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문가의 지표자-1화 (1/133)

서장.

검은 사냥개

나의 완생이 이런 꼴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모두 잡아들여라! 단 하나도 놓치지 말고 모조리 생포해!”

검은 투구를 뒤집어쓴 무리가 순식간에 인어섬을 헤집어 놨다.

총칼을 든 자들이 수많은 인어를 잡아들이고, 도망치는 그들을 상처 내며 푸른 바다를 붉은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해저탄을 준비해라. 어차피 살아서 가져가나, 죽여서 가져가나 라피스는 얻어낼 수 있어!”

지켜봤다.

나를 지키는 자들 뒤에 숨어 인간이 인어를 사냥해대는 그 끔찍한 장면을 모두 기억에 새겼다.

-해주(海主)님, 이만 가셔야 합니다.

-금방 따라올 거예요. 지금 떠나셔야 해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다 한가운데에 불길이 일었다.

결국 인어 몇이 꼼짝도 하지 않는 나를 붙잡고 재빠른 속도로 바다를 가르기 시작했다.

-저들이 모든 메모리아 라피스를 가져갔어요. 이제 우릴 기억할 분은 해주님뿐이에요.

-그러니 꼭 사셔야 합니다. 어서 도망가세요!

바다의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나를 지키기 위해.

인어의 지표자인 나를 살리기 위해 수많은 인어들이 인간에게 돌아갔다.

‘빌어먹을 사냥개들.’

인어는 종(種)의 특성상 생명력이 길고 강하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과도 견줄 바 없이 생명력이 수천 배에 달했다.

그래서 인간은 인어를 사냥했다. 인어가 죽으며 남기는 생명력의 결정체이자 영혼의 조각인 ‘라피스’를 얻기 위해서.

끊임없이 인어의 서식지를 찾아내 우리를 사냥해 왔다.

-해주님, 부디 완생하세요.

-우리 인어들의 미래를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숨어 살았다.

저 검은 사냥개들을 피해 그들이 알 수 없는 곳을 찾아 끝도 없이 이 바다를 내내 헤매야 했다.

그리고 그들이 모르는 새로운 정착지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해주였다.

세상의 모든 것을 기억하는 힘, 메모리아 라피스를 남길 수 있는 것 역시 해주였다.

해주들은 영원에 가까운 오랜 시간 동안 그 기억을 통해 이 바다를 떠돌아 다녔다.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을 찾아내기 위하여.

-이러다 붙잡히겠어.

-내가 막을게. 넌 어서 해주님과 도망쳐!

멀어져 갔다.

내가 지켜야 할 존재들이 나를 지키기 위해 죽음 앞에 뛰어들었다.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인어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눈앞이 온통 새빨갰다.

‘안 돼… 돌아와.’

죽지도 못하고 온전히 생명력을 소진해 온 지난 시간 동안 나는 늘 그날의 기억 속에 살았다.

-해주님이 완생하신다.

검은 사냥개들의 총공세로 인어족의 절반을 잃은 그날 이후로 나는 죽지 못해 살았다.

그들은 훔쳐낸 인어의 기억 ‘메모리아 라피스’를 통해 인어족의 습성을 파악했고, 더더욱 체계적인 방식으로 우리를 사냥했다.

나의 실패였다.

그리고 우리의 멸망이었다.

이제 인어족은 채 열 몇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드디어 완생을 맞이할 수 있었다.

-해주님, 부디 삶의 너머에선 아무것도 기억하지 마세요.

-더는 우리 인어들을 위해 살지 마세요.

온몸을 가득 채우고 있던 강한 생명력인 라피스가 점차 심장 한가운데서 굳어가는 게 느껴졌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제 끝이다. 드디어 이 지독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겨우, 해방이다.’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살았다. 그 모든 순간을 기억해야만 하는 저주와 같은 삶이었다.

두 번 다시는 이 어두컴컴한 곳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잘 있어라, 바다야.’

드디어 육체가 물거품 속에 잠겼다. 평생 무겁게 짓누르던 수압이 전부 사라지고 온몸이 가벼워졌다.

점차 꿈만 꿔오던 영원한 안식과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뭐지?’

다만 숨. 숨이 모자랐다.

‘숨이라고?’

그보다 내가 숨을 쉬었던가? 그건 어떻게 쉬는 거지? 이상함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부족한 호흡은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고통을 참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온몸을 짓누르는 갑갑함에 결국 발버둥 쳤다.

그러자.

“…아가씨?”

처음 듣는 목소리와 함께 다시 눈을 떴다.

“레브 아가씨!”

그것도.

아주 낯선 세상에서.

