秦 82화 잦 우월감
잠기운은 이미 한참 전에 사그라들었건만, 아직도 용사는 자신의 상념을
한차례 휩쓸고 간꿈의 여운으로부터 온전히 헤어 나오지 못했다.
자신의 양 손목에 보이지 않는 밧줄이 동여매져 있기라도 한 것처럼, 양팔
을 가지런히 가슴께에 끌어모은 채 몽롱히 허공을 주시하고 있는 그 흐리멍
덩한 자태는 약에 취한중독 환자의 모습이 어른거릴 정도였다.
별안간 읊조린 그 흐느적한 말도 그녀의 의식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
었다.
아렴풋한 꿈 너머의 풍경을 쫓아가는 과정 속에서 무심코 달싹여진 입술
에 의한결과물. 이른바의식의 부스러기.
만일 꿈에 만취해버린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지금의 그녀와 똑같
은 모습을 하고 있을 게 분명해 보였다.
"꾸, 꿈이었군요…•.
II
사실 그녀가 사제와몸을 겹치는 꿈을 꾼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아무리 이 세상의 평화를 도래케 한다는 거대한 위업을 짊어지고 있는 위
인이라 한들, 결국 그녀 또한 어쩔 수 없는 그 나이대의 소녀인지 라.
사랑하는 사람과 몸이 맞닿고 싶다는 원초적인 욕망을 완전히 염단해낸
다는 건 애 당초 불가능한 일이 었다.
하지만그녀가 여태껏 꾼 꿈의 내용은 그에게 종일 끌어안겨 있는다든가,
그의 볼에 얼굴을 비빈다든가,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
누는등의 지극히 퓨어한 내용이 태반이었다.
죄책감 때문이 었다.
그가 가진 모든 걸 송두리째 뿌리 뽑아버 린 자신이 그의 사랑을 독차지 한
다는 건 당치도 않은 일이 라고 여 겼으니까.
만일 그가 여색에 흥미가 지대한 호색한이었다면, 자신의 몸으로 그의
욕망을 기꺼 이 받아내고자 했었지 만.
성직자는 신께 순결을 맹세한 몸이라 성욕이 존재치 않다는 그의 거짓부
렁에 단단히 속아 넘어갔던 그녀는, 결국 자신의 삿된 욕망을 깔끔히 단념
해야만 했었다.
하지 만 사제의 황홀한 입맞춤이 꺼 져 가던 욕망의 불씨에 기름을 부어버
리고 말았다.
사제가자신의 손등에 입을 맞춘순간,용사는 떠올려냈다.
그가 호색한을 자처했다는 것과 자신에게 성적 매력을 느껴왔었다는 사
실을 고백했단 걸.
그 실상은 용사의 협박에 가까운 간청에 못이긴 그가 마지못해 그녀가 원
할 법한 답을 적당히 읊조린 것뿐이 었지만.
그러한 사정을 알 리 없는 용사에게 있어, 사제의 그 말은 일종의 암묵적
동의로 받아들여지고 말았다.
나는 신부님과 사랑을 나누고 싶어.
신부님도 내 몸에 욕정하고 있어.
그렇다면 더 이상 거리낄 필요는 없는 게 아닐까?
이해의 일치. 서로가 서로를 소유하고픈 남녀가 머지않아 도달하게 되는
종착지.
너무나도 몰염치 한 가정 이 라 여태 껏 상상하는 것조차도 삼가왔던 어떠 한
미래가 별안간 용사의 뇌리에 섬광처럼 명멸했다.
결혼. 그리고••••.
꿀꺽.
고요한 방안에 별안간 울려 퍼진 음험한 침음.
이윽고, 산모가 자신의 배를 다정히 쓰다듬듯, 용사가 자신의 왼손을 조심
스레 쓰다듬었다.
무의 식 적으로 찾아 헤매고 있었던 까닭이 었다.
