秦 60화〉용서
자신의 죄를 사면받길 바라는 이가 가장 많이 입에 올리는 말은과연 무엇
일까.
그건 아마 용서해달라는 말이 아닐까.
특정 누군가를 향한죄책감을 덜어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당사자의
자비심 에 직접 호소하는 것 말곤 달리 없을 테니 말이 다.
더군다나 이 세상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이 실린 책이
불티나게 팔릴 만큼.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행위를 일종의 미덕으로 여기고 신성시한다는, 나
로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기이한 문화가 성행하고 있기까지 하니.
지금에 이르러선, 용서해 달라는 말이 지닌 무게는 시답잖은 아침 인사에
도 미치지 못할 만큼 가벼워 졌다는 것이.
내가 이 자애로 가득 찬세상을 수십 년 가까이 친히 답사해본뒤 내린
결론이었다.
"흑, 자, 잘못, 잘못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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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 눈앞의 그녀는 용서를 쉬이 입에 올리지 않았다.
자신에겐 그럴 자격조차 없다는 듯이. 가당키나 하냐는 듯이.
용서도 구원도 바라지 않으며, 자신의 잘못이 그저 책망받기만을 바라고
있는 듯한 그 모습은, 죽을죄를 지은 죄 인보다도 구저분해 보일 지경이 었다.
I
용사님 • • ••.
II
무릎을 꿇어, 일단 그녀와 시선을 맞춰 보려 해봤으나.
빛을 잃어 흐리 멍덩해진 그녀의 눈망울은 바로 코앞에 앉아 있는 나를 인
식하는 것조차도 버거워 보였다.
"용사님…•.저예요…•."
"자, 잘못, 윽! 잘못했어요 ••••• 잘못했어요 •••••"
술렁이는 마음을 다잡으며 어렵사리 엮어낸 말도 그녀의 의식에 다다르
진 못한듯 보였다.
그 직후였다.
내가용사님의 몸에 일어난이변을눈치채게 된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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彆 彆 •• I! 11
잘 익은 보리 이삭을 연상케 했던 그녀의 아름다운 금발이, 출처를 알 수
없는 불길한 백색으로 서서히 물들어 가고 있었다.
색이 덧씌워진다기보단,그녀에게 입혀져 있던 색이,옷에 물이 빠지듯 탈
색되 어 가고 있다고 표현하는 게 보다 정확해 보였다.
그리고, 그러한 이상 현상에서 느껴지는 힘의 근원은 성직의 길에 몸담은
이라면 몰라볼 리 없는 참으로 낯익은 개념.
신이 인류에게 저 힘의 일부를하사했다고 전해지는쪼개진 기적.
신성력이었다.
"이, 이보세요!"
바로 그 순간, 의식 바깥으로 잠시 제쳐두고 있었던 존재 가 느닷없이 나를
호명했고.
약간의 짜증이 스민 떠듬떠듬한 거동으로 내가뒤를 돌아보자.
입고 있던 기다란 치마로 상반신을 동여매진 채, 육지에 올라온 생선처럼
쉴 새 없이 펄떡 이고 있는 새하얀 멍석이 별안간 내게 호통을 내지르고 있었
다.
'■아직 거기 있죠!? 거기서 제 말 듣고 있는 거죠 하계인 지금 당신이
얼마나 천벌 받을 짓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고나 있는 건가요!? 모르시겠죠!
당연히 모르시겠죠! 제가 누구인지 안다면 감히 이런 불경한 행동을 저지를
생각은하지 못했을 테죠! 이, 이번만! 그래, 이번 한번만특별히 그무지함을
자비롭게 용서해드릴 테니! 지금 당장! 제게 가해진 이 상스러운 구속을
풀도록 하세요!"
꽁꽁 싸매진 상반신으로부터 속옷 한 장 걸친 하반신만 쑥 삐져나와 있는,
그러 한 추레 한 몰골을 한 사람의 말이 라곤 도무지 믿 기 지 않을 만큼 오만방
자한 태도였다.
처음엔 내가 해놓고서도 좀 심했다는 생각이 아주 조금 움트긴 했었으나.
저 말본새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괜한 걱정을 한모양이었다.
