秦 56화 잦 물벼룩
한 차례 파공성이 메 아리쳤다.
아니, 여러차례인가.
"제길! 제기랄!,,
텅 빈 화살통을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내던진 아피스가 별안간 분통을 터
트렸다.
그 도처엔 부러진 화살들이 다 쓴 성냥개비처럼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
었고.
그 모든 게 실패의 흔적이란 건, 비통함에 물든 그녀의 표정만 놓고 보더
라도 쉬 이 알 수 있는 사실이 었다.
"정령활에 다, 폭궁활까지 쏴 갈겼는데 . 꿈쩍도 안 한다는 게 말이나 돼!?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거야. 이 거지발싸개 같은벽은!,,
말투는 다소 사납긴 했으나, 그 논지는 지당했다.
엘프들의 전유물이라할수 있는 정령 마법.그위에 극한의 극한까지 단
련된 아피스의 근력이 더해진 정령활의 위력은 대포에 필적했으니까.
더욱이, 폭궁활은 용의 비늘도 일격에 꿰뚫어버릴 만큼 강력한, 이른바, 아
피스의 비장의 무기.
지금과 같이 긴박한 상황이 아니 었더라면, 그런 걸 시 가지에서 쏴 갈겨 대
지 말란모진 핀잔이 내 입에서 튀어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저 런 흉흉한 걸 시 가지 에서 쏘아 대 시 다니 ! 누가 다치 기 라도 하면 어 쩌 려
고 이러시는 겁니까!,,
지근거리 에 서 폭탄이 터 지 기 라도 한 것처 럼, 양손으로 귀 를 틀어 막고 있
는 수녀님 이 울먹한 어조로 아피 스를 다그쳤고.
"아! 시끄러워! 그럼! 동료가 갇혀 있다는데! 나보고 그냥 손 놓고 구경만
하고 있으라고!?"
상당히 거친 어조로 반문한 아피스였으나, 그녀 또한표정에 울먹임이 스
며 있긴 매한가지 였다.
건물 하나를통째로 집어삼킨 이 검은 기둥이 ■던전,의 일종이라는 건 의심
할 여지가 없어 보였다.
던전.
대기 중에 공기처럼 산재해 있던 마나가원인 불명의 이유로특정 지형에
과도하게 응집되 어 탄생하는 이공간의 총칭.
이 세상에 현존하는 모든이능의 근간이나 다름없는 마나가 그 주체인 만
큼.
던전의 형상과 그에 따른 특징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이 제도 내에서
도, 완벽히 정의해낸 전례가 전무할 정도로 다양하며 다채로웠다.
흉악한 마물들이 바퀴벌레처럼 득실거리기만하는 던전은 그나마 양반인
편이었다.
용암이 파도처 럼 굽이칠 수 있고, 중력이 뒤틀릴 수도 있으며, 시공간이 어
긋나거나, 독이나 저주 같은 것들이 끊임없이 뿜어져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공간.
온갖 사악한 것들을 꾹꾹 눌러 담아 놓은 뚜껑 없는 병 .
그것이 던전을 보고 느낀 인상이 었다.
개중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탑.
출구가 없는 미궁.
시체들이 조종하는 함선.
같은, 특수한 형태의 던전들도 있다고 하던데.
그러한 특이 던전 중, 수백 년 주기로 나타나, 세상의 근간을 뒤흔들 정도
의 위험을 떨치는 던전을.
인류는 '마왕,이라고 일컬으며 경외시하고 있다.
"어떻게든 이 안으로 들어갈수만 있다면!,,
아피스가 별안간 방안을 제시했고, 나도 말없이 고개를 숙여, 그 의견에
동조했다.
한 번 출현한 던전을 소멸시키는 방법은, 던전 내에 자리하고 있는 던전의
핵을 깨부수는 것 말곤 달리 없으니까.
이 는, 우리 파티 가 산전수전을 겪 어 가며,몸소 증명 한 부동불변의 법 칙.
핵을 잃어버린 던전은그핵이 복구될 때까지 잠복기에 들어가게 되고, 그
주기는 던전의 크기나 위험도에 따라 결정되는데.
