秦 80화〉강도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하늘. 선선한 바람. 기분 좋은 노곤함을 불러일으
키는 따사로운 햇살에 이르기까지.
바깥나들이 하기에 있어 가히 최적의 날씨임이 분명해 보였지만, 그은혜
로운 일광을 내리쬐며 수선스러운 거리를 누비고 있는 나와 수녀님의 표정
은 빈말로라도 밝다고 할 순 없는 상태 였다.
"빨리. 빨리 와. 빨리. 빨리.
!!
우리의 느릿한 걸음걸이가 어지간히도 답답했던 모양이었는지, 멀찍이
앞서가고 있던 성녀님이 연거푸 우리를 재촉해 댔다.
아무리 인식 저해 후드를둘러쓴 상태라곤 해도, 요란히 행동하면 정체를
들킬 우려가 다분하다는 수녀님의 당부를 귓전으로도 듣지 않은 듯한 그 경
솔한 거동이 가뜩이나 착잡한 내 상념을 또 한 차례 술렁이게끔 하고 있었다.
"성녀님이 상당히들뜨셨네요. 언니.
■■••••■'
"저렇게나 신이 난 성녀님을 보는 건 난생처음이네요. 늘 알현실에 안에만
틀어박혀 계셔서 그런 걸까요. 언니.,,
"••••"
"그나저나 알현실에서 성녀님을 몰래 데리고 나온 것도 모자라, 변변한 경
호도 없이 대로변을 돌아다니다니. 이거 걸리면 봉급 삭감이나 해고 정도론
절대 안끝나겠죠? 언니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이익.…!"
내 빈정 어린 말투가 아니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져 있는 수녀님이 나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지만.
평소의 총기를 흔적조차도 찾아볼 수 없는 그 뿅망치 같은 기백은 날 주눅
들게 만들기엔 역부족이 었다.
"언니. 화나셨어요?,,
"이, 입안다물어요!?,,
나한테 성녀님의 응석을 너무 받아준다고 핍박 주던 수녀님이 성녀님의
무미건조한 애교 한 방에 녹다운 된 광경은 상당히 볼만 했었다.
수녀님 본인도그러한 자신의 행동이 상당히 민망스럽긴 했던 모양이었는
지,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내 비아냥에도 마땅한 변론 한 마디조차 내놓
지 못하고 있는실정이었다.
불끈 쥔 두 주먹을 단전에 모아둔 채, 연신 입술을 파들거려 대는 모양새
가상당히 안쓰럽게 보이긴 했다만.
그러한 연민의 감정도 평소의 설움을 되갚아줄 절호의 기회를 내가손에
서 놓아버릴 이유는 되지 못했다.
”저, 점심 예배 시간까지 귀가하시게끔 하면 문제 될 건 없습니다.오히려
실외 활동과큰 인연이 없던 지금의 성녀님에겐 이렇게 햇살을 내리쬐며 가
벼운 운동을 하는 시간은 필요했던 걸지도 모를 일이고요. 그래요. 이건 어디
까지나성녀님의 건강을도모하기 위한습관개선의 일환으로彆 彆 ••."
"언니. 멋져요."
”하, 한 번만! 한 번만 더 언니 타령하면! 가만! 가만 안 놔둘 거예요! 아시
겠어요!?,,
결국 인내심이 폭발해버린 수녀님이 내 목덜미를 붙잡고서 그걸 앞뒤로
거칠게 흔들어댔다.
숨통을 붙들렸지 만, 숨이 막히 기는커녕, 오히 려 크게 심 호흡을 한 듯한 개
운함마저 느꼈다.
그럴 만도 했다. 내 가 수녀님과의 대화에 서 우위를 점한 건 이번이 처음이
었으니까.
그렇구나. 이게 바로승리의 맛이로구나. 달다.
"푸하하."
"뭐! 뭐뭐뭐뭐가! 뭐가그렇게 우스우신 건가요! 레이지스사제님!"
그런 시 답잖은 실랑이 가 얼마나 이 어졌을까.
머 지 않아 수녀 님 이 내 게 질문을 하나 던졌다.
"물어보지 않으시는 건가요彆 … ?,'
"예? 뭐를요?,,
"저와성녀님의 관계성에• .... 대한걸• 彆 • • 요• • …
■■아••••;■
신경 쓰이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일 테지.
성녀님이 홀연히 읊조린 '언니,라는 말 한마디에 수녀님이 보인 절절한
반응만 놓고 보더라도, 두 사람 사이에 모종의 긴밀한 사연이 있으리란 건 일
목요연해 보였으니 까.
하지만.
