秦 72화 잦 판도라의 상자
순간적인 판단이라기보단, 직선적인 충동이란 표현이 보다 마땅했다.
용사님의 이러한 감정의 요동이 나와 스킨십을 하고픈 열망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면.
까짓거 그녀가 원하는 바를 그냥 이루어 주면 그만이라는 지극히 일
차원적인 사고방식에 몸이 감응해버린 결과물.
하고 많은부위 중에서 구태여 손등에 입을 맞춘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용사님의 요망을 이루어주고 싶다는 바람과 조카뻘 되는 소녀의 몸을 더
럽힐 수 없다는 양심통 사이의 합의점이 바로 그것이었기에.
손등의 키스 정도면 어느 정도 격식 있는 자리에선 인사 차원으로 통용되
기도하니까.
즉석에서 떠올려낸 것 치곤 꽤 괜찮은 대처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후우••••.
If
용사님의 손등에 포스트잇처럼 달라붙어 있던 내 입술을 살며시 떼어낸
뒤, 잠시 숨을 골랐다.
언제나 스킨십을 받는 입장인 몸이 었던지라, 내 쪽에서 스킨십을 행한다
는 건 상상 이상으로 고됐다.
더욱이 상대는 그 용사님이지 않은가.
절로 화끈거리는 얼굴.
파르르 떨리는 입가.
누가 작은 벌레를 옷 안에 한 마리 떨어뜨려 놓기라도 한 것처럼 쉼 없이
근질거리는 등허리에 이르기까지.
용사님의 폭주를 진정시켜야 한다는 대의명분이 없었더라면, 지금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조차도 고역이라고 여겼을 게 분명했다.
”이 정도쯤은 얼마든지 해드릴 수 있으니까. 두 번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마
세요.,,
충동적으로 저지른 만행을 계산적인 행동인 것처럼 포장하며, 단호한
어조로 그녀를 꾸중했다.
뒤 이어 용사님의 입가 쪽에 자리한 상흔을 조심스레 살폈다.
아랫입술을 우악스럽게 짓이겨놓은 검붉은 잇자국.
제지하는 게 아주 조금만늦었더라도 입술에 구멍이 뚫려도 이상하지 않
은 수준의 상처였다.
예 전이라면 또 모를까.
지금에 이르러선, 같은종에 속한 생물이라곤 도무지 믿기지 않을 만큼 강
해진 용사님이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보는 게 도저히 얼마 만인 것인지.
가물가물한 옛 기억을 파헤치려는 머리가 도연히 지끈거렸지만, 두통의
원 인은 비 단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주신이시여.저는 당신의 손가락. 한낱 어린양. 당신의 권능 아래 이 땅의
모든 것에게 안식을 안겨줄지니. 그 영광은 모두 당신에게 바치겠나이다.,,
고요히 읊조린 기도로용사님의 상처를완전히 치유해낸 뒤,못다한훈계
를 마저 이어 나갔다.
"거듭말씀드리는 거지만,용사님의 나이대엔 이성의 몸에 흥미가샘솟는
건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에요. 물론 조금 전처럼 상대방의 의지를 묵살하고
강압적으로 요구하는 건 옳지 못한 행동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그런 생각을
품은 것 자체는 그렇게까지 자책하실만한 일이 아니에요.,,
내 말투가 자식 이 음란물 보는 모습을 처음 맞닥뜨린 부모처럼 변모해 있
단 걸 깨달은 건, 밑도 끝도 없는 시작된 내 무근본 훈계가 음양 교화의 대한
서사에 다다르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저기요, 용사님? 제 말듣고 있으세요?"
■■••••■'
이쯤 되면 가벼운 맞장구 정도는 되돌아올 법도 한데, 일언반구의 대꾸조
차 없는 용사님을 의구심 담긴 어조로 호명해 봤다.
"요, 용사님?,,
"••••"
하지 만 용사님은 불과 조금 전에 내 가 입술을 갖다 댄 저 자신의 손등을
말없이 응시하고만 있었다.
손을 그녀의 눈앞에서 여러 차례 휘둘러, 의식이 유무가 있는지를 우
선적으로 확인해봤으나.
망막 바로 앞에서 분주히 서성 거리는 손짓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용사님
의 눈동자는, 가동범위가 좁은 CCTV 카메라처럼 자신의 시선을 똑같은 장
소에 그대로 고정해두고 있을 뿐이 었다.