짧은 것은 일주일, 긴 것은 수백 년 정도의 잠복기를 가진다.
인류가 여태껏 그 존재를 영위해올 수 있었던 것도, 수백 년 주기로 마왕이
나타날 때마다, 성녀의 가호를 부여받은 용사가, 마왕의 핵을 깨부숴왔었기
에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허 나, 그것도 어 디까지 나 던전 내 에 들어갈 수 있을 때의 이 야기.
한 번 들어왔을 때, 나가는 게 고단해지는 던전은 여태껏 여럿 봐왔으나.
이렇게까지 외부의 침입을완강히 거부하는형태의 던전은, 현 인류중, 가
장 많은 종류의 던전을 봐 왔다고 자부할 수 있는 우리들도 처음 보는 것이 었
다.
때문에.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지금의 이 암담한 국면을 앞에 둔 아피스
가 초조해 지는 것도 별수 없는 일이 었다.
우리가 이렇게 던전 바깥에서 우물쭈물하고 있는 동안, 던전 안의 용사
님이 어떤 위험을 직면하고 있을 진 아무도 모를 일일 테니까.
하지만, 어째서일까.
상황의 심각성이 선연해질수록, 내 마음은오히려 점점이 차분해지고 있
었다.
아피스가 검은 기둥을 향해 쉴 새 없이 화살을 내리꽂고 있던 동안.
내 가 아피 스의 그 부단한 노력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던 이유 또한 다
름이 아니었다.
나라면 어떻게 할수 있을 것만 같다.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는 출처를 알 수 없는 근자감이 , 내 상념 깊숙한
곳에서 파도처럼 굽이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터벅터벅.
"어?"
"사제님?,,
검은 기둥을 향해 말없이 걸음을 옮기는 내 행동이 적잖이 수괴해 보였는
지.
수녀님과 아피스. 두 사람의 시선이 갑작스레 내 쪽으로 수렴됐다.
그리고 그러한 시선들은, 내가 눈앞의 검은 벽에 손을 갖다 댄 그 직후, 순
식간에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야一!!!,,
"사제님一!!,,
또르륵.
넓은 호수에 작은 돌멩이를 하나 던져넣었을 때처럼.
내 가 손을 갖다 댄 부위를 중심으로, 검은 벽 전체에 옅은 파문이 일렁였다
•
그러자, 내 오른팔군데군데에 자리하고 있던, 성녀님이 내게 새긴 정체불
명의 문양들이 찬연한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그 순간 난, 내 가 느꼈던 모호한 직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역시나, 동조하고 있다.
내 몸에 아련히 깃들어 있는 이 새하얀 기운은, 눈앞의 검은 벽이 가진 힘
의 원형과 동조하고 있었다.
힘의 파형이나 갈래는 별개의 것일지 모르나, 이것들이 같은 뿌리에서 자
라난 무언가라는 것. 그것 하나만큼은 단언할 수 있었다.
이유는 잘 설명하질 못하겠다.
이 모든 건, 그냥 왠지 그럴 것만 같다는, 스스로 퇴 고해봐도 구멍투성 이 인
직 감에 무작정 몸을 내 맡긴 결과물이 었으니까.
본능도 아니고, 직감도 아닌.
영 혼에 서 우러 나온 육감이 란 표현 이 그나마 가장 잘 들어 맞지 않을까.
그런 시 답잖은 생 각을 하고 있을 무렵 이 었다.
내 손이 그 어둠 속으로 켜켜이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 건.
"야! 너! 뭐 하는 거야! 지금!,,
"사, 사제님!,,
어둠 저 너머에서 누군가가 내 손을 거칠게 끌어당기고 있는 듯한 감각.
바닥이 보이지 않는 심해 속으로, 심신이 서서히 가라앉아가고 있는 듯한
무력감이 나를 집어삼키려 했다.
크윽!,,
아피스가 다급히 내 팔을 붙들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일말의 저항의사도내보이지 않고 있던 내 몸은, 이미 눈앞의 검은 기둥에
절반 이상 먹혀 버린 지 오래였으니까.
"야! 너 미쳤어!? 거기에 대체 뭐가 있을 줄 알고 혼자 기어들어 가는 건데!
