秦 59화〉먹통
커피에 던져 넣은 각설탕이 맥없이 녹아사그라들듯.
어둠 속으로 켜켜이 가라앉아가던 희끔한 의식에 나릿나릿 떠오른 기포
는, 한동안 잊고 있었던 언젠가를 회 상하게끔 했다.
그것은칙칙한잿빛색 기억이 아닌,화창한햇살색의 추억.
"용사 펀치!"
지금에 이르러선 그냥그러려니 하게 됐지만.
파티 창단 무렵엔, 무언가를 할 때마다, 용사라는 접두사를 억지로 갖다
붙이며, 그걸 큰 소리로 외쳐대는 파티 리더의 기행으로 인해, 꽤 골머리를 앓
곤했었다.
"이럴 수가! 제 기습을 회피해내다니! 조심하세요! 신부님! 이 마물! 예사
마물이 아닙니다!,,
"자매님. 그런 우렁찬고함을 동반한공격은 기습이라기보단, 예고 살인이
라고 지칭하는 것이 보다 마땅하지 않을까요?,,
우리 파티의 사전에 잠행이란 단어는존재치 않았다.
정의 라는 글귀 가 대 문짝만하게 적힌 책 표지 에 정 면 돌파라는 문구가 빼
곡히 적혀있을뿐.
아니, 사전 이 라는 고등 지 식 을 요구하는 개 념 이 존재 하는지 조차도 의 심
스러울 지경이 었다.
원체 성정이 을곧았던 데다, 전투와하등 상관없는 일거수일투족마저도
요란스럽기 그지없던 사람을 리더로 뒀던지라.
기습이 나 교란과 같은 은밀성을 요구하는, 이른바 비 겁함을 수반한 의 뢰
는, 아무리 보수가 좋아도 우리 파티 에 겐 그림의 떡 이 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어느 날문득호기심이 들어 그녀에게 물어봤었다.
용사. 그 빛바랜 직함에. 그 케케묵은 올바름에.
어째서 그렇게까지 연연하는 것이냐고.
그 물음에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하늘 아래 부끄럼 한 점 없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여느 때와 사뭇 남달랐던 그 고요한 목소리를.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그 아련한 눈빛을.
어째서 지금 이 순간까지 잊어버리고 있었던 걸까.
"진정한 저는 너무나도 보잘것없고, 밝은 양지 아래를 태연히 걷고 있어도
될 만큼 떳떳한인물이 아니니까요.그러니,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 되뇌는
겁니다.,,
간곡한 소망을 품 안에 끌어 안고.
통절한 염원을 이 주먹에 내리 담아.
하늘 너머까지도 닿을 기세로 절절히 외치는 겁니다.
저는 용사라고요.
”어때요! 신부님도 마음 내키시면 한 번 해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신부님
에게만은 특별히! 저의 용사 펀치의 모든 것을 전수해드릴 수 있습니다만!"
사양할게요.
라고, 답했던 것 같다.
당시 에는 이 제 막 사춘기 에 접 어들기 시 작한 그녀 가 감수성 들어찬 발언
을 했을 뿐이 리 라고, 별 대수롭지 않게 여 겼었으니까.
하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적어도 그때, 주먹을 어떻게 휘두르는지 정도는 배워둘
걸.
그런 농몽한 후회 가 뇌 리를 스쳤다.
碢碢碢
"한낱피조물주제에 감히••••!"
주먹이 아리다.
통증의 정도로유추해보건대, 아무리 못해도뼈에 금정도는 간게 아닐까
•
손등으로부턴 살아있는 생물에 닿았다는 감각은 일절 느껴지지 않았고.
마치 얇은 거울을 깨부수기라도 한 듯한, 묵직한 뻑적지근함만이 아련히
맴돌고 있었다.
정체 모를 파편들이 듬성듬성 박혀, 피 가 뚝뚝 떨 어지는 주먹 쪽엔 구태 여
시선을 두지 않기로 했다.
원래 이런 건 상처 난부위를보고 있으면 더 아파지는 법이니까.