"제가 궁금하다고 하면 말해주실 건가요?"
"그, 그건…彆."
"그럼 됐어요. 굳이 말씀 안하셔도 돼요. 전 염치는 없지만, 그래도 눈치는
조금 있는 편이 거든요.,,
■■••••■'
남들에 함부로 말못할 사연이라는건 누구에게나더러 있기 마련이다.
나조차도 용사님과 동료들에 게 아직 말하지 못한 비밀이 수두룩했으니
까.
평 생을 함께할 사이 여도 쉬 이 입 에 올리 기 힘든 과거를 조만간 떠 나보내
게 될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털어놓을 수 있을 리 만무할 것이기도 했고.
지금 이상으로 이들과 깊게 관계되어 버리면, 나중 가서 관둔다고 말하기
더더욱힘들어질것이 분명했기에 .
눈치껏 눈을 감고, 귀를 틀어 막기로 했다.
"저거. 나 저거 먹고 싶어. 사줘. 사줘.,,
"응?
fI
바로 그때였다.
어느새 우리들의 바로 코앞까지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성녀님이 내 옷깃
을 쭉쭉 잡아당기 며 어딘 가를 가리 켰다.
성녀님의 새하얀 손가락이 향한 건, 줄을 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어느 이름 모를 점포였다.
가호 수여식이라는 인류 최대의 경사를 코앞에 둔 제도의 거리는 전국 각
지의 볼거리와 먹거리들이 즐비한 이른바 축제의 장.
때문에 이때를노려 한탕해 먹기 위해 걸음을옮긴 제도 각지의 장인들이
이곳 수도에 몰려듦으로써, 지도 변두리에서나 볼 수 있는 숨은 명물도 지금
만큼은 손쉽 게 맛볼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성녀님 이 관심을 보인 건 모슨멘. 소위 걸레빵이 라고 불리는
엘프들의 전통 음식이었다.
얇은 종이처럼 펼쳐놓은 네모난 밀전병에 꿀을 바르고 말아 넣은 호떡
비스름한 식 품으로.
낡은 두루마리를 연상케 하는 겉보기와는 달리, 꿀에 젖은 빵 특유의 그
쫀득한 식 감은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다.
11저기… • •.설마저게 드시고싶어서 밖에 나가고싶다고하신 건가요
••••?"
"응? 아니? 그냥 먹고 싶어. 소원 따로 있어. 그냥 사줘. 빨리. 사줘 ."
■■하아 • ••• 방금 막아침 밥을 드신 참이잖아요 • •••. 더군다나 저렇게 줄
이 많으면 한참을 기다려야될 텐데. 기다리실 수 있으시겠어요?"
"먹어. 먹을래. 먹을거야. 먹을수 있어. 사줘. 사줘."
"하아, 알았어요. 사드리면, 사드리면 될 거 아니에요.,,
"자, 잠깐! 잠깐만요! 레이지스 사제님!,,
성녀님 의 성화를 이 기지 못한 내 가 마지 못해 지 갑을 꺼 내 려던 바로 그 순
간, 사각에서 튀어나온수녀님의 손이 내 팔을붙들었다.
"아, 안됩니다! 영양이나위생 상태가채 점검도되지 않는길거리 음식을
서! 크, 크흠! 이분에게 드시게 한다니요! 절대 허가해드릴 수 없습니다!"
급한 와중에도 주위의 시선을 고려해 성녀님 이라는 호칭을 성공적으로
자중해 낸 수녀님 이 우렁찬 호령과 함께 다시 한번 우리 앞을 장엄히 가로막
았지만.
"언니. 웰나 저거 먹고 싶어요. 사주세요."
파앗!
성녀님이 몸을 좌우로 무심히 흔들며 자아낸 애정 어린 호소가 울린 그 직
후.
점포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을 향해 날렵히 몸을 날린 수녀님의 그 영민한 모
습은 먹잇감을 발견한 초원의 치타를 연상케 했다.
碢碢碢
"저거 완전히 중증이네… •."
"중증?"
손님 이 우글거 리 는 점포 한 가운데 로 용맹 하게 뛰 어 들어 간 수녀님 을 기
다리기 위해, 내 가 선택한 휴식처는 행인들의 시선이 닿기 힘든 구석진 골목
이었다.
아무리 나무를 숨기는 데 숲만 한 곳이 없고, 사람을 숨기는 데 있어 군중
만한곳이 없다곤하나.
수백 수천 개의 시선이 오고 가는 거리 한복판에 후드 하나를 두르고 있을
뿐인 성녀님을 그대로 방치해 두는 건 내 심장이 견디질 못할 게 분명하기 때
문이었다.