저 구속이 도리 에 어긋난 조치 라는 생 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수상쩍은 말을 하는 수상쩍 은 인물이 수상쩍 은 짓을 하지 못하게 사지를
구속해두는 건, 마땅히 해야만하는 일일 테니까.
사적인 감정은 일절 없었다.
"용사님. 저에요. 레이지스 로우빌. 절 못 알아보시겠어요?"
■■이, 이봐요! 듣고 있는 거 다 알고 있으니! 무시하지 말고 제 말에 대답
하도록 하세요! 하계인!"
미취학 아동이 부모에게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르는 듯한, 그 특유의 듣기
싫은 목소리 가 연신 내 뒤통수를 찔러대고 있었지 만.
지금의 난 구비해온 손수건으로 용사님의 눈물을 닦아내는 것에 여념 없
어, 저런 쓰잘머리 없는 요소에 신경을 할애할 심적 여유가 남아있지 않았다.
"하! 만일, 제 그릇에 수작을 부릴 생각이시라면 단념하시는 게 좋을걸요?
지금 그녀는 제 성스러운 힘을 한창 부과받고 있는 중이 기에! 누군가의 목
소리를 귀담아들을 수 있을 만한 상태가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허튼짓 그만
하고! 지금 당장 이 구속을 풀고 제게 고개를 조아리도록一."
콰직.
"어,어어.. ..?"
살벌한파형의 울림이 한차례 메아리친 직후,귀에 심히 거슬리는소음은
그제 서 야 잦아들었다.
목을 움직 이지 않고, 슬쩍 시선만 그쪽으로 흘기니.
내 목에 걸쳐져 있던 칼날형 로자리오가그녀의 바로 도처에 표창처럼 내
리꽂혀져 있었다.
옷깃을 찢으며 날아간 칼날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준 덕분에 그 수상
쩍은 인물은 다시금 세상 밖을 구경할 수 있게 됐지만.
찢어진 옷 구멍 너머로 나와눈이 마주친 이후, 늑대 앞의 토끼처럼 갑작스
레 몸을 떨기 시작한그녀로부턴, 더 이상 헛소리를늘어놓을 용의는 느껴지
지 않았다.
"후우.…."
그녀에게 잠깐이라도 좋으니, 제발 얌전히 좀 있으라고, 따끔히 주의를 주
고 싶었으나.
경솔히 입을 놀릴 순 없었다.
용사님이 보는 앞에서 험한 말을 내지를 순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검지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입가에 가져다 대며, 도서관의 사서가 거동이
요란한 인물에게 주의를주듯, 넌지시 내 의중을그녀에게 전했다.
입 다물라고.
"히, 힛!"
그 지레 겁먹은 거동으로부터 내 의도가그녀에게 확실하게 전달됐음을
확인한 내 가, 다시금 용사님 이 자리한 방향을 향해 시선을 옮겨 갈 무렵 이 었
다.
덥석.
"요, 용사님•…?"
"나,나때문… •.흑! 나,나떄문에… •."
정체가불분명한파편들이 듬성듬성 내리박혀 피범벅이 된 내 오른손을,
바들거 리는 손짓으로 조심스레 품에 안은 용사님 이 구슬프게 목을 울렸고.
머지 않아, 용사님의 주위를 뜨거운 물 위 의 수증기처 럼 어른거리 고 있던
희끄무레한 무언가들이 분명한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것은 잿빛색으로 점등하는 과거의 필름.
감추고픈 언젠가를 사람의 면전에 강제로 들이미는 퀴퀴한 그을음.
불과 조금 전, 이것과 유사한 체험을 겪어본 바 있던 나였기에.
이것이 용사님이 보고 있던 풍경.
이른바,그녀에게 있어 외면하고픈 과거란사실은, 그리 어렵지 않게 짐작
할수있었다.
이러한현상이, 이 던전만이 지닌 고유한특성인 건지, 아니면, 저 말더럽게
많은 멍석의 술수에 의한 것인지는, 지금으로선 알 방도가 없었지만.
용사님 이 어떤 과거를 마주하고, 후회하며 . 괴로워 하고 있는지 정도는 눈
에 선했다.
손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남자.
그 맞은 편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어린 소녀.
기억 속의 언젠가를 강제로 떠올리게끔 하는, 지금의 이 낯익은 국면은,
과거의 주연 배우를 그대로 대동한 재현극의 일종이라고 봐도 무방할 테니
까.