”하계인 주제에 어떻게 내 실체에 닿을 수가 있었던 거죠!? 아니 그보다,
어떻게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건가요!? 그 정도 가호를 부과받으면, 지금
당장 폐인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내 초라한 주먹에도 저 멀리 나가떨 어진 무언가가 별안간 고함을 내질렀
다.
처음엔 내 나약한 마음이 만들어낸 실체 없는 환상 정도라고 여겼고, 그렇
기 에 있는 힘껏 주먹을 내 지를 수 있는 거 였다만.
아니었구나. 누구세요.
라며, 인제 와서 발뺌하기엔 이미 늦은 것 같으니.
이왕이렇게 된 거,다소뻔뻔하게 나가보기로했다.
"당신이야말로누구신데.제 행세를하고 계신 거죠."
나도 한때 모험가 생 업 에 몸담은 사람.
저 런 수상쩍 은 존재 와 맞닥뜨렸을 땐, 얕보이 면 안 된 다는 기본 상식 정도
는 당연히 몸에 지니고 있었다.
하물며 이곳은 던전이지 않은가.
아주 잠깐 긴장을 늦추는 것만으로도 팔다리가 썰려 나가도 이상하지 않
은 흉흉한 장소.
그런 곳에서 섣불리 빈틈을 내보인다는 건 어불성설.
그래, 그럴 터인데.
"흐,흐윽! 시,신부님 • • • •.자, 잘못, 잘못했어요彆 ••••"
목전에 펼쳐진 충격적인 시각 정보는 내 머릿속에서 사고를 표백시켜버리
기에 충분했다.
꿈속의 아련한 신기루가 아니며, 기억 속의 흐릿한 비전 또한 아니 었다.
그녀가.
용사님이 울고 있었다.
간절히 나를 부르고 있으면서도, 그 황망한 시선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만
을 쫓고 있었기에.
그녀가 지금 정 신 이 온전치 못한 상태 라는 건 어렵 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
다.
여느 때와 같던 늠름함은 그 흔적조차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부박한 몰
골.
몸을 기댈 버팀목조차 찾지 못해, 그 자리에 홀연히 주저앉아울고만 있는
저 가여운 소녀를, 어느 누가 용사라고 알아볼 수 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땐, 피로에 찌든 내 두 다리는 이미 그녀를 향해
느릿히 전진하고 있었다.
'용사님.….
II
이윽고, 무심코 들어 올린 피비린내 스민 손이 그녀 쪽으로 서서히 뻗어나
갈 무렵이었다.
"내 그릇에 손대지 마一!!!,,
갑작스레 의식을 비집은 고성.
그 험상궃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내가 날려버린 신원불명의 누군가였다.
덥석.
우악스러운힘이 실린 손이 내 팔을 거세게 붙들었고.
던전에선 방심해선 안 된다고 한 게 바로 조금 전이지 않느냐는, 자기반성
이 움틀 새도 없이.
주삿바늘로 혈관에 직접 약을 꽂아 넣기라도 하듯, 그것의 팔에서부터 압
도적 인 존재 감을 가진 새 하얀 무언 가가 내 몸속으로 침 투해 왔다.
이 ■■■가친히 ! 천벌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누군가가 귓구멍에 면봉을 쑤셔 넣은 듯한 잡음이 한 차례 귓가를 스친 직
후였다.
초월적인 존재가 내 영혼을 위에서부터 짓누르고 있는 듯한 위압감이
숨통을 틀어 막으며 .
보이지 않은 손이 내 심장을 움켜쥔 채 몸의 혈류를 강제적으로 가속시키
고 있는 듯한 괴로운 감각.
그래, 참으로 낯익은 감각.
낯익다못해, 이젠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버린 진절머리 나는 감각.
"아무리 육체의 조각을 일부 흩뿌려 현현시킨 급조한육신이라 한들, 성스
러운 저의 면전에 그 불결한 주먹을 내리꽂고! 고생해서 손에 넣은 제 그
릇까지 더럽히려 하다니! 그러한불경을 저지르고도, 제 고결한손에 의해 명
을 다할 수 있는 걸 영광으로 여기도록 하세요! 한낱 피조물이여 ! 핫하! 하
• . . .. 어, 어라.... •?"
