秦 77화 잦 자층수
선택의 기로에 놓인 사람이 머리를 감싸 쥐며 번민하고 있는 꼴만큼이나
재미진 구경거리는 드물다.
엄마가 좋은지 아빠가 좋은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어린아이.
다음 생에도 자신과 결혼할 것이냐는 배우자의 질문에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삐그덕거리는 남편.
불타입 물타입 풀타입 중에 무엇을 골라야 앞으로의 플레 이 가 순탄해 질
지 를 진중히 고뇌 하는 게 이 머 에 이르기 까지.
이처럼, 번복할 수 없는 선택지를 직면하게 된 인간은 설령 그것이 한낱 가
정에 불과한몽상이라 할지라도 그 앞날을 앞서 상상해보진 않곤 못 배기기
마련이다.
"뭐든지•• 彆 •.뭐든지 • ….
n
건네받은 종이가 어떠한 물건인지를 내게 구체적으로 전해 들은 성녀님이
이 따금 흐물흐물한 혼잣말을 허공에 읊조렸다.
수첩에서 찢어낸 꼬깃꼬깃한 종이에 고약한 필체의 글귀를 몇 글자 끄
적 여 놓은 것뿐인 사실상 휴지 나 다름없는 물건.
하지 만 그러 한 유사 쓰레 기 가 값비 싼 보물이 라도 되 는 것처 럼 소중히 쥐
고 있는 성녀님의 모습은, 이름 모를 외딴섬에서 우연히 보물 지도를 거머쥐
게 된 행운아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진짜로.... 彆 진짜로 이것만 있으면 웰나가 하고 싶은 거 뭐든지 다 해주
는거야•…?"
”네. 물론이에요. 지금까지 착한 아이로 있어 준 것에 대한보답으로 특별
히 성녀님에게만 드리는 거예요.,,
"응! 맞아! 웰나 착했어 ! 많이 착했어 !"
그 세상 당당스러운 태도가 잠시 내 머릿속에 선함의 기준에 대한 격한 고
뇌 를 불러 일으켰지 만.
시국이 시국이다보니, 그러한 자질구레한 잡념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하지만 명심해두세요. 성녀님. 이 소원권은 딱한번밖에 못쓰고, 오늘까
지 소원을 못 정하시 면 그냥 사라져 버 려요. 그러 니 까 원하시는 소원을 신
중히 생각하시고제게 말씀하셔야돼요? 아시겠죠?"
"으, 응! 아, 알았어 !,,
"하핫."
드물게 내 말을 유심히 경청하며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이는 성녀님의 모
습으로부터, 첫 심부름을 나간 아이가 부모에게 당부받은 걸 곱씹고 있는 기
특한 그림 이 자연스레 연상되 어 무심결에 흐뭇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거 걔한테도줬어• …?"
,,예?,,
바로 그때였다. 별안간 성녀님이 내 소매를 살며시 잡아당기며 나지막한
물음을 하나 던졌다.
걔.
누구를 지칭하는 건지 가늠하기 힘든 상당히 불명확한호칭이었지만.
성녀님의 비소한목소리에 스며들어 있는 어스름한 적의는 내게 그 신원
을 은연중에 짐작게 했다.
"요, 용사님을 말하는 건가요?,,
■■••••■'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으로 회답을 대신한 성녀님이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봤다.
결코 온건하다곤 볼 수 없었던 첫 만남 이후, 성녀님과 용사님의 관계는 그
야말로 최 악이라 일컬어도 과언이 아니었다.
원체 감정 표현이 드문 성녀님이 눈에 선히 보이는 적의를 버젓이 드러내
는 인물은 용사님뿐이 었고.
싫어하는 게 과연 있긴 한 걸까 싶을 만큼 이 세상의 모든 걸 긍정하고 찬
사하던 용사님이 유일하게 대놓고 적대시 하던 인물이 바로 성녀님이었으니
까.
