秦 75화 잦 미운 네 살. 죽이고 싶은 일곱 살.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은 익히 들어본 바 있
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여성을 함부로 화나게 해선 안 된다는 관용적 문구. 비유
적 인 표현이 라고만 여 겨왔었다.
그래, 적어도 지금 이 순간까지는 그랬다.
■■허••••;■
콰아아.
떠듬떠듬 열어젖힌 문 너머에 펼쳐진 이질적인 광경은 내 사고를 냉각시키
기에 충분했다.
드넓고 새하얗기 만 할 뿐인 무미 건조한 백색 공간은 여느 때와 별반 다를
바 없었지만.
그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는 거센 눈보라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집 어삼키
기라도 할 것만 같은 흉악스러운 존재감을 만천하에 과시하고 있었기에.
살가죽을 도려내 버릴 기세인 한기가광포한의지를 갖춘 채 길길이 날뛰
고 있는 듯한 그 모습은,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놓은 상태로 대략 한 달가
량 방치해놓은 집안 꼴을 연상케 했다.
케 케묵은 일본 애 니메 이 션에서 캐 릭 터의 불편한 심 기를 시 각적으로 보여
주기 위해 이따금 그 캐릭터의 주변 일대만 눈보라가 날리게끔 연출하는 걸
종종 보아오긴 했었다만.
눈앞의 살풍경에 내리 담긴 감정은그러한귀 여운표현으로참작할 수있
는 수준을 아득히 웃돌고 있다는 건 명확해 보였기에.
머지 않아 저 새하얀 포화 속으로 걸어 들어 가야 하는 내 마음이 먹물을
떨어뜨려 놓은 종이처럼 점차 거무죽죽해지는 건 별수 없는 일이었다.
콰앙.
살짝 열어두었던 알현실의 문을 조용히 닫았다.
■■그냥 날풀렸을 때 아니, 성녀님의 기분이 풀리셨을 때 다시 오면 안될까
요.... 彆 •
II
■■걱정하지 마십시오. 겨울용 외투와 어둠을 밝히기 위한 랜턴, 기타 산악
용 장비들도 빠짐없이 구비해두었으니까요."
마음이 심란한 탓일까.
어디서 솟아난 건지 모를 외투와랜턴을 내 눈앞에 차례차례 들이밀어 대
는 수녀님 의 거동이 오늘따라 유독 밉 살스럽 게 느껴 졌다.
”성녀님이 이 정도로화가 나신 건 로벨 사제님이 수작부린 날 이후론 처
음보는것 같은데 ••• 彆.저보고지금여길들어가라고요彆 •••?"
"뭐가그리 걱정이세요. 여태껏 성녀님이 사제님의 몸에 위해를 가한경우
는 단한번도 없었잖습니까.,,
'■오늘이 그 역사적 인 첫 번째 순간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 감
이 드는데요… •."
''아뇨. 장담할 수 있습니다. 성녀님은 절대로 레 이지스 사제님에 위해를
가하지 않아요.,,
자기 일 아니라고 말 막하네.
내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픈 수녀님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갔고, 수녀
님의 논리가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 또한 머리로는 알고 있었
지만.
무서운 건 무서운 거다.
수녀님은 과연 알까.
바람 한 점 없는 실내에 저 정도 규모의 자연재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초
월적 존재를 어르고 달래 러 가야만 하는 내 심 정을.
아니, 그보다 저런 신묘한 재주는 또 언제 익히신 걸까.
성녀님이 인간 마네킹 제조랑 남의 몸에 낙서하는 것 이외에 재주가 생겼
다는 건, 어찌 보면 성녀님이 저 자신의 신성력을능숙히 다룰수 있게 된 방
증이라고도 볼 수 있으니, 그녀의 성장을 축하해야 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 뒷감당을 오롯이 감당해 야만 하는 내 입 장에선 그저 위 가 쓰라릴 뿐이
었다.
"알겠어요.•...가면.... 가면되잖아요.彆..."