1화

1장. 몬데이어 공작가(1)

“…윽!”

순간 누군가가 물속에서 건져 올린 것처럼 갑작스레 숨이 터져 나왔다.

정신을 차리기 무섭게 거친 숨을 토해냈다.

내내 억눌려 있던 호흡을 단번에 토해내느라 가슴이 터질 것처럼 아팠다.

‘여기가… 어디야?’

온통 눈이 부셨다. 밝은 빛은 정말이지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눈살을 찌푸리고 주변을 살폈다. 아직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으나 이곳이 바다가 아니란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아직 못 죽은 건가?’

인어의 완생은 고귀한 일이다.

영원에 가까운 모든 생명력을 소진하고 맞이하는 순간이기에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

다만, 이곳은 너무도 익숙했다.

‘여긴 인간 세상이잖아. 내가 왜 여기서 눈을 뜬 거지?’

바다에 내려앉은 기억 속에서 엿본 적이 있는 곳이다.

검은 사냥개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바다 위 대륙.

바로 그 낯선 세상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말도 안 돼. 설마….’

가슴이 불안으로 쿵쿵거렸다.

꿈이라기엔 너무도 생생했다. 무엇보다 내가 이딴 꿈을 꿀 리가 없었다.

널찍한 침대와 휘황찬란하게 은빛으로 물든 장식품들. 가장 높은 곳엔 웬 여자아이의 초상화와 가문의 휘장이 위엄 있게 내걸려 있었다.

‘푸른 새와 은색 발톱?’

바닷속에 가라앉은 인간들의 역사는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저건 실재하는 가문의 문양이다. 이건 상상이 아니다. 빌어 처먹을 더러운 악몽 같은 것도 아니다.

눈앞에 펼쳐진 상황은 현실이자 재앙이었다.

“이런 젠장!”

급하게 벽면 한가운데에 위치한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확인을 위해 손을 뻗자 초상화 속 인물과 똑같은 아름다운 소녀가 움직였다.

허리까지 늘어뜨린 은백색 머리칼이 빛을 반사시켰다. 구불구불 길게 늘어진 머리칼은 탐스럽고 윤기가 돌았다.

그리고 그런 소녀를 바라보는 푸른 눈. 바다의 숨결을 새겨 넣은 것 같은 보석 같은 눈동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쟤가 나라고?’

이해할 길이 없으나 사실이 그랬다.

잘 죽으러 가던 완생의 끝이 이 어린 인간의 몸속이었다.

“말도 안 돼!”

죽다 말고 인간이 되다니, 웃기지도 않는다. 그토록 인간을 피해 살았던 내가 하필이면?

검은 사냥개들을 피해 평생을 숨어 살았는데, 완생 끝에 인간 세상에서 되살아났다고?

“왜 하필….”

검은 사냥개들은, 인간들은 인어족을 무차별적으로 사냥했다.

생명력의 원천인 라피스를 훔쳐내기 위해 그 긴 시간 동안 끊임없이 바다를 헤집어 놨다.

죽일 수 있다면 그랬을 것이다. 단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죽이고 싶을 만큼 인간에 대한 증오는 강력했다.

하지만 힘이 없었다. 그들은 이길 수 없는 힘을 가졌고, 인어들을 지켜야 하는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근데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분노로 눈앞이 뱅뱅 돌았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울렁거리는 시야에 풀썩, 주저앉았을 때였다.

“어머, 아가씨!”

벌컥, 문이 열렸다. 그리고 잿빛 의복을 입은 늙은 여인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쟁반을 내던지고 빠른 속도로 달려와 와락, 품에 안았다.

졸지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인간에게 안긴 꼴이 되어 인상을 확 찌푸렸다.

“뭐, 뭐야! 이거 안 놔?”

“이럴 수가! 제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아세요?”

왜 깨어났는데 부르지 않았냐는 원망이 뒤섞인 눈초리였다.

그보다 나, 왜 이 사람 눈빛을 해석할 수 있는 거지?

“언제 다시 일어나신 거예요? 몸은, 몸은 좀 괜찮으세요?”

누군지 모르겠는데 너무 잘 알겠다.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반갑기까지 했으니까.

자신을 침대 쪽으로 이끄는 늙은 여인, 아니 유모 메리 부인이 몹시 반가워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유모?”

“예?”

“…메리?”

“예에?”

눈앞의 여인은 유모 메리로, 태어난 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떨어져 본 적 없는 아주 각별한 사이였다.

뭐야. 이건 내 기억이 아닌데.

안 그래도 끝도 없는 인어의 기억 속에 낯선 것들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머리가 터지기 직전이었다.

“무려 일주일간 쓰러져 계셨어요.”