눈만 마주치면 서로 으르렁거리기 일쑤였던 아피스와 다우나도 이 정도까
진 심각하진 않았었다.
그녀들은 중간에서 중재해주는 인물만 있으면 어느 정도의 의사소통은
가능했고, 가치관이 다소나마 어긋나 있을 뿐인지 서로를 죽일 듯이 미워하
는 건 아니 었으니까.
하지만.
나 걔 싫어. 자꾸 내 꺼 뺏어가려고 그래. 걔랑놀지 마.,
■가호수여식이 정녕 필요한의례인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가호같은것
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전 강합니다! 그러니 될 수 있는 한 성녀님의 도움 같
은 건 받고 싶지 않습니다!,
극상성이었다.
여태껏 그녀들의 언동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봐 왔던 나였기에.
대화 사이사이에서 느껴지는 사소한 변화만으로도 용사님과 성녀님이 서
로를 철천지 원수 대하듯 경원시하고 있다는 것 정돈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들의 그러한 감정의 요동이 어떠한 촉매로부터 점화되었는지
도 어렴풋이 깨닫고 있긴 했다.
가급적 부정하고 싶었지만, 솔직히 이쯤되니 모르려야모를수가 없었다.
"용사님한테는준적 없어요••••.
II
"진짜? 진짜?,,
"그, 그럼요. 성녀님한테만 특별히 드리는 거라고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잖
아요.,,
I
,후응.
II
내 대답이 상당히 만족스러웠던 걸까.
잔뜩 신이 난 기색인 성녀님이 주인을 반기는 토끼처럼 이따금 제 자리에
서 몸을 깡총거렸다.
남들에게 차마말못할사정이 있었던 데다, 수년간생사고락을 함께해온
용사님이 내게 호의를 품게 되어버린 건, 내게 그 마음을 받아들일 염치가
없을 뿐, 그 순리 정도는 마지못해 납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서로 알고 지내게 된 지 이제 막반년이 넘었을뿐인 성녀님이 내게
왜 이렇게까지 집착해 대는 것인지는도무지 알재간이 없었다
천애 고아로 태어난 내게 어린 시절 부득이한사정으로헤어진 배다른 여
동생 같은 게 있을 리도 없을 테고.
전생 때 사별한연인이 환생하여 다시 만나게 된 것이라고하기엔 내 이전
인생은 그러한 비극적 서사의 중심축이 될 수 있을 만큼 극적이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자문을 구하고 싶어도 성녀님 본인조차도 그 이유를 모르는
눈치 였던 지 라, 나 홀로 그러 한 의 문에 대 한 마땅한 해 답을 도출해 낼 수 있을
리도만무했다.
이 판국엔 만일 내 가 머지 않아 이곳을 그만두게 될지도 모른다고 한다면,
성녀님은 과연 어떠한 반응을 보이시려나.
잠깐 그 윤곽을 잡아보는 것만으로도 머 리 가 어 지 러워 지 는 중압감을 견
뎌 내 지 못한 나는 머 지 않아 생 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럼 저는 조금 있다 읽 어드릴 동화책을 고르고 있을 테니까. 소원이 정
해지셨으면 제게 말씀해주세요. 아시겠죠?,,
'응. 알았어.
fI
성녀님의 다부진 대답을 신호 삼아 머릿속에 가득 들어찬 잡념을 끊어내
버린 뒤, 바닥에 널브러진 동화책들을 향해 시선을옮겼다.
다행히 성녀님은 내가 급조해서 만들어낸 제안이 퍽 만족스럽다는 눈치
였다.
소중히 움켜쥔 소원권을 지그시 바라보며, 이 따금 몸을 좌우로 뒤 척 이고
있는 그 모습은 메 트로놈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fI
月
II
이 따금 콧노래 도 흥얼 거 리 는 걸 보아하니,어 지 간히 도 기 쁜 모양이 었다.