자고로 모험가라면, 수상쩍은 존재와 맞닥뜨렸을 때, 결코 얕보여선 아니
된다.
그것은, 내 가 아직 모험 가 병아리 였을 무렵, 어깨형님들이 내게 입 이 닳도
록 하던 말이었다.
하지만, 천성부터가 약자였던 나는 누군가를 위협하는 재능이 가히 파멸
적인 수준이었다.
잔뜩 미간을 찡그려봐도, 말투를 험상궂게 교정해봐도, 이따금 힘자랑을
해봐도, 그모든 것들이 어색하며 어설프기 이를 데 없었고.
열심히 연습해 만들어낸 위협용 얼굴도, 이따금 동료들 앞에 피로할 때마
다 웃음거리 가 되 기 일쑤였다.
주먹만 한 소형견이 사람만 한 대형견한테 깝죽거리고 있는 꼴을 보고 있
는 것 같다던, 아피스의 그 통렬한 일침을 듣게 된 날 이후론, 그마저도 때려
치웠다.
실제로 지금 이 순간도, 도대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어야좋을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어, 어째서 .... 彆! 왜 안 먹히는 것이죠!? 마, 말도 안 돼요! 평범한 인간이
었다면 영혼이 탈색되 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의 성력을 들이부었을 텐데 !
어째 彆 彆 •• 서 •• 彆 彆."
내가 내 팔을 움켜쥐고 있던 작자의 얼굴쪽으로 천천히 시선을 옮길 무렵
이었다.
그것이 돌연 말문을 멈췄고.
그 직후, 내 팔을 굳세게 붇들고 있는 그것의 손아귀로부터 힘이 사그라
들어가고 있다는 게 선연히 느껴졌다.
'■뭐, 뭐죠 뭐죠! 그 눈은! 저는! 다, 당신 같은 하계인과는 격을 달리하는
위대한존재라고요! 아무리 힘의 편린만현현시킨 상태라고 해도! 당신 같은
건! 이 소, 손가락! 손가락 하나만으로도••••!"
머리에 떠오르는 말을 일단 내지르고 보고 있는 듯한, 그 여유 없는 태도
는 지레 겁을 먹은 인간의 전형이었다.
부드러운본인의 얼굴 위에 다른 이의 딱딱한 얼굴조각을 덕지덕지 붙여
놓은 듯한 행색은, 갈라진 마스크 팩을 하고 있는 사람을 보고 있는 것만 같
아 무심코 웃음이 새 어 나올 지 경 이 었다.
씨익.
오른쪽 입꼬리가 부자연스러운 호선을 그리며 조용히 볼에 걸쳐졌고.
그것이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떠듬떠듬 뒷걸음질 치기 시작한 건, 그
직후의 일이었다.
"히, 힛!"
하지 만 그 모양 빠지는 도주는 실패로 끝맺음 되 고 말았다.
그것이 굳세게 움켜쥐고 있던 내 팔을 놓아버리자, 이번엔 내 쪽에서 그것
의 팔을 거칠게 붙들어 맸으니까.
'■마, 만일 이 육신에 그 더러운 손을 조금이라도 갖다 댔다간! 당신의 그
죄 많은 영혼을 한 치의 빛도 닿지 않는 무저갱의 어둠 속에 미래영겁 유폐해
놓겠어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지금 당장 그 불결한 손을 놓는다면
남은수명 10년 차감이라는 너그러운처사로彆 彆 ••."
"당신이 울린 건가요?,,
'네, 네? 뭐, 뭐라구요?,,
"당신이 울렸나고요."
뿌득뿌득.
나도 모르게 힘 이 들어간 관절 부위 에서 살벌한 파형의 울림 이 의도치
않게 새어 나왔고.
그로부터 머지않아, 그것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사람의 얼굴 조각 같은 것
들이 뭉쳐놓은 모래가 바스러지듯 바닥에 후두두 떨어져 내렸다.
그 가면 너머에 자리하고 있던 건 객관적으로 봐도 상당히 미려한 축에
속하는여인의 인영.
그 얼굴이 짙은 두려움에 점철되어 있다는 건 일목요연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