秦 78화〉비밀 병기
굳게 닫힌 알현실 문 앞에 바짝몸을 기댄 채, 귀족 집에 숨어든 금고 털이
범처럼 부단히 귀를 쫑긋거리고 있는 벨테인은 지금 유례없는 긴장감에 사
로잡혀 있었다.
알현실에 무성의하게 널브러진 동화책 무더기에 몇 권의 불온서적을
섞어둔 파렴치한 인물.
그 천벌 받아 마땅한 소행을 저지른 범인이 다름 아닌 그녀였기 때문이 었
다.
순결을 지향해 야만 하는 성녀. 그녀 가 몸을 안치한 거룩한 성소에 남녀의
교접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저서를 산재해 둔다는 건.
그 죄질이 심히 극심한 불경이자, 자칫 종교 재판으로까지도 번질 수 있는
심 각한 사안이 었지 만.
사제를 성녀에게 묶어두기 위해 더 이상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리라
고 다짐한벨테인에게 있어, 그러한위협은 더 이상위협이라고도부를수없
는 물건이었다.
여태껏 성녀의 전속이었던 사제를 바로 옆에서 극진히 보좌해왔던 그녀였
기에, 사제와성녀 사이의 관계도는 이미 완벽하게 파악해둔지 오래였다.
성녀의 대담한 애정 공세를 견디지 못한 사제가 이따금 성녀를 밀어내고,
그 손을 다시금 성녀가 억지로 붙들고 늘어지고 있는, 이른바 언제 무너질지
알 수 없는 얄팍한 다리와도 같은 상태.
한때는 그러한 불안정한 교착 상태가 최대한 가늘고 길게 이 어졌으면 했
던 벨테인이 었으나, 지금은 당장이라도 그 균형이 맥없이 무너져 버리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성 녀 가 사제를 왜 그렇게 까지 따르고 있는지 에 대해 선, 성 녀 가 성 녀 이 기
이전의 모습을 온전히 기억하고 있는 벨테 인조차도 상황 정황으로부터 넌지
시 짐작만 해볼 뿐, 완벽히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 이 었지만.
지금의 벨테인에게 있어 가장중요한요점은그사제만이 지니고 있는 모
종의 특별한 힘 덕분에, 흔적조차 남김없이 소실되 어버렸다고 여겼던 성녀의
인격이 점차 본래의 형태를 되찾아가고 있다는 것이었기에.
지금 벨테인의 머릿속엔 가호 수여식이 진행되는 이 7일간의 유예 기간
동안, 성녀와 사제 사이에 정분을 일으켜, 책임감이 강한그가 본인의 의지로
성녀의 곁에 남겠다고 말하게끔 하기 위한 술책만이 가득 들어 차 있었다.
서둘러야 했다.
교황청의 수뇌부들은 미천한 평민 출신인 그가 성녀의 전속으로 발탁되
어버렸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아니꼽다는 눈치였던지라.
그의 업무 환경을 노골적으로 괄대한다거나, 재직 중인 다른 사제들을 사
주해 수도원 내에 따돌림을 종용하는등.
그를 수도원 바깥으로 내 몰기 위 해 온갖 더 러운 수단도 마다하지 않는 그
들로부터 그의 신변을 사수해내는 건 무척 이 나 고달픈 작업 이 었다.
더욱이 사제 본인에게 전속의 자리를 계속 이어가고픈 마음이 없기까지
했던 탓에, 벨테인이 이대로 가만히 손을 놓고 있는다면, 희망의 동아줄이나
다름없는 그가 머지않아 지금 이 자리에 사라지게 되리란 건 불 보듯 뻔했다.
!.
........
"그건 안돼••••!"
성녀가 성녀가되어버린 이후의 나날, 그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악몽의 기
억은 지금도 벨테인의 안검 안쪽에 철에 스민 녹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마치 사람이 본디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들을 모조리 긁어내 버린 공간에
막대한 양의 솜을 꾹꾹 눌러 담아놓은 봉제 인형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니, 인형이라는 말도 상당히 후한표현일지 모른다.