될 수 있으면 저대로 계속 혼자 상념 에 잠기 다 정해진 제 한 시 간을 넘 겨주
었으면 한다만, 그게 지나치게 낙천적인 생각이란 건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
다.
'뭐가됐든 상관없으니까,제발 키스만큼은참아줬으면• 彆 ••.'
이대로 가다간 성녀님의 고결한 입술이 나로 인해 더럽혀질지도 모를 일
이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손을 놓고 있었더라면 그보다 더한 참극이 벌어질 수도
있었던 터라, 애석하게도 내 부족한 머리로 떠올릴 수 있는 방안은 이게 최선
이었다.
역시 그냥 손등에 칼을 찔러넣을 걸 그랬나.
희 끄무레 한 후회 가 이 따금 시 야를 어그러뜨려 했지 만, 머 리를 두어 차례
휘저어 그러한 잡념을 재빨리 염단해냈다.
■동화책을 보며 마음을 다스려 보자;
바닥에 무성의하게 널린 책들을 주섬주섬 주워 담으며 그 표지를 하나하
나살폈다.
지난번엔 흥미진진한모험극을 위주로 읽어드렸으니, 이번엔 인생에 지침
이 되는 교훈이 가득 담긴 생활 동화를 위주로 읽 어드리는 게 교육상 좋을
테지.
"어디 보자....."
바로 얼마 전까지만하더라도 성녀님의 정신 연령에 걸맞으면서, 성녀님이
따라 할만한 문란한 내용이 없는 동화책을 선별하는 작업에 상당량의 시간
을 소요해 야 했었지 만.
그러한 내 노고를 눈여겨본 수녀님이 그 귀찮은 업무를 대신도맡아주겠
다고 말해주신 덕에 지금은 눈에 걸리는 책을 그저 골라내기만 하면 됐다.
"오, 이건 못 보던 책이네. 수녀님이 새로들인건가?,,
내 시선을 붙든 건, 수려한 그림과 고풍스러운 분위 기의 책 재질이 인상적
인 낯선 동화책 이었다.
책의 제목은고대 엘프어로 기술되어 있던 터라, ■엘프,라는글귀 말곤 읽
어낼 수 있는 게 전혀 없었지만.
어디까지나 표지의 제목만 그러할 뿐인지, 책의 내용은 공용어로 똑바로
적혀 있었다.
엘프들의 고서를 번역한 책에선 흔히 볼 수 있는 마감법이 었던 터라 그
렇게까진 놀랍진 않았다.
책을 펼쳐 그첫 문장을 조심스레 읽어 보았다.
"엘프를 성노예로 샀다고, 자네 제 정신인 • • …."
턱.
그 직후, 황급히 책을 덮었다.
내 가 잘못 본 게 분명했다. 아니,잘못 본 것이어야 했다.
매사에 철두철미한 수녀님께서 직접 관리하겠다고 호언장담하기까지 한
도서 목록에 이런음험한글귀가개재된 책이 존재할리 없을테니까.
그렇게 휘몰아치는 태풍처럼 내 사고를 순식간에 집어삼켜 버린 음험한
글귀의 정체를 재확인하기 위해 다시금 책을 펼쳤다.
펄럭.
"이, 이건••••!"
부정하고팠던 가설이 뚜렷한 현실로 탈바꿈되 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
리지 않았다.
틀림없었다.
야설이 었다.
아이들의 시선이 닿는곳에선 결코 두어선 안되는 일종의 금서이자, 어른
들도 남들 보는 앞에선 절대 펼쳐 보이지 않는 위험천만한물건.
어찌 보면 폭발물보다도 신중히 다뤄야만하는 서적이 왜 성녀님이 안치
된 알현실에 부주의하게 굴러다니고 있는 것인지는 지금으로선 나중 문제였
다.
진정한 문제는 성녀님이 이 책을 펼쳐 봤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기에.
"소원 정했어!,,
바로 그 직후, 격한 설렘을 다분히 머금은 때 묻지 않은 목소리가 낭랑히
메아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