秦 66화〉묘수
그날 제도는 유달리도 떠들썩했다.
이 른 아침 부터 분주히 거리를 오고 가는 행 인들이 , 휘 황찬란한 꽃과 조명
을 마을 곳곳에 장식하고 있는 가운데.
아이들은 그런 부모의 잔손불림을 거들 의향이 요만큼도 없다는 듯, 삼삼
오오 둘러 모여 영웅 놀이를 유락하기 바빠 보였지만.
그러한 아이들의 철없는 모습을 아니꼽게 바라보는 시선은, 인파로 북적
이는 마을 대로변을 이 잡듯 뒤져봐도, 한 손가락에 꼽을 만큼 현저했다.
아니, 오히려 흐뭇한웃음을 머금고 있는 행인들의 표정에선, 여느 때와 사
뭇 다른 진득한 여유가 느껴 지 기 까지 했다.
고대하고 고대하던 경사를 바로 목전 앞에 뒀다는 벅찬 기대감이, 삭막했
던 거리에 생생한활기를 불어넣고 있었기에.
이 제도에서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마음이 들뜨지 아니할 수 없는, 참으로
감축스러운 경사.
가호수여식의 날.
성녀가 용사에게 가호를 수여한다는 숭앙스러운 날이 바로 내일까지 다
가온 터라.
전설 속 영웅의 영광스러운 비상을 지근거리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 관중
이, 단전에서 솟아오르는 벅찬 감격을 주체하질 못하게 되는 건 별수 없는 일
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의 예외 가 있듯, 그러한 경사를 앞둔, 모두가, 만인이 행복한 것만
은아니었다.
대표적으로 이 남자가 그러했다.
마을 풍경이 고스란히 내려다 보이는 높디높은 종탑.
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한 건축물의 난간에 홀연히 몸을 기대고 있
는 초췌한 인상의 중년.
그의 이름은 로버트.
이 근방에서 나름 유명한 여행객용 숙소를 운영하고 있던 여관주인임과
동시에.한때,한가정의 가장이었던 인물.
그래, 그랬었던 인물.
바로 몇 주 전, 일말의 예고조차 없이 일어난 던전 재해가, 자신의 여관을
핀포인트로 저격해버렸다는 얼토당토않은 사건으로 인해 .
전 직장의 퇴직금을 모두 쏟아부어 마련한 여관이 흔적조차 남김없이 증
발해 버린,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불행한건지도모를사내.
더군다나, 그러한그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 익명의 누군가로부터 받게
된 피해 보상금은, 그의 안사람이 쥐고서 달아나버렸기 때문에.
지금 그에게 남아 있는 재산은, 수척해질 대로 수척해진 그의 비루한육신
하나뿐이 라고 봐도 무방했다.
■■잘 있어라. .••.이 더러운세상아 彆 彆 ••."
그리고, 지금 그는, 그 하나뿐인 재 산마저도 맥 없이 놓아버리 려 하고 있었
다.
성녀의 알현실이 안치된 이 제도의 수도는, 불경의 근원이라고 불리는 던
전 재해가, 수천 년에 달하는 기간동안 단 한차례도 발생하지 않은, 이른바
성역 중에서도 성역.
그러한 성역의 도처에 던전 재해가 발생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불미
스러운일일진대.
그 재해가 인근의 다른 건축물은 죄다놔두고서, 자기 여관만 콕 집어 홀
라당 전소시켜버린 것이었으니.
로버트가 체 감한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조차 없었다.
던전 재해 때문에 땅값이 떨어졌다고 노발대발하던 동료 상인들의 투정
이, 참으로 가당찮아 보일 정도로 말이다.
몇 주 전, 난데없이 자신 앞에 나타난 어느 이름 모를 갑부가, 로버트가 시
세의 서너 배나 달하는 값으로 올려 쳐 부른 금액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의 여관을 수일간 전세 냈을 때만 하더라도.
그는 자신에게 이러한 끔찍한 불행이 닥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다음 생에는 거지발싸개 같은 던전이 존재하지 않는 평화로운 세상에서
태어나기를….."
그 애 달픈 비원을 마지막 유언으로 삼은 그가, 종탑의 난간을 이전보다 거
세게 붙들 무렵이 었다.
"우와악!"
....
.......
저 자신 이 붙든 난간 그 바로 아래.
새의 둥지를 올려놓기도 위태로워 보이는 지대에, 가고일 상처럼 우두커
니 주저앉아 있는 정체불명의 인영에 놀란로버트가, 새 된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 당신 뭐야! 여기서 왜 그러고 있어! 죽으려고환장했어!?"
조금 전까지 죽으려고 마음먹었던 사람이 저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는
둘째치더라도.
그의 논지 자체는 지당했다.
종탑 난간 안쪽도 아닌, 그 바깥쪽에 매달리듯 앉아있는단 건, 겁이 없는
걸 넘어, 일종의 자살행위라고봐도무방할 테니까.
"뭐,뭐야! 다, 당신 사제야?,,
놀란 가슴을 어느 정도 진정시킨 로버트가 그의 행색을 천천히 살폈다.
다부진 키. 뼈대 굵은몸.
젊은 시 절의 자신과 좋은 승부가 되 지 않을까 싶은 샤프한 외 형.
나이대는 20대 중후반 정도로 보였지만, 죽을 날이 가까워진 노인네처럼
새하얗게 새어있는 머리색 탓에, 그의 온전한 나이대를 추정하는 건 난항으
로 사료됐다.
하지만.