"현명하신 판단이십니다.,,
그렇게 체념에 가까운 결단을 끝마쳐낸 뒤, 잠시 닫아두었던 문고리를
떠듬떠듬 움켜쥐 었다.
수녀님이 말했던 그대로 여태껏 성녀님이 내 몸에 고의로 위해를 가한 경
우도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내 몸에 상처가 나는 걸 극심히 두려워하기까지 하니, 성녀님
이 내게 의도적으로 해를 가할 걱정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터였다.
■.후우...
철컥.
그렇게 그러한 실증을 추진력 삼아, 어렵사리 문을 열어젖힌 내가 알현실
안쪽으로 무거운 걸음을 내디딜 무렵.
쿵.
순식간이었다.
내 가 달에 처음 착륙한 우주비행사와 같은 비 장한 마음가짐 으로, 우악스
러운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는 알현실 바닥에 미적미적한 첫 발자국을 내
리찍자.
화아아.
어두컴컴한 방 안에 갑작스럽게 불이 들어오듯, 바로 그 즉시 눈보라가 숨
을 거두었고, 살아 숨 쉬는 생명은 무엇 하나 찾아볼 수 없었던 알현실 바닥
에 형형색색의 꽃잎들이 오색찬란이 만발했다.
그 초현실적은 정경은 전생 시절 즐겨보던 자연 다큐멘터리에서 꽃이 피
어나는 과정을 초고속카메라로 보여주는 광경을 연상케 했다.
"거 보세요.,,
지극히 차분하면서 도 약간의 의 기 양양함이 스민 어조로 수녀님 이 내 게
말을 건넸다.
이윽고.
"왜 이제 와.,,
잔뜩 심통 난 다람쥐처럼 양볼을 뾰루퉁이 부풀린 성녀님께서 내 눈앞에
그 모습을 드러 냈다.
碢碢碢
미운 네 살. 죽이고 싶은 일곱 살.
처음 들었을 땐, 자라나는 새 싹에 겐 조금 과도한 표현 이 아닌 가 라는 생 각
을 종종 하곤 했었다.
이제 막 자아가 무르익어갈 나이대인 아이들이 머리가 커짐과 동시에 고
집도 늘어나게 되는 건 어찌할 방도가 없는 일이지 않은가.
아이 가 울고불고 떼를 쓰는 건 자연의 섭리. 일종의 천재 지변 같은 것이며.
그러한 천재 지변에 매번 감정을 소모하고 번민하는 건 참으로 어 리석은
행위라는 걸 전 세계의 부모들은 왜 깨닫지 못하는 걸까.
뭣 모르던 시절의 나는 진심으로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결혼은커녕, 아직 딱지도못 떼본놈이 하여튼 입만살아선.,
언젠가 선배가 내게 내리꽂았던 그 통렬한 일침이 도연히 뇌리에 부풀어
올랐지만, 지금은 잠시 기억의 구석 자리에 제쳐두기로했다.
미 약한 변명을 조금 해보자면, 당시에 나는 육아라는 행위 가 지닌 무게를
전혀 헤아리지 못했었다.
무럭무럭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이리 치이고저리 치이는 선배를보며.
아, 힘들겠구나. 참 안됐다.
이런 식으로 강 건너 불구경하듯 그 피로감을 넌지시 짐작만 해볼 뿐, 그
실상을 온전히 가늠하지 못했고 구태여 가늠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애들이 말이 늘고 주관도 점점 뚜렷해지는데. 거기에 논리가 없어. 그게
어떤 지옥일지 상상은 가냐?,
때문에 수명 이 실시 간으로 타들어 가고 있는 듯한 초췌한 몰골로 내 게 회
한 어 린 조언을 열거하던 선배 의 말을 당시 에 난 그저 한 귀 로 듣고 한 귀 로
흘려 넘길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말이 지닌 무게감을.
아니,지금의 난 육아라는 행위 가 얼마나 고명하고 위 대 한 것인지 를 완전
히 깨우쳤다고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디 갔다와. 왜 이제 와. 온다고 해서 많이 기다렸어. 잔뜩 기다렸어. 왜
안 왔어. 나빠. 혼나. 많이 혼나.,,
"하, 할모헤허여…•.헝녀님… •."
