秦 89화 잦 축복받지 못하는 결혼식 (5)
아슴아슴한 의식 속에서도 그 찬란한 휘광은 명확했으며 또한 선명했다.
어두침침한 밤안개를 늠름히 거두어버리는 아침 햇살과도 같은 이 열기.
유례 없는 피 로감이 눈꺼 풀을 짓누르고 있는 탓에 지 금으로선 그 발치를
시인하는 게 고작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이곳에 그녀가, 용사님이 와 있다
는 것 정돈 선히 체감할 수 있었다.
"신부님! 괜찮으십니까!,,
걱정의 기색이 역력한그 다급한목소리에 태연히 회답하려 했으나, 말을
할 기력마저도 잃어버린 입으론 이따금 황망한 숨을 짓씹어내는 게 고작이
었다.
게슴츠레 뜨여진 눈으로 지금 내 행색을 잠시 살폈다.
땀에 푹 젖어 든 몸. 쇠 약한 호흡. 목 주변 단추가 죄다 풀려 쇄골뼈가 훤히
드러 난 꼴은 차마 두 눈 뜨고 못 봐줄 지 경 이 었다.
이 모든 게 내가의식을 잃은 사이 성녀님이 내 몸을 마음껏 희롱한 결과물
이란 걸 유추해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사실, 그리 놀랍지도 않은 일이었다.
고양이한테 맡겨놓은 생선이 멀쩡한상태로보존되어 있는게 더 이상할
테니까.
오히려 하반신 쪽엔 손을 댄 흔적이 없다는 것에 옅은 안도감을 느꼈을 정
도다.
허나, 이러한광경이 용사님의 눈에 어떻게 비칠지에 대한건 대충흘려 넘
겨선 안되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눈동자에 셀로판테이프가 붙여져 있는 듯한 불투명한 지금 시야로도, 옷
이 헐벗겨진 나와그런 내 무릎 위에 올라탄 채 내 뺨을 다정히 어루만지고
있는 성녀님의 모습은 끈적한 사랑을 나누고 있는 남녀로 보였으니까.
안그래도 성녀님을 철천지원수대하듯 적대시하는 용사님이 이 요사스러
운 광경을 보게 됐을 때, 어떤 반응을 선보일지는 가히 상상조차 가지 않았
다.
때문에 지금 용사님 이 느끼고 있을 혼란을 조금이 라도 덜어내 기 위해선
뭐든 해야했다.
바로잡아야만 한다. 아직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안일하기 그지없는 내 생각을 원형조차 남기지 않고서 짓이겨버린
건, 내 입가 쪽에서 울린 한 음절의 야릇한 울림이 었다.
쪽.
"훗擉
fI
성녀님이 내 입가에 살포시 입을 맞춘 그 직후, 이 주변 일대의 공기가 삼엄
히 술렁였다.
성 녀님의 상큼한 코웃음 소리도 그 살기등등한 분위 기를 누그러뜨리 기 엔
역부족이었다.
고개를 치켜들어 용사님의 표정을 살피려 했으나, 아직도 내 관절 마디마
디를 빈틈없이 옥죄고 있는 투명한 사슬들 때문에 이조차도 여의찮았다.
"저리가. 우리 바빠.,,
초대받지 못한 손님을 문전박대라도 하듯, 별안간 성녀님이 용사님에게
불만을 표했다.
이 만큼이 나 해 놓고도 아직 도 뭐 가 더 남아있단 말인 가.
성녀님의 돌발 선언에 어스레한 두려움마저도 느낀 내가 표현 없이 경
악하고 있을 무렵 이 었다.
"과연 그렇군요!,,
상정했던 최 악과는 멀찍이 척을 지고 있는 명랑한 목소리.
여 전히 그 표정은 오리무중이 었지 만, 그 활기찬 울림은 환한 미소가 동반
되 지 않는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것이 었다.
살았다.
이유까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용사님은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랑 성녀님이 끌어안고만 있어도 칼을 빼 들으려 했던 용사님에게 지금
성녀님은 정신이 온전치 않은 상태라고 거듭 강조해왔던 지난 나날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나비넥 타이를 맨 소년 명탐정도 쉽사리 파악해내 기 힘든 이 혼란스러운
사태의 맥을 정확히 집어낸 용사님에게 백배사례를 하고픈 마음이 절로
샘솟았고.
"잘알겠습니다!,,
뒤이어 메아리친 그 활기찬고성은 내 상념에 뿌리내린 몇 안되는 의심의
싹을 모조리 뿌리 뽑기에 이르렀다.
그것이 연이은 충격으로 망가져 버린 뇌가 자아낸 한낱 착각에 불과했단
걸 내가깨닫게 된 건.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신부님! 금방해치우겠습니다!"
어렵사리 고개를 들어 올린 직후, 화사한해바라기를 연상케 하는 미소를
머금은 채로 천천히 칼을 빼 들고 있는 용사님을 두 눈으로 목격하게 된
순간이었다.
碢碢碢
파캉!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용사님의 매서운 칼날은 성녀님의 바로 코앞에 도
달해 있었다.
눈을 한 번 깜박이는 것조차도 녹록지 않을 것만 같은 그야말로 찰나에 불
과한 순간.
내 옹색 한 동체 시 력으로는 그 잔영을 포착해 내는 게 고작이 었을 만큼, 그
일련의 움직 임은 초월적인 속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를 진정으로 경악하게 한 대목은 그 부분이 아니었다.
철그럭! 철그럭!
성녀님의 안면. 그 바로 코앞에 정치해 있는 용사님의 칼날이 이따금
흉흉한 금속음을 발하며 몸을 비틀었다.