인형은 실을 매달아 놓는다면, 누군가의 조력이 있다면, 움직 일 수도 있고
말을 할 수도 있으니까.
비록 그곳에 인형의 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실을 움켜쥔 인
물의 의도대로 나부끼고 있는 인형을 바라보며 인형극의 인형이 실재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어린아이처럼,그녀가 아직 이 세상에 존재할지 모른다는 착
각에 사로잡힐 순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한 꼭두각시 인형조차도 되지 못했다.
그릇이었다.
귀 중한 물건을 잠시 담아 놓는 한낱 그릇.
심장은고요히 멈춰 있었고, 맥박도흐리지 않았다.
무언가를 먹고 마시려고도 하지 않았고, 단 한시도 잠들지 않는 그 모습은
눈을 깜빡일 수 있는 것인지조차도의문스러워질 지경이었다.
체내에서 요동치는 우악스러운 신성력 덕분에 그럼에도 그녀는 살아있을
수 있었지만.
고동도 없고, 호흡도 하지 않는, 생물과의 유사점을 무엇 하나 찾아볼 수
없었던 당시의 그녀를 과연 살아있다고 지칭해도 되는 것인지, 벨테인은 확
신할수 없었다.
지 옥 같은 시 간이 었다.
알현실 바닥에 우두커니 주저앉은 채 아무것도 없는 허공만을 무심히 바
라보고 있던 '동생이었던 것,을 향해.
이번 성녀는 역대급 걸작이라며 환희를 부르짖고 있던 역겨운 이들을
도륙 내고픈 살의를 벨테인은 간신히, 그야말로 간신히 억눌러 왔었다.
어쩌면 동생이 돌아와 줄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낙천적이고 희망적인 하나의 가정일 뿐이란 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지
만, 만일 동생이 자신의 곁에 돌아와 주었을 때, 그녀가 몸을 눕힐 보금자리
를 만드는 건 언니인 자신의 몫이라고 여겼으니까.
그것은 속죄 라고도 부르기 민망한 부박한 현실 도피 일 뿐이 었지 만.
그러한 남루한 믿음이 여태껏 몇 차례나 무너질 뻔했던 벨테인의 마음을
지 탱해왔다는 건 의 심할 여지 가 없었다.
때문에 그사내의 등장과 동시에 성녀가살아 움직이기 시작한건, 벨테인
에게 있어 하나의 구원이 나 다름없었다.
관상용 조각상이라도 불러도 손색없을 하나의 물체로까지 영락했던 동
생이 팔다리를 움직이며, 저 자신의 원하는 바를 주장하고 보채는 광경을 처
음 보게 됐을 땐, 벨테 인은 바닥에 주저앉아 감격에 겨운 눈물을 흘리느라
한참 동안 일어나지 못했었다.
스윽.
화상 자국 하나 없는 저 자신의 매끈한 얼굴 피부를 조심스레 더듬으며,
벨테 인은 다시 한번 결의를 굳혔다.
그는 이미 한 차례 성녀의 정신을 각성시켜 놓았고, 본래라면 나을 수 없는
상처를 치료해내기까지 했다.
그 잇따라 일어난 기적들이 어떠한순리로 일어나게 된 건지는 하등 중요
한게 아니었다.
우연이 세 번이라면 그건 이미 필연이라는 말이 있듯, 연거푸 자신을 구
원해준 기적을 직면한 벨테인이 그가또다시 기적을 일으켜 줄 것이라고 맹
신하게끔 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 었다.
수는 이미 써두었다.
정신 연령은그대로인 채 몸만성숙해진 상태인 성녀였기에, 지금의 성녀
가 누군가를 향해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은 키스가 최대치였다.
어쩔 도리 가 없는 일이 었다. 그 이상의 표현 방법을 세속적 인 법도에 둘러
싸인 성녀가 알수 있을 리 만무했으니까.