"용사님! 정신 좀 차려보세요! 용사님!"
이따금 손가락을 튕 겨봐도, 양어깨를 붙잡고 거칠게 흔들어봐도, 일말의
미동조차 없는 용사님의 모습은 흡사 영혼을 잃어버린 사람을 보고 있는 것
만 같았다.
혹여나 어디 잘못된 게 아닐까싶어 맥도 짚어보고, 용사님의 심장쪽에 귀
를 가져 다 대, 호흡과 심음 또한 빠짐 없이 체크해 봤지 만, 이렇다 할 이 상은
보이지 않았다.
그냥 넋이 나가 있었다.
오랜 고민 끝에 내린 소견치곤 상당히 맥 빠지는 결말에 내가 당혹감을 금
치 못하고 있던 차.
우지끈! 콰당!
바로 그때였다.
낡은 목재가 가중된 힘을 이기지 못해 바스러지는 불길한 파형의 울림과
함께 굳게 닫아두었던 내 방문이 산산이 부서졌다.
"꺄아악! 무, 문이! 문이 부서지고 말았어요! 어, 어떡 ! 어떡하죠! 자매님들
!"
"그, 그러니까! 밀지 마시라고 제가 몇 번이나 이 야기했잖습니까!"
"그,그치만!숙맥으로소문이 난그레이지스사제님의 방에서 여성분의
신음 소리 가 들려온 거 라고요! 호기심 에 절로 몸이 기울어지고 마는 걸 어떡
해요!,,
부서진 문을 돗자리 삼아 방정맞은 논쟁을 벌이고 침 입자들의 정체는 이
근방의 관리를 도맡은 견습 수녀님들이었다.
똑같은 복장을 한 비슷한 용모의 사람들이 한자리에 켜켜이 쌓여있는 그
모습은 뿌요뿌요를 방불케 했다.
똑같은블록이 세 개 모였으니, 이제 곧사라지려나.
그런 현실도피에 가까운 잡념이 뇌리에 가득 들어차고 말아, 평소보다 반
응이 살짝 더뎌지고 말았다.
!..
......
"수녀님들지금뭐하세요••••?"
"레, 레이지스사제님! 이, 이건! 이건 말이죠!"
내 물음에 가장 먼저 회답한 건, 그녀들 중 그나마 가장 낯이 익은 인물이
었던 마리 안느 수녀 님 이 었다.
이곳 수도원에서 나와 가장 접점이 많은, 수도원 내의 모든 업무를 총괄하
고 있는 벨테 인 수녀님.
그런 그녀의 업무를 옆에서 보좌하는 역할을 맡은 비서 격인 인물이 바로
마리 안느 수녀 님 이 었다.
이른바, 친한친구의 친구 정도에 해당하는, 내겐 상당히 어색한위치 관
계에 있는 인물이 라고 볼 수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벨테인 수녀님께서 한시라도 빨리 레이지스 사제님을
알현실로 모시고 오라고 하셨던 터라! 잠시 방문토록 했습니다!"
"아, 그, 금방준비할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네, 녜엣!!,,
어, 지금혀 깨물었다.
긴장의 기색이 역력한 마리안느 수녀님의 창백한 낯빛을 보고서, 잠시 대
화 상대를 바꿔야 하나 싶었지만.
그녀를 제외한 다른 객원들은 마리안느 수녀님의 등 뒤에 몸을 숨긴 채 내
눈치를 무던히 살피고 있었는지라 여의찮아 보였다.
"저기 혹시, 문 바깥에 다른 사람은 없었나요?,,
"네, 네엣!?,,
'■아니, 그렇게까지 긴장하지 않으셔도돼요. 딱히 문책하는 게 아니라, 그
냥 문 바깥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있지 않은 건지 물어보는 거 니 까요. 그 키 가
굉장히 큰 남성분이라던가혹시 없었나요彆 彆 ••?"
''네, 넛!! 건장한 체격의 남성분이 한 분 계시긴 했었지만彆 • • •. 그, 그
게 • • 彆 •.레이지스사제님의 방문안쪽에서 어떤 여성분의 시,신음소리가들
려온 직후부턴 갑자기 귀를 틀어막고 헛구역질하시 면서 어딘가로 부리나케
달려가시던데요••••."
'쓰읍 •• • •.
II
절로 눈가로 올라간 손이 미 간을 집 었다.
아무래도 빅팀은 문 바깥에서 들려오는 단편적인 정보를 토대로 나랑 용
사님이 그렇고 그런 일을 행했으리라고 단단히 오해를 한모양이었다.