그 살기등등한 모습은 목에 쇠사슬이 둘러매진 맹수가 사슬 범위 바깥의
먹이를 집어삼키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 광경을 연상케 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용사님의 검으로부터 성녀님을 지키고 있었다.
내가 그 근거 없는 가설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건, 지금 내 몸을 휘감고
있는 이 반투명한 쇠사슬이 지금 용사님의 몸을 얽어매고 있는 무언가와 어
딘가 닮아있다는 걸 넌지시 깨닫게 된 순간부터였다.
I
■흐음!"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태연히 몸을 꿈틀거리고 용사님의 모습은
얼핏 여유로운 듯 보였으나.
이 마에 도드라진 굵직 한 핏줄 한 줄기는 그녀 가 지금 상당히 격 양된 상태
라는 걸 은연중에 서사하고 있었다.
"멍멍.,,
바로 그때였다.
자신의 바로 코앞에서 용을 쓰고 있는 용사님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만 있
던 성녀님이 맹수 우리 너머의 짐승을 구경하듯 별안간 그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멍멍. 어린아이의 말로 개를 이르는 말.
제도에 명운을 짊어진 용사를 지칭하는 데 사용하기 엔 다소, 아니 상당히
모욕적 인 그 언사는 안 그래 도 살얼음 같던 주변 분위 기를 한층 더 냉 담하게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었다.
I
'후우••••.
II
고개를 푹 숙인 용사님이 잠시 숨을 골랐다.
그 질퍽한 기식은 외면적인 요인이라기보단, 내면적인 문제라고 보는 게
보다 마땅해 보였다.
내면에서 솟구쳐 오르는 격한 충동을 이성으로 억지로 눌러 담고 있고
듯한 그 살벌한 호흡은 그녀와 제법 긴 인연을 보유한 나로서도 처음 보는 모
습이 었다.
그 살벌한 침묵이 얼마나 더 이 어졌을까.
"설명 부탁드립니다!"
한동안 땅바닥에 고정되 어 있던 고개를 힘차게 들어 올린 용사님 이 해 맑
은 미소와 함께 대뜸 성녀님께 질문을 던졌다.
■■갑작스럽게 칼을 빼 들어 성녀님의 급소를꿰뚫어버리려 한 점! 지금 이
자리에서 가슴 깊이 사죄드립니다! 하지만! 아무리 성녀님이라도 신부님에
게 이러한 결례되는 행동을 행하시는 건 도저히 간과해드릴 수가 없을 것 같
습니다!,,
입가가 호선을 그리고 있긴 했지만, 그 미소가 여느 때에 비하면 상당히 작
위적이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였다.
파들파들 떨려대는 입가. 한쪽만 부자연스럽게 찌그러져 있는 미간. 이따
금 아랫입술을 신경질적으로 짓씹어 대는 모습에 이르기까지.
끓어오르는 가까스로 화를 참고 있는 인간의 전형적인 표본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혹은! 이 모든 게 저의 오해로부터 비롯
된 사태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이 검을 거두겠다고 맹세하겠습니다! 저는 이
제도 국민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은몸! 용사니까요! 그러니! 이러한 사태가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불가피한 이유를 제게 자세히 설명해 주시길 바랍니
다! 서두르셔야 할 겁니다! 지금 저는 냉정함을 잃으려 하고 있으니까요!"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이 자리에 벌떡 일어나용사님에게 박수라도 쳐주
고픈 심정이었다.
용사님이 저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번민을 거쳐왔는지를 짐작해보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울 지경이었으니까 .
하지 만 용사님의 그러한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양 귀를 틀어
막고 있는 성 녀 님 은 그러 한 용사님 의 대 화 요청 이 그저 성 가시 다는 눈치 였
다.
"멍멍. 시끄러."
뿌득.
내 바로맞은편에서 미소가, 아니 감정이 일그러지는 소리가들려왔고.
여태껏 지지부진한 움직임만을 피로하고 있던 용사님의 칼과 신체가
호쾌하게 몸을 비튼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챙강!
간담을 서늘케 하는 살벌한 파형의 울림이 비좁은 교회를 가득 메웠고, 그
중심측에서 흙먼지와 함께 튀 어 오른 용사님의 그 날렵한 거동만 놓고 봐도,
그녀가 지금 완전한 임전 태세에 들어가 있다는 건 명명백백해 보였다.
'■어떤 방법으로 절 구속한 것까진 모르겠지 만, 힘으로 끊어낼 수 있다는
걸 확인한 이상, 더 이상 같은 수법은 통하지 않습니다."
성녀님으로부터 잠시 거리를 벌린 용사님이 성녀님 쪽으로 장엄히 칼을 치
켜들며 엄숙히 말을 건넸고.
용사님이 자신의 구속을 끊어낼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는지, 드물게 눈을
크게 치켜뜬성녀님이 그 검 끝을 잠시 주시했다.
"안줄 거야. 내 꺼.,,
"으읏!,,
내 얼굴을 거세게 끌어안아 자신의 가슴께에 파묻어버린 성녀님이 내 귀
를 잘근잘근 깨물어 가며 용사님 에 게 자신의 강직한 뜻을 선포했다.
이건 내 것이다.
이제 막 말을 뗀 어린아이도 알 수 있을법한 지극히 간단명료한 의지 표명.
그에 대한용사님의 회답은 이러했다.
"지금 당장. 아저씨한테서 그 더러운손 떼.,,
기억 속의 언젠가를 절로 떠올리게끔 하는 그 차분한 목소리엔 거무죽죽
한 살의가 선연히 넘실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