“…내가?”

“예에! 가만있어 보자. 이럴 때가 아니지! 아가씬 지금부터 꼼짝도 하지 마세요! 다시 쓰러지시면 큰일이니까요.”

아니, 그러고 싶다. 지금 그 누구보다 죽고 싶어 안달이 났다.

안긴 품 안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칠 때였다. 메리가 꽁꽁 닫힌 문밖을 향해 우렁차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당장 들어와 이곳을 치우고 영주님께 소식을 전하라는 외침이었다.

“정말이지 혼자 계시면 늘 사고만 치신다니까요. 지금부터 제가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지켜 드릴게요.”

필요 없다.

“제가 다치지 않게 보호해 드릴 거예요. 이 메리만 믿으세요.”

싫다니까.

자신을 꼬옥 껴안는 망할 인간의 품에서 인상을 홱 찌푸렸다.

“깨어나셔서 다행이에요…. 정말, 정말 다행이에요, 아가씨.”

그러나 아무것도 듣지 못한 메리는 계속해서 등을 쓰다듬으며 연신 안도했다.

내 불행이 인간들에게 행복이 되다니.

“…아가씨, 다신 떠나지 마세요.”

정말이지, 죽고 싶은 기분이었다.

***

그러니까 상황 정리가 필요했다.

“이름은.”

“레, 레브 몬데이어요.”

“말 더듬지 마.”

“…예에. 죄송해요, 아가씨.”

“나이는?”

“올해로 열 살이세요.”

열 살? 고작 십 년을 산 인간 나부랭이가 됐다고, 내가?

얌전히 침대에 앉아 메리를 괴롭히던 레브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런데 자꾸 그런 건 왜 물으세요, 아가씨….”

“내가 며칠 전 큰 사고를 겪고 다쳤다며.”

“…그러셨죠. 지난 일주일간 깨어나지 않아 모두가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몬데이어 공작가.

이 망할 아가씨는 몬데이어 공작가의 유일한 여식으로, 지난 10년간 영지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잘 자라온 귀엽고, 웃음 많은 공녀님이었다.

‘물론 지금부터 그런 아가씨는 사라지고 없을 테지만.’

바닷속에 내려앉은 인간들의 역사는 해주가 모두 알고 있어야 할 중요한 기억이었다.

검은 사냥개들이 누군지 정체를 알지 못하는 이상, 바다 위 인간 전부가 적이었다.

어쩌면 이들 중 누군가가 검은 사냥개일지도 모르지.

레브가 인상을 찌푸리며 몬데이어 공작가에 대해 떠올렸다.

‘서대륙의 이름 있는 가문이던가.’

몬데이어 공작가는 서대륙 가이아 왕조와 마지막을 함께한 가문으로서, 동북부 폰네시 지역을 통치하는 유서 깊은 집안이었다.

하지만 이 가문은 400년 전에 이미 멸문했다.

나 그럼 지금 400년 전 과거로 돌아온 건가?

‘이쯤이면… 아직 우리 인어들도 많이 살아 있어.’

어쩌면 기회일지도 모르겠다.

인어의 영혼이야 완생으로 끝이 났고, 무슨 영문인진 모르겠지만 낯선 인간 세상에서 눈을 떴다.

고작 열 살 난 소녀의 심장에 칼을 박는다고 인간을 향한 분노가 잠재워질 것 같지는 않다.

‘검은 사냥개들이라도 찾아내면 모를까.’

레브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것을 보며 메리가 조심스레 그녀를 살폈다.

꼬박 일주일을 쓰러져 있던 사랑스러운 아가씨는 도저히 제가 알던 사람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쓰러져 있는 동안 모든 기억을 잃었어.”

“예?! 모, 모든 기억을요?”

“그래, 그러니까 설명해봐. 지금이 인간들의 날짜로 언제쯤이지? 가이아력을 쓰는 때가 맞나?”

“아, 아니요. …현재는 데로니스력 23년 248일이에요.”

“데로니스력이란 말이지.”

생각에 잠겼다.

400년 전, 가이아 왕조가 데로니스 가문을 주축으로 모인 세력에 무너지고 만다.

서부와 남부의 힘이 더해진 연합 세력이 무려 반만 년의 역사를 가진 가이아 왕조를 몰아내고 새로운 데로니스 왕조를 세운 것이다.

‘그럼 멸문까지 한 8년 정도 남은 건가?’

이후 몬데이어 공작가는 끝까지 가이아 왕조와의 의를 지키다 결국 멸문하고 만다.

8년 후 이 공작가의 후계자, 레온 몬데이어가 데로니스 연합군에게 살해당하며 말이다.