남매들에게 있어, 오누이의 신음성만큼끔찍한소음이 달리 없단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 사실 여부도 확인 안 하고 그대로 달아나버 린 빅 팀
이 아주 약간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나랑용사님이 몸을 겹치다니. 당치도 않았다.
그것만큼은 하늘이 두 쪽 나더라도 일어나지 않을 일. 아니,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 었으니까.
”마리안느수녀님이 여기 오신 이유는 잘 알겠어요.근데 그럼 다른수녀
님들은 제 방문 앞에 모여서 대체 뭣들 하고 계셨던 건가요.... •?"
"그, 그게…•."
넌지시 건넨 내 질문에 모두가눈을 피했다.
몇몇 수녀님들에 이르러선, 머리에 쓴 두건으로 저 자신의 홍당무 같은 얼
굴을 완전히 가리고 있기까지 했다.
그 겸연쩍은 거동에 의구심이 들어, 잠시 상념에 잠겨봤다.
그렇게 이리저리 얽혀있던 사고의 실타래가조금씩 풀어 헤져지자, 내 주
변을 장식하고 있는음험한단서들이 켜켜이 시야에 들어왔다.
밀폐된 방 안에서 땀에 흠뻑 젖어 있는 두 남녀.
이 따금 문 바깥으로 새 어 나오던 희 끄무레 한 신음성.
새하얀 침대 시트를 적신 붉은 핏방울.
비좁은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찐득한 담배 냄새에 이르기까지.
그모든 것들이 내 눈엔 내 숨통을 끊어놓기 위해 누군가가매설한 지뢰처
럼 비춰지고 있었다.
"여, 여러분! 자 잠깐만요!!,,
다급히 용사님을 끌어안아, 그녀의 얼굴부터 가렸다.
다행히 지금의 용사님은 때마침 인식 저해 목걸이를 장비하고 있었던 터
라, 얼굴을 정면에서만보지 않는다면, 정체가 새어 나갈 걱정은 전무했다.
하지만.
"꺄악一!! 껴안았어一!!!,,
그 직후, 그들로부터 터져 나온 핑크빛 비명에 순간적으로 머리가 새하얘
졌다.
쉽 사리 운을 뗄 수조차 없었다.
내가다음에 내뱉을 말에 얼마나순도 높은 간절함이 가미되어있다 한들,
지금 상황에선 어쭙잖은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으리란 건 불 보듯 뻔했
으니까.
상황이 이 난리임에도 용사님은 여전히 자신의 손등 쪽을 물끄러미 바라
보며 요지부동이었다.
언뜻 손등이 그녀의 입술 쪽으로 조금씩 이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 긴 했
으나, 그 속도가 달팽이랑 견줘도 박빙이란 생각이 들 만큼 무척이나 느
릿느릿했기에.
누가 기분탓이 라고 말한다면 그렇다고 쉬 이 납득할 수 있을 정도였다.
"여러분 잠깐! 잠깐만요! 제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괜찮아요! 레이지스 사제님 ! 저희는 오늘 아무것도! 아무것도 보지 못했
으니까요!,,
"꺄아악!"
눈을 질끈 감으며 나를 가로막고 있는 마리안느 수녀님의 배후로부터, 설
렘 가득한수녀님들의 핑크빛 비명이 연달아새어 나왔다.
개중에는 눈을 번들거리며 무언가를 열심히 메모하고 있는 수녀님.
손으로 눈을 가리고는 있지만, 그 사이사이는 널찍이 벌려놓은 수녀님도
있었다.
"여러분들 그게요! 사실은요!,,
도처에 널브러져 있던 이불보를 얼어있는 용사님의 몸 위에 덮어 일단그
녀의 얼굴부터 가린 뒤.
해명을 하기 위해, 침대에 묶여 있던 무거운 몸을 내가 천천히 일으킬 무렵
이었다.
딸까닥.
바로그때, 내 바지 주머니에서 무언가가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었고,그곳
에 자리한 모든 시선이 그 한점으로 수렴됐다.
"저, 저거••••!"
그것의 정체는 손바닥 크기도 되 지 않는 작은 상자였다.
장래를 약속한 남녀가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구
매하는 특별한 보석 공예물.
그 귀중품 중에서도 귀중품을 담아놓는 아담한 상자.
이른바.
"저거. . • • 반지함아니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