"지쳤어. 안아줘.
"아,네… •."
거리 이곳저곳을 방방 뛰 어다닐 땐 언제고, 대뜸 양팔을 내 쪽으로 쫙 펼쳐
보이며 투정을 부려대는 성녀님.
솔직히 깃털보다 아주 살짝 무거운 정도인 성녀님을 들어 올리는 건 일도
아니었지만, 안을 때마다서로의 몸 이곳저곳이 의도치 않게 밀착되어버리
는 건 어느 정도 익숙해진 지금도 상당히 고역이었다.
I
■푸흡.
II
"으응?
fI
성녀님을 안아 올린 뒤 찾아온 찰나의 침묵.
바로 그때, 성녀님의 언니라는 말 한마디에 로켓처럼 뛰쳐나간 수녀님의
모습이 또한차례 뇌리에 어른거려 무심코웃음이 새어 나오고말았다.
그 맹목적인 모습은 언젠가 본 광신도를 연상케 할 정도였으니까.
잘 타이르면 보증도 서줄 기세였다.
성녀님과 수녀님. 두 사람 사이에 어떠한 사연이 있었는지는 알 방도가 없
었고,그리 알고싶지도 않았지만.
언제 나 냉 철하던 수녀님 이 성 녀님의 말 한마디 에 어 쩔 줄 몰라 하는 모습
은 먼 훗날에도 이따금 떠올리고 웃고 마리란 걸 확실할수 있을 만큼 재밌는
광경이었다.
"우, 움직이지마!,,
바로 그때였다.
배후에서 들려온 낯선 목소리. 예고 없이 등허리를 들쑤신 뾰족한 감촉이
내 의식을 쭈뼛 곤두세웠다.
"소리를 내면 죽인다! 뒤돌아보면 죽인다! 수상한행동 보이면 죽인다! 사,
살고 싶으면 돈될만한건 죄다바닥에 던져 놓고! 지금 당장 여기서 꺼져!"
뒤 를 돌아보진 않았지 만, 비 강을 들쑤시 는 퀴 퀴 한 냄 새 와 등허 리의 날붙
이로부터 전해져오는 미세한 떨림으로부터 지금 나를 위협하고 있는 인물의
정체와 역량은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여행객을 노린 강도인가.
솔직히 이 위협 같지도 않은 위협을 뿌리쳐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
었다.
하지만 싸움에 원체 요령이 없는 내가 누군가를 제압할수 있는 방법은 상
대를 냅다 벽에 처박는 것 말곤 달리 없었고, 그런 요란한 행위를 다른 때도
아니고 성녀님을 끌어안은 채 행할 순 없는 노릇이었기에 .
지금은 일단 사내의 요구에 조용히 순응하기로 했다.
뭐, 가진 돈 전부라고해봤자, 어차피 장한번 보면 없어질 푼돈이기도했
으니까.
길 가다돈 몇 푼 흘린 셈 치면 되는 일이 었다.
■■알겠어요. 지금 가진 돈 전부를 꺼내드릴 테니까. 제발 저를 해치지만 말
아주세요.,,
'■조, 좋아! 그, 그렇게만 해! 안심하라고! 무사히 돈만 내놓으면 당신도
당신네 딸아이도 무사할 테니까!,,
적당히 비위를 맞춰주며 주머니에 넣은 손을 뒤 적거렸다.
사내가 지금 내 표정을 보고 있질 않아 천만다행이 었다.
이따금 호흡을 고르며, 아랫입술을 살며시 깨물고 있기까지 한 지금 내 꼴
은 웃음을 참고 있는 인간의 전형일 테니까.
스윽.
"자, 이게 제 전 재산이에요. 모두 가져가세요."
"오
그렇게 내가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지갑과 금품을 사내의 요구대로 죄다
바닥에 떨어뜨리 려 한 바로 그때였다.
덥석!
갑작스레 뻗어 나온 성녀님의 새하얀손이 별안간 내 손을 거칠게 움켜쥐
었고.
예기치 못한 사태를 직면한 내 시선이 그러한 사건의 진원지를 향해 조용
히 미끄러졌다.
야밤의 점등하는 맹수의 눈빛을 연상케 하는 그 붉은 동공은 내 손에 위
에 올려진 지갑.그바로 옆에 자리한값비싼금품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
"이거.,,
성녀님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오늘 아침 있던 용사님과의 실랑이 때, 내가
무심코챙겨와버린 물건이자, 미처 처리하지 못했던, 잠시 내 의식 바깥으로
떠나가 있던 물품.
그렇다. 반지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