바닥에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내 얼굴을 제빵사가 빵 반죽을
주무르듯 서슴없이 만져대는 성녀님.
이따금 내 입 안에 저 자신의 손이 비집고 들어가도 아랑곳하지 않는 그 손
놀림엔 뭐 라 형용할 수 없는 음험한 감정들이 진득이 스며 있었다.
"미안하면 벌 받아. 약속 안 지켰으면 벌 받아야돼. 지금부터 웰나가뭘 해
도 가만히 있어. 땡 할 때까지 움직 이면 안 돼.,,
"성녀님 .... •.아무리 그래도 그, 그건 좀彆 •••."
"말 안들으면 웰나밥 안 먹어. 잠도 안 자.하라는 거 다 안해.,,
"서, 성녀님••••!■■
요즘 들어 성녀님의 정신 연령이 부쩍 성숙해진 건 분명 감축할만한 사안
이었지만.
그렇게 성숙해진 지능으로 영악한 꾀를 끝없이 자아내기 일쑤니.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보필하는 입장인 나로선 마냥 기뻐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
다.
여태까진 해달라는 걸 안해주면 몇 차례 떼를쓰는 게 끝이었지만.
근래 들어선 이렇게 과거의 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 인용한다거나, 대화의
빈틈을 교묘히 파고드는 등.
매번 나와 협상을 하려고 들어대는지라, 성녀님의 고집을 저지하는 게 무
척이나 힘들어졌다.
그중에 서도 이 렇게 밥 먹는 걸 가지고 협 박하는 순간이 특히 나 고역 이 었
다.
이곳저곳을 방방 뛰 어놀기 바쁜 아이들의 뒤꽁무니를 쫄래쫄래 따라다
니며, 밥을 손수 떠먹여 주려는 애 엄마들에게 동병상련을 느꼈을 정도였으
니까.
”미, 미안해. 웰나. 오빠가 잠시 급한 볼일이 있어서 어쩔수가 없었어. 한
번만 용서해주면 안될까?,,
급한 대로 오빠 찬스를 꺼 내 보아 봤지 만, 이것도 최근엔 영 신통치 않았
다.
그도그럴 것이, 내가성녀님 앞에서 오빠를 자처하는 건, 성녀님이 원하는
바를 들어줄기 힘들다고 둘러대는 경우가 태반이었으니까.
최근엔 오히려 오빠 타령하는 걸 달갑지 않아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을 정
도였다.
■■입술 쪼옥도 안돼. 같이 자는 거도 안돼. 다 안돼. 웰나가 말하는 건 다
안돼.웰나는 약속 잘 지켰는데. 싫은 것도꾹 참고 잘 기다렸는데. 말 잘들
었는데. 맨날안돼. 안돼. 안돼.,,
"웨, 웰나…•.
II
미동 없는 표정 대신 이따금 신경질적으로 발을 구르는 것으로 저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성녀님.
그러한 격정적인 태도가 어떠한 감정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진 지금으로선
불명 이 었지 만, 그러한 감정의 노도가 머 지 않아 어 떠 한 임 계 점 에 다다르리 란
건 어렴풋이 짐작할수 있었다.
'■웰나 말 안 들어주면 웰나도 말 안 들어. 지난번에 부탁받은 ■그것,도 안
할거야. 절대.,,
"그, 그건!,,
성녀님이 지금 말하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
다.
가호 수여식.
성녀님이 지닌 가호의 힘을 용사님에게 수여하는 거룩한의식이자, 인류
의 존망성사가달려 있는성결한의례.
마왕 타도를 위해, 이 세상의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 반드시 성사시켜야만
하는 세계 평화의 근간과 직결되는 것.
"웰나말들을 거야?,,
-••••■■
양손으로 내 얼굴을 살며시 붙잡은 성녀님이 입술을 달싹이며 흐느적한
물음을 던졌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에 두 가지의 선택지가 희끔히 부유했다.
이대로 성녀님의 요구에 순응할지.
아니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