자신이 그의 것이 되었다는증표이자,그가자신의 것이 되었다는 증명.
결혼반지를.
"••••"
하지 만 첨 단 끝에 서부터 느껴 지 는 공허한 감각은 그녀 가 포말이 되 어 버
린 꿈을 미 련스럽게 뒤쫓고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할 뿐이 었다.
.
''후읍..... 하서아. •• •,"
그 대체품으로 낙점된 건 사제의 입술이 한 차례 내 려 앉은 저 자신의 손등
. 그 꺼풀에 진득이 녹아든 타액의 향이었다.
"스읍彆 • • •.하아• • • •. 제 꿈에 함부로 나타나신 신부님이 • • • •.신부님이
잘못하신 겁니다••••."
궁색한 변명이었다. 얼토당토않은 궤변이었다.
하지 만 지금 이 순간 용사는 자신의 몸속에 서 용암처 럼 끓어오르는 삼엄
한 열을 진정시 킬 방도는 이것뿐이라고 맹신하고 있는 상태 였다.
이따금 자신과 악수를 나눈 사람들이 이 손을 평생 씻지 않겠다고 호들갑
을 떨어대는 모습을 의아하게 여겼던 그녀였지만.
지금은 그 심정을 절절히 통감할 수 있었다.
친애하는 이가 자신에게 새긴 냄새를 영원토록 소유하고 싶다고 느
껴버리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일 테니까.
자신은 나쁘지 않았다. 자신은 잘못되지 않았다.
만일 잘못한 사람이 있다면, 이런 끈적하면서도 농후한 페로몬을 자신의
몸에 부주의하게 흘리고 간 그 사내일 게 분명했으니까.
"저기,그거 들으셨어요? 레이지스사제님이 글쎄!"
바로 그때였다.
자신의 손등 쪽으로 천천히 입술을 가져다 대려 한 용사가 방 바깥에서 들
려온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은 그 직후, 제 발 저린 도둑처럼 별안간 몸을 흠
칫거렸다.
'지, 지금 저는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했던 거죠!,
손등 쪽으로 조금씩 전진하고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뒤로 튀어 오른 그 다
급한 거동으로부턴 눅눅한 미련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이는, 삿된 본능으로 어둑해져 있던 그녀의 시야에 이성의 빛이 되돌아왔
다는 방증이 기도 했다.
"레이지스 사제님과 벨테인 수녀님 ! 둘이 함께 외출 신청을 하셨대요!,,
그 잔뜩 흥이 들어찬 목소리 는 복도에 서 이 야기꽃을 피우고 있는 사용인
들의 것이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그 전문을 알아듣긴커녕, 복도에 누가 있는
지조차도 알아채 지 못할 만큼의 비소한 성량이 었으나.
인간의 범주를 아득히 초월한 그녀의 청각은 그들의 대화를 단 한 구절도
놓치지 않았다.
신부님이 여성 분과단둘이 외출이라니! 절대 간과할수없습니다!
평소의 용사였다면, 그것과 유사한 내용의 고성을 내지르며 문을 박차고
나갔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지금 이 순간 용사는 여느 때와 별반 다름없는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째서일까요! 예전 같았으면 신부님이 여성분과 단둘이 있다는 것만으
로도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는데 !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하물며 그 상
대는 한 때 저를 신부님 에 게 서 떼어놓으려고 했던 분이 기 까지 한데! 오히 려
왜 지금까지의 제가그런 사사로운 일로 야단법석을 부려 댔는지 의구심이
생길 정도입니다! 헛! 설마이건!,
모종의 깨달음을 얻은 용사의 시선이 별안간 자신의 손등 쪽을 향했다.
사제가 자기 자신의 의지로 그녀의 손등에 친히 새겨주고 간물건. 이른바
애정의 증표.