"네…•.저도지금막후회하고 있어요… •."
"아니, 그보다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들어간 거야! 내 화살을 몇십 발이나
꽂아 넣어도 미동조차 하지 않던 벽인데 ••• 彆!"
"밀어서 안되면 당겨보란, 옛 선조들의 지혜를빌려봤죠彆 •••."
”미친놈아! 지금 장난할 기분 아니니까! 아가리 여물고 지금 당장 거기서
나오기나해!"
실없는 농담을 건네며, 맥없이 벽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던 내 경박한 태
도가 어 지 간히 도 못마땅했는지.
돌연 아피스가 언성을 높였고.
"아, 안돼! 안돼요! 사제님!,,
뒤늦게 합류한 수녀님 또한 나를 끄집 어내는 작업에 힘을 보태보려는 듯
보했으나.
아피스의 힘으로도 해내지 못한 일을 수녀님 한 사람이 조력한다 한들,
결과가 달라질 린 만무했다.
줄다리기를하는 코끼리 위에 개미를하나 얹어놔봤자, 딱히 달라지는건
없는것처럼.
'■거기가 어딘 줄 알고 너 혼자 기어들어 가! 약해빠진 주제에 ! 당장 안 나
와!? 빅팀이랑 다우나의 꼴이 어땠는지 너도 봤을 거 아니야! 평범한 던전에
서도골골거리기 바빴던 네가도대체 뭘 할수 있겠어! 오늘치의 기적도 이미
다써버렸으면서!"
"사, 사제 님! 레 이 지 스 사제 님 그, 그래 ! 지금 사람을 불러 올 테 니 까! 조금
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아피스가 내게 쏘아붙인 힐난들은 구구절절 전부 다 옳은 말이 었다.
만일, 지금 용사님이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나와 용사님 의 역 량 차이 는, 코끼 리와 개 미 를 뛰 어 넘 어 , 공룡과 물벼 룩의
간극에 준한다고 봐도 무방했으니 까.
오늘치의 기적도 이미 다 써버린 내가, 그녀를 도우러 간다고 한들, 오히려
방해만 될 수도 있다는 부박한 현실쯤은 당연히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피스."
어쩌겠는가.몸이 움직여버린걸.
그리고, 또 혹시 모르지 않는가.
물벼룩도 물벼룩 나름대로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내기는 제가 졌네요. 이 근방에 우체국은 없으니까. 편지는 제가용사님
에게 직접 전해드릴게요."
"너…•!"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억지로 늘어뜨린 내 어색한 미소가, 아피스의 금
빛 눈동자에 선히 비쳤다.
나도 명색 이 사내 대 장부로 태 어 난 몸이 었기 에 .
마지 막이 될 지 모르는 순간 정도는 폼을 잡고 싶었으나, 평소에 안 해
버릇하던 걸 억지로하려 하니, 몸이 삐그덕거리는 건 별수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내 눈동자를 한참 동안 마주 본 아피스가 내게서 무언가를 느낀 것인지.
굳세게 붙들고 있던 내 손을 천천히 놓아주었다.
"죽으면 죽여버린다••••."
"아, 아피스 님!? 어째서 손을!?"
그런 아피스의 거동에 소스라치게 놀란 듯한 수녀님에게 진정하란 말을
전하려 했으나.
어느덧 어둠은 내 입술까지 집 어삼킨 상태 였는지라, 그녀를 중재하는 건
단념할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내 의중을 헤아려준 아피스에게 눈으로만 감사 의사를 전하며, 머지않아
나는, 내 몸을 원하는 어둠 너머의 무언가에게 미련 없이 나를 내어주었다.
"사제님一!!!,,
물속에서 들려오는 듯한, 수녀님의 먹먹한 목소리가 희끔이 귀를 적셨다.
이럴줄알았으면,저 가슴을원 없이 만져나볼걸.
"푸하하."
생 에 마지 막이 될 지 모르는 순간조차, 그런 잡스러 운 생 각을 하고 마는 스
스로에게 자조 섞인 웃음을 건넨 직후였다.
세상이 암전됐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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