그가 걸치고 있는 수단에 수 놓인 화려한 자수,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값비
싼 보석들, 그러한 요소들로 미루어 볼 때.
그가 어느 정도 높은 지위를 갖춘, 이른바, 고위 사제라는 것 정도는 어림
잡아 짐작할 수 있었다.
"저기, 아저씨 彆 •••.한가하시면 제 이야기 좀들어주실래요彆 •••?"
..뭐?..
이제 막죽으려고 마음먹은 사람한테, 뭔 개소리야.
평소의 로버트였다면, 이렇게 답했을 터였다.
허나, 이곳이 아닌,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사내의 그 희끄무
레한 눈동자가 너무나도 애처로워 보였던 탓이었을까.
로버트는 사내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고 싶어졌다.
요근래 아침마다 거울 앞에서 보던 저 자신의 병자 같던 얼굴이, 생기가 만
연한 얼굴이라고 여겨질 만큼.
무슨 죽기 직전의 시체를 보고 있는 것만 같은 사내의 그 추레한 몰골이,
로버트의 측은지심을 자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 들어주시는 거군요. 그렇군요. 역시 저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은 이 광
활한 하늘 아래 아무도 없는 거로군요. 감사합니 다. 덕분에 결심이 섰습니다.
마지 막으로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도 마음껏 봤으니, 이젠 아무런 미련
없이…•."
■■아! 들어줄게 ! 들어주면 될 거 아니야! 젊은 사람이 벌써 그런 나쁜 생각
만하고살면 못써! 이 양반아!"
죽기 위해 힘들게 기어 올라온 장소에서, 사람을 살리려 하고 있는 저 자신
의 꼴이 퍽 우습다고 느끼긴 했으나.
저승길의 무용담 하나 정도 챙겨갈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로버트는 사내
의 상담에 응하기로 마음먹게 됐다.
碢碢碢
사내는 자신의 이름을 레이지스 로우빌이라고 밝혔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안그래도 집요했던 직장 상사의 성희롱이, 최근
들어, 도저히 묵인할수 없는 수준까지 치닫고 있는 게 고민인 듯싶었다.
'■제가그러기 싫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제 이야기는 전혀 들어주질
않고매번자기 마음대로彆••• 막강제로彆•••.어제는급기야,같이 잠을안
자준다고, 막 숨을 참아 대는데 • • …."
"어휴 彆 • • •.그거참천벌 받을년일세 ••••."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실연당한소녀처럼 울먹이고 있는 그의 등을, 로
버트는 천천히 토닥여주었다.
이렇게까지 질겁하는 반응을 보인다는 건, 그 직장 상사라는 작자가 어지
간히도 추녀라는 걸 테지.
그가 처한 상황을 지레짐작한로버트가,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눅눅한 한
숨을 내쉬었다.
'■그럴 땐! 그냥관둬 버려! 뭐가 아쉬워서 거기서 그러고 있어! 그럴 땐 남
자답게 사직서를 그 거지 같은 상사 면상에 때려 박아주는 거라고!,,
'■저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야굴뚝 같은데. 피치 못 할 사정이 생겨서 당분
간은 관둘 수가 없게 됐거든요• • • • . 근데 그걸 명분 삼아서, 이번엔 제 직속
상사가, 제가 관두지 못하게끔하려는 건지, 제 기억에도 없는 실적들을 제게
퍼 주면서, 저를 막 승진시키려고 하는데 ••••."
"하이고, 맙소사.... •. 미친년들일세 •• 彆 •.
II
교황청이 부패해 있다는 건, 로벨 사제라는 인물의 중혼 기사를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던 바였으나.
그실체를온전히 목견하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로버트는 한동안 입을 다물지도 못할 만큼이나, 경악감을 금치 못했다.
"아니, 사태 가 그 지 경이 될 때까지 주위 에 다른 사람들은 다들 손 놓고 구
경만 하고 있었던 거야? 말려주겠다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 !?,,
"아니,그게. 전 직장 동료 중에서 한 사람 있기 야 있는데,뭐라고 해 야될 까
• • • •.그쪽은 너무적극적으로 말리려고들어서 고민이어서요 彆 彆 ••."
.뭐?..
'■예전에 제가 잠시 돌봐준 적 있는 조카뻘 되는 아이랑 잠시 일을 같이
한적이 있었는데요.제 사정을 알고 난 이후부턴, 자기가할아버지 될 때까지
부양해 줄 테니. 지금 직장은 시원하게 때려치우라고 틈만나면 득달해대는
통에 • … .
fI
"허! 기특한조카구먼그래! 왜? 그냥 같이 살지 그래?"
"제가 예전에 그 아이한테 크게 잘못한 일이 있어서요. 사실, 어느 정도 앙
금을 푼 지금도 얼굴 보기가 조금 많이 불편해요 彆 •••. 더군다나, 이 나이 먹
고제 조카뻘되는아이한테 얹혀사는것도세간적으로좀.... •."
"아, 하긴 그렇겠구먼!,,
일복은 없는 친구여도, 인복은 어느 정도 있어 보이 네.
마누라가 집을 나가기 한참 전에 출가한 아들내미 가, 그 기특한 조카의 반
의 반만이 라도 닮았으면 얼 마나 좋았을까.
로버트가 그런 회 색빛 회한을 짓씹고 있을 무렵 이 었다.
번쩍.
그의 머릿속에 희 끔한 전류 하나가 낙뢰 처 럼 명 멸했다.
"아! 그럼 이건 어떤가! 사제 총각!,,
"예? 뭔데요?"
"결혼할사람이 생겼다고 말해보는 건!,,
”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