‘확실히 그쯤까지의 행적이 머릿속에 남아 있어.’

다만 인어의 기억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다.

메모리아 라피스를 남긴 후폭풍인지, 아니면 볼품없는 인간의 몸에 들어와 그런 건지 해주 시절의 기억이 온전하지 않은 듯했다.

두 눈을 감았다.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쯤이었다.

똑똑!

“아가씨, 영주님께서 오셨습니다.”

문밖에서 호들갑스러운 가신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메리가 부산을 떨며 벌떡 일어났다.

인어가 재빨리 그런 메리에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으니까 들어오지 말….”

“레브, 레브!”

말도 끝나기 전에 발칵, 문이 열리며 은백색 머리칼을 칼같이 빗어 넘긴 중년 남성이 들이닥쳤다.

보나 마나 이 몬데이어 공작가의 주인이자 폰네시의 영주인 루시오 공작일 것이다.

“레브!”

루시오 몬데이어가 빠른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곧장 침대로 다가와 하나뿐인 딸의 이마에 입 맞추고 온기가 도는 따뜻한 볼을 쓰다듬었다.

순간 레브의 표정이 걷잡을 수 없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뭐 하는 짓이야!”

“급한 일이 있어 바로 찾아와 보지 못했구나. 화가 났니? 이제 몸은 좀 괜찮은 거야?”

영혼을 잃어버리고 어디서 다 죽어가던 수천 년 묵은 인어의 영혼이 들어앉았는데, 이 공작가의 아가씨가 괜찮을 리는 없었다.

“이것 좀 놔!”

거세게 루시오를 밀어내고 매섭게 눈을 치떴다.

구불구불한 은백색 머리칼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아름다운 푸른 눈이 분노를 잔뜩 담았다.

루시오가 고개를 저었다. 무려 일주일간 의식도 찾지 못했으니 이 상황이 혼란스러울 만도 했다.

“하지만 네가 다시 깨어났으니 이제 더 바랄 게 없다. 널 되찾았으니 난 아무것도 바랄 게 없어.”

루시오 몬데이어가 다시 한번 레브를 껴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하나뿐인 딸이 무사하니 더는 바랄 게 없었다. 이대로 세상이 멈추어도 된다고 생각할 정도로 가슴 한쪽이 충만했다.

“영주님! 영주님!”

그 소식을 듣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말이다.

“영주님! 큰일 났습니다!”

벌컥, 침실의 문이 열렸다.

은백색 갑옷에 장검을 든 기사 한 명이 숨도 고르지 못하고 재빠르게 달려왔다.

“큰일?”

“…그게.”

눈치껏 메리가 주변에 있던 가신들을 모두 물리고 문을 닫았다.

방 안에 오직 네 사람만이 남자, 그제야 기사가 한쪽 무릎을 꿇고 공작을 바라봤다.

“…레온 공자님이 주검으로 발견됐습니다.”

“…뭐라고? 지금 뭐라 말했지, 헤리스?”

“죄송합니다, 영주님. 숨을 거두신 지 세 시간은 지난 듯했습니다.”

누군 살고, 누군 죽고.

운명의 장난은 늘 그렇게 비상식적이다.

레브가 무심한 표정으로 인간들의 신파를 지켜볼 때였다.

“잠깐, 뭐라고? …누가 죽어?”

레온.

레온 몬데이어라면 이 공작가의 후계자가 아닌가?

‘이 공작가의 후계자는 8년 뒤 후계식 날 살해당해야 하는데?’

내 기억이 달라져선 안 된다.

이제 남은 건 내가 죽기 전 남긴 나의 메모리아 라피스뿐이었다.

인어들은 그 기억으로 검은 사냥개들을 피해 다녔다.

그들이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또 얼마나 잔인한 방식으로 인어들을 사냥해 왔는지.

‘내 기억에 의존해 피하고 있을 텐데… 기억이 달라져선 안 돼.’

검은 사냥개 놈들이 어디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 이상 섣불리 움직일 순 없다. 그러니까.

이 가문의 후계자는 반드시 8년 뒤에 죽어야 한다.

해주 인어의 기억대로!

“어서… 어서 가보셔야 합니다, 영주님.”

레브가 털썩, 주저앉았다.

“메리, 레브를 부탁하지.”

“…예. 예, 영주님.”

시작부터 꼬여 버린, 아니 어쩌면 꼬인 상태에서 시작된 것일지도 모르는 제 새로운 운명이 너무도 가혹했다.

‘젠장, 일단… 미래가 변하는 것부터 막자.’

레브가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 빌어 처먹을 상황이 부디 꿈이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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