.
술에 약하다는 것.
서너 잔 정도만 마셔도 그날의 기억이 완전히 소실되 어버릴 정도로 술에
취약한 탓에.
어지간한 일론 술을 입 근처에 가져가 대지도 않는다는 것.
그런 자신이 정신을 잃을 때까지 술을 마시다니.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혹시 , 이 모든 게 자신의 약체화를 노린 누군가의 사악한 계략인 건 아닐
까!
라는, 합당한 의구심이 그녀의 뇌리에 떠오를 무렵.
치직. 치지직.
귀에 거슬리는소음.
도무지 이 세상의 것이라곤 여기기 힘든 기괴한 잡음이 두서없이 그녀의
의식을 붙들었다.
이 윽고, 그 소리의 주체 를 눈으로 좇아보려 한 그녀 였으나, 이는 불필요한
수고였다.
그것은그녀의 바로코앞에 이미 도래해 있었으니까.
이를테면, 아직 못다 읽은 그림극의 그림이, 화자의 손에 의해, 그다음 문
단으로 순식간에 넘어가버렸을 때처럼.
그 어떤 전조도, 징조도 없이, 처음부터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처럼.
그것은 모습을 드러 냈다.
작은 나무상자.
아니, 정확히는 나무 상자처럼 보이는 무언가였다.
반듯한 사각형 형태의 목재 조형물.
그 전면엔 단추 크기의 동그란 쇠 장식들이 다닥다닥 달라붙어 있었고,
윗부분엔 곤충의 더듬이를 연상케 하는 기기묘묘한금속 막대기 두 개가 장
식되어 있었다.
외 형으로 그 용도를 어림 짐 작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것은 그녀 가 여태 껏 보아온 그 어 떤 물체 와도 합치되 지 않는 유별난 생
김새를 자랑하고 있었으니까.
누군가가 만들어낸 인공적인 조형물이란 사실 하나만이 명확했다.
치지직. 치직.
그리고 머지않아, 그것은 그녀에게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용사님. 저는一]
콰직!
허나, 그 말은 끝맺음 되지 못했다.
그녀의 다부진 수도가 그 수상스럽 기 그지 없는 물체를 순식 간에 박살 내
버렸으니까.
"후우… 彆."
지겨운기색이 역력한한숨.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당황을 금치 못했을 그 이상스러운 사태를 목전 앞
에 두고서도, 그녀는 당혹스러워할지언정, 당황하진 않았다.
저것.
'라디오'라는 이름을 가진 저 정체불명의 물체는.
근래 들어, 그녀의 꿈속에 종종 나타나곤했던 물건이었기에.
그녀는 지금, 잠에서 덜 깬 자신이 꿈속의 잔예. 이른바, 헛것을 보고 있다
고여기고 있었다.
"이래서 술은만병의 근원이라고하는것이로군요.... •. 여태껏 꿈에서만
나오던 물건이 현실에까지 모습을 드러내다니 .... 彆. 무심코 주먹을 내지
르고 말았습니다.....
fI
어느덧 입에 딱 달라붙어 버린 과장된 연극풍 어투.
처음 이러한 말투로 말하기 시작했을 땐, 그녀의 동생도, 그녀 본인도, 대
단히 어색해했었고.
그로 인한 수치스러운 경험도 여러 차례 겪어왔었지만.
지금의 그녀는 혼잣말을 할 때조차 이러한 말투가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
게 되는, 이른바, 배역과물아일체가되는 경지에 다다라 있었다.
그녀의 이 러한 변화를 노력 에 의 한 결실이 라고 불러 마땅한지 는 모를 일
이지만.
"서둘러 아침을 시작할 채비를 해야....."
바로 그때였다.
'■기껏 현실에서도 말 섞을 수 있게 됐는데, 그렇게 주먹부터 내지르고 보
는 건 조금 너무한 처사지 않나요?,,
목덜미를 간질이는 듯한 낯선 여인의 목소리 가 몽롱하던 그녀의 의식을
한순간에 각성시켰고.
그 직후, 그녀의 상념을 덮친 거센 위 기감은, 검을 휘두른다는, 얼핏 난폭
해 보일 수 있는 그녀의 방어 행위에 합당한 당위성을 부여하고 있었다.
혹독한 수련을 거쳐, 기존의 감각들이 인간의 경지를 아득히 초월했다고
봐도 무방한그녀의 배후를.
이토록 간단히 빼앗고, 태연스레 말까지 건네고 있는 낯선 인물이, 평범한
존재 일 리 없다는 판단하에 행한 합리적 인 처사였다.
"빅팀! 다우나! 침입자 입니一.,,
바로 그때, 동료에 게 위 기를 알리 며 휘 두른 그녀의 칼이 공중에 서 우뚝
멈추어 섰다.
그녀가 몸을 비튼 그 직후, 눈 앞에 펼쳐진 그 믿기 힘든 광경이 사고를
정지시 켜버렸기 때문이 었다.
"보고 싶었단다. 우리 딸.,,
어머니였다.
자신을 낳아준 사람. 지켜주고, 보듬어주던 사람.
그리고, 버린 사람.
한때, 미칠 듯이 그리워했던 인물이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던 그 모습 그대
로 나타난 것이 었기 에 .
찰나의 순간이라곤 하나, 그녀가 움켜쥔 칼에 힘을 빼버리고 만 건 어찌할
도리 가 없는 일이 었다.
.
...
그 어떤 위대한 영웅이라 한들, 태어난그 순간엔 누군가의 귀여운 자식에
불과하니까.