지금 용사의 상념을 가득 메우고 있는 여유로움은 바로 이곳에서부터 샘
솟고 있음을 용사는 넌지시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군요!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그 말로만 듣던 정실의 품격 ! 어른의 여
유라는 것이로군요!,,
가히 성 직 자의 귀 감이 라고 불러도 손색 없을 만큼 금욕적 이 었던 그가 다
른 사람에게도 그러한 행위를 해줬을 확률은 상당히 현저했다.
제도에 서 손꼽히는 미 녀들로만 이 루어진 용사 파티 내 에 서도 사제 가 저
자신의 음심을 내보인 전적은 여태껏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성직자는 성욕이 존재치 않다던 사제의 말을 용사가 곧이곧대로 믿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 었다.
그렇 기 에, 손등 키 스라는 고등 단계 의 스킨십을 그에 게 건네 받은 여성은
이 넓디넓은 세상에서 오직 자신밖에 없으리라고 용사는 확신했다.
그 성녀에게조차해주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설사 해주었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성녀가 그를 지위와 권력으로 억
압한 결과물. 그의 자의로 행해졌다고 보기엔 힘들 터였다.
때문에.
그의 애정이 듬뿍 내리 담긴 이 손등은 지금으로선 자신만의 소유물. 아니,
전유물이 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 었다.
fI
헤,헤헤. 彆 ••.
II
값비싼 보물을 손에 쥐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별안간 자신의 왼손을 소중
히 움켜쥔 용사가배시시 한미소와함께 침대에 몸을 떨어뜨렸다.
투덕투덕.
이따금 침대 시트를 살포시 두드려 대는 양 다리는 지금 그녀가 느끼고 있
을 벅찬 감격을 고스란히 대변해주고 있었다.
시종일관 자신을 번민케 했던 성녀를 향한 적개심도 어느샌가 눈 녹듯 사
라져 있었다.
아니. 오히려 적개심이 불타 없어진 자리에 옅은 동정심이 켜켜이 움트고
있었다.
그녀는 사제로부터 이런 아름다운 선물을, 그의 진심이 내리 담긴 찐득한
애정 표현 같은 건 구경조차도 못 해봤을 게 분명했으니까.
더군다나 성녀와 사제의 인연은 가호 수여식 이 종료되는 그 즉시 끝나버
릴, 참으로 얄팍하기 이를데 없는관계지 않은가.
자신은 앞으로도 그와 뜻을 함께하며, 인연을 더욱 돈독이 하게 될 것이
분명했고, 먼 훗날 이보다 더한 선물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나.
그녀는 그러한 자신들의 애 정행각을 먼발치에 서 지켜만 보고 있어 야 할
운명인 것이다.
가엽게도.
그가 가진 마성적인 매력에 마음을 빼 앗겨버렸음에도, 그 애정의 잔재
조차도 나누어 받지 못하는 성녀가 용사는 더없이 가엽게 느껴졌다.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에게 베푸는 건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선 마땅히 자행되어야만 하는 암묵적 관행이거늘! 하물며
성녀님은 저보다 趁살이 어린 미숙한 나이대 ! 그런 성녀님과 진심으로 다투려
했다니! 저 자신의 그릇이 얼마나 작은지 다시 한번 통감해버리고 말았습니
다.,,
초롱초롱한그눈동자엔 일말의 악의도 내리 담겨 있지 않았다.
지금 용사의 상념을 구성하고 있는 감정은 격한 자신감과 약간의 동정심.
그리 고 희 끄무레 한 우월 감뿐.
"이걸 기점 삼아 성녀님에게 화해를 요청해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하지
만 그전에 우선! 방 안에 오래 있었으니, 잠시 바깥 공기를 마시러 갈 필요가!
그래! 잠시 산책을 하러 갈 필요가 있을 것 같군요!,,
그렇게 자신의 잡념을 남김없이 털어낸 용사의 등에는그녀의 희망에 부
푼 마음가짐을 대변하는 아름답고 투명한 날개가 나풀거린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