"용사님• • • •.이 상처는용사님 때문이 아니에요彆 •••."
"아, 아냐.... 彆! 나 때문! 나 때문에 彆 •••! 흐긋!,,
처 음으로 대 화가 성 사되 긴 했으나.
그녀가 보고 있는 건, 어디까지나 과거의 나지. 지금의 내가 아니었다.
용사님이 칼을 휘두른 자리에서 멀뚱멀뚱 선 채로, 죄스러운 상념을 짓씹
기 바빴던 아둔하기 그지 없던 사내.
그녀가 이 렇게까지 괴로워 할 이유가 하등 불필요한, 참으로 별 볼일 인물
이었다.
"역시 전부 알고계셨던 거군요••••."
"흐윽! 으긋! 윽!"
터져 나오려는 곡읍을 안간힘을 다해 참아내려 하고 있는 듯한 그녀였으
나, 그 부단한 노력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야 말았다.
또르르 흘러내린 눈물 한 방울을 기 점 삼아, 그녀는 내 품에 몸을 날렸고.
목덜미를 적시는 습기 찬 숨결로부턴, 언어 따위론 도저히 형용할 수 없는
그녀의 녹록한상념들이 내게 켜켜이 스며들어왔다.
"으급 윽, 자, 잘못, 잘못했, 윽!"
이젠 말을 매듭짓는 것조차도 힘에 부치는지.
연달아 새 어 나오는 울컥한 상념들을 주체 못하고 있는 듯한 그녀의 거동
은, 부모가 사라지는 악몽을 꾼 어린아이를 보고 있는 듯했다.
"아니에요. 彆 ••.제가. 彆 彆 •.제가잘못했어요.... •."
"아, 아니 야! 내 내 가! 내 가 나빠! 미, 미 안! 윽! 아, 아저씨 ! 자, 잘못! 윽! 잘
못했! 으긋!"
내 품에 파고들 기세로 끌어안은 그녀를 마주안아도 보고, 등을 토닥여도
보고, 머리를 쓰다듬어도 보았으나.
용사님 의 눈물은 그칠 기 미 조차도 보이 지 않았다.
이를테면, 수년간 누르고 눌러만 왔던 격한 울분이, 구멍 난 댐의 물처럼
걷잡을 수 없는 기세로 새어 나오고 있는 듯했다.
그 직후였다.
금색 머릿결을 침범한불길한백색이 그기세에 힘입어, 용사님의 전신을
뒤 덮어버릴 기세로 태동하고 있음을 목도한 건.
썩 어도 준치라고 했던가.
한낱 반푼이긴 하나, 신성력을 다룰 수 있는 한 사람의 사제로서, 본능적
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침범은 그녀의 감정에 지대한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리라고. 그녀의 인
격에 지대한 악영향이 끼칠 것이리라고.
"요,용사님. 잠시 제 이야기를들어보시겠어요?"
"흐윽! 으읏!,,
생각해야만했다.
그녀의 이 격한 한탄을, 휘몰아치는 감정을.
아주 잠깐이 라도 좋으니 중재할 방도를 찾아내 야만 했다.
"요, 용사님 彆 •••! 용사님! 잠깐만 진정해주세요! 아비 • • - 아비가일!,,
"흐윽! 으으읏! 잘못, 잘못했어요彆 •••."
하지만, 결코 영민하다고 할 수 없는 내 머리가 그 찰나라고 부르기에도
부족한 촉박한 시 간 안에 대 단한 대 안을 생 각해낼 수 있을 리 만무했고.
머지않아,그불길한침식이 용사님의 영혼.그뿌리에까지 다다르려 한다
는 걸 내 가 뒤늦게 직감할 무렵이 었다.
■.크윽!..
그녀가 심적 충격을 받아, 한순간, 사고가 정지할 만한 정보라도, 어떻게
든 입 밖으로 게워 내야만 한다고.
혼란에 빠진 내 두뇌 가 성급한 결론을 매듭지은 직후.
"용사님. 저 실은 여자를 엄청나게 밝혀요."
"흐에?,,
뇌를 거치지 않고, 튀어나온 나의 실없는고백에 그녀가돌연 허망한숨소
리를 허공에 흩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