때문에 그 겁 많은 숫총각을 꼬드겨내기 위해선 지금보다 애정 공세의 바
리 에 이 션을 늘릴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떠올려낸 계책이 바로 야설을 매설하는 것이었다.
사고가 어느 정도 무르익어, 전해 들은 모든 지식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
는 지금의 성녀가 야설을 보게 됐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불 보듯 뻔했
으니까.
성녀의 용모를 지금 이상으로 가꾸는 건 불필요했다. 아니, 불가능했다.
멀리서 그 모습을 살짝 선보이는 것만으로도 실신자를 속출시 키는 이 세
상의 것이 아닌 듯한 신비로운 미모.
정식 수호사제가아직 발탁되기 이전,혹시 모를불상사를 대비해,신실한
여신도로만 이루어졌던 시종 중에서도.
무언가에 홀리기라도한것처럼 성녀의 몸에 손을 대려 했다가, 일전의 라
노벨 사제처럼 살아있는 박제가되어버린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의 정신은 머지않아 원래대로 되돌아왔기에 큰 사단으로까진 번지지
는 않았지만, 그 일화를 알고 있는 이들은 성녀를 이따금 에덴동산의 아담을
현혹한 선악과에 비유하곤 했었다.
때문에 그 사제가성녀의 외견적인 요소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을 가
능성은 상당히 희박했다.
그에게 성욕이 없는 게 아니란 것도 사전에 확인해 두었다.
벨테 인은 똑똑히 기 억하고 있었다.
이 따금 자신이 하늘 높이 기 지 개를 켤 때마다, 그 사제 가 자신의 흉부쪽을
향해 넌지시 시선을 흘겼다는 사실을.
그는 들키지 않았다고 여기고 있는 듯했지만, 엄숙한 수도복으로도 미처
가리지 못한 벨테인의 몸매는 남성의 시선을 붙잡는데 특화되어 있었고.
이로 인해 벨테인 본인 또한 남성의 음심 어린 시선을 포착하는 것엔 자연
스레 도가 트게 됐다.
만일 그가유방이 작은 여성한테는 일체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인종이라
면, 그때는,이걸, 사용한다.
한쪽 팔로는 온전히 떠받칠 수 없는 자신의 비밀병기를 고고히 내려다보
며, 벨테인이 저 자신의 결연한의지를 다시금 굳혀냈다.
저 항감은 그닥 없었다.
여타 다른 사내들이 자신의 가슴을 쳐다볼 때와 달리, 그의 시선은 기묘하
게도 부담스럽게 느껴질지언정 불쾌하진 않았으니까.
남성 유혹하는 방법 따위 여태껏 배워본 적도 없었고, 배울 필요성도 느끼
지 못한 지난 날이었지만.
알현실에 매설할 야설을 선별하면서 그 이론 정도는 머릿속에 입력해 놓
은 벨테인은 지금 근거 없는 자신감에 휩싸여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콰앙
"꺄악!
II
벨테인이 몸을 기대고 있던 알현실의 문이 갑작스레 활짝 열어젖혀졌고,
그 기세에 떠밀려 자연스레 바닥에 나뒹굴게 된 벨테인의 입에서 별안간 앙
칼진 비명이 새어 나왔다.
그 직후, 눈 앞에 펼쳐진 충격적인 광경에 벨테인의 호흡이 잠시 멎었다.
"서, 성녀님?,,
정체 모를 새하얀 밧줄로 온몸이 칭칭 둘러매진 레이지스 사제.
그리고 커다란 곰 인형을 질질 끌고 나오듯, 그의 목 뒷부분을 붙잡은 채
알현실 바깥으로 터덜터덜 걸어 나온 성녀.
"수녀님! 성녀님 좀 말려주세요!,,
사제의 다급한목소리에 각성한의식 속에 동굴속메아리처럼 절절히 울
려 퍼진 목소리는 이루 말할수 없는 결연한 의지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여기서 나갈 거야.,,
가호 수여식을 목전 앞에 둔 성녀의 난데 없는 가출 선언.
벨테인의 입이 떡 하고벌어지게 건 별수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