낳아준 인물 앞에서 몸과 마음이 누그러지는 건,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존재에게 부과된 무형의 족쇄와도 같으니까.
하지만, 모든 일에는 예외 가 있는 법.
으득.
콰앙
별안간, 이빨이 뿌득거 린 그녀가 칼을 휘 둘렀고.
그 화살과도 같은 검격은 그 어머니의 형상을 한 무언가의 손을 자비 없이
꿰뚫었다.
"꺄악!
II
오른 손바닥을 꿰뚫려, 순식간에 벽에다 매다꽂혀버린 그것이, 한차례 신
음을 게워낸 직후, 괴롭다는 듯이 연신 몸을 뒤척여댔지만.
화가 머리끝까지 난 그녀에게선, 연민의 기색은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
었다.
"환영 마법! 혹은, 도플갱어입니까! 아쉽게도 제겐 먹히지 않을 겁니다!,,
'■하핫! 보기완 다르게 냉철하시군요! 겉모습뿐이라곤 해도, 자신의 어머
니의 모습을 한 존재를 죽이 려 들 수 있다니 ! 이 거 이 거 ! 더더욱 당신에 게
호감이 가는데요! 아! 참고로 이성적인 호감이 있단 뜻으로 한 이야기는 아
니니 안심하세요."
"태평스레 입을 놀릴 여유가 있으시다면, 정체와 목적을 밝혀주시기 바랍
니다.몸에 바람구멍이 하나더 생기는 게 싫으시다면요.,,
칼자루를 손에 쥔 건 분명 자신일 텐데.
심적인 여유가느껴지는 건,오히려 손이 꿰뚫린 상대방쪽.
그 불합리한 모순에, 그녀가 평소의 그녀답지 않은 초조함을 느끼고 있을
무렵이었다.
■■하아..... 안타깝네요 彆 • ••.저는 당신이 저의 그릇이 되어주었으면 할
뿐인데 말이죠..... 잠깐의 담소조차도 허락해주지 않으시다니 ••••.
"그릇••••?"
”맞아요! 그릇이요! 바로 얼마 전에 제 친구 중 하나가 자기 취향에 꼭 맞
는 그릇을 드디어 찾아냈다고 시종일관 자랑을 해대는데! 그게 어찌나 부러
웠는지 ! 저도 반세기 전부터 그런 그릇이 하나 꼭 있었으면 했거든요! 그래
서….."
"뚱딴지같은 소리는 그쯤 하시고! 당신의 본래의 목적과 정체를 지금
당장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제 인내심이 바닥나기 전에요!,,
"흐음. • • • . 전 잠시 당신과 대화를 나누고 싶을 뿐인데 • • • • . 왜 화를 내시
는거죠. • • •.역시 이 모습으론안되는건가요. •••."
갑작스레 왼손을 자신의 얼굴에 가져다 댄 그것이 음흉한 미소와 함께 그
것을 쓸어내렸다.
마치, 무대를 정돈해두기 위해 잠시 펼쳐놨던 커튼을 극이 시작함과동시
에 거둬들이는 극단 직원과도 같은 자태로.
그 물이 흐르는듯한유려한움직임은, 정체가불분명한 괴한의 침입에 맞
서, 표독히 의식을 곤두세워놨던 그녀의 경계 태세를 너무도 보기좋게 따돌
려 냈고.
"허튼짓할 생각 말라彆 •..고....."
머지않아,그녀의 말문이 틀어막혔다.
아니 , 정확히는, 호흡이 , 맥박이 , 심 장이 , 그녀 가 살아 있다는 걸 증명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멈춰버린 듯했다.
방금 겪은 그것이 사고의 정지였다면, 지금 순간의 정적은 사고의 표백이
라고 말할 수 있으리 라.
"아파..... 아파요..... 용사님 .. . .."
''시 . . . . 브. . . . 니 . . . . "
브
•
고장 난 카메 라 렌즈처럼 , 수축과 이완을 쉴 새 없이 반복하고 있는 푸른
동공.
이제 막 마라톤을 끝마친 사람처럼 가쁜 호흡.
칼자루를 손에 쥔 손은 지금 당장이 라도 그걸 놓쳐버 릴 것처 럼 바들바들
떨려대고 있었다.
늘 그녀를 괴롭혀왔던 끔찍한 악몽이, 망막에 들어찰 때마다, 눈을 질끈
감아 외 면해왔던 그 후회 스러운 과거 가.
자신의 바로 코앞에서 선명히 재현되고 있었으니까.
자신의 손에 의해, 오른손이 꿰뚫린 채 구슬픈 눈물을 흘리고 사내의 얼굴
•
너무나도 눈에 담고 싶었던 얼굴이자, 두 번 다신 눈에 담고 싶지 않았던
얼굴.
사랑하는 이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얼굴.
"용사! 침입자라니! 그게 무슨소린가!,,
"누나!,,
바로 그때였다.
그녀의 다급한 호출을 들은 다우나와 빅팀이 그녀의 방안에 뒤늦게 난입
해 들어왔다.
하지만.
"아, 당신들은 필요 없어요.,,
사제의 얼굴을 하고 있는 그것이, 문학적인 표현이 아닌, 문자그대로, 입
이 귀 에 까지 올라간 흉흉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들을 향해 검지 손가락을
치켜세웠고.
그 불길한 거동으로부터,여태껏단한번도 겪어본적 없는 진도의 위기감
을 직감한 용사가 황급히 몸을 날렸다.
"다우나! 빅팀! 오면 안됩니다一!"
파앗!
그 직후, 그것의 손가락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섬광이 그 일대를 순식간에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