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문가의 지표자-2화 (2/133)

2화

1장. 몬데이어 공작가(2)

“직접 가봐야겠어.”

내내 주저앉아 있던 레브가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가, 같이 가요!”

메리가 화들짝 놀라 그런 아가씨의 뒤를 따랐다. 계속해서 울음을 참느라 새빨간 코를 감추지도 못한 채였다.

‘대체 왜 기억이 달라진 거지? 8년 뒤 죽어야 할 자식이 왜 지금 죽어버린 거냐고.’

안내에 따라 이 몬데이어 공작가의 후계자인 레온 공자의 거처에 다다랐다.

메리가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방 안엔 오직 두 사람, 루시오 공작과 기사 헤리스만이 머무르고 있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 네가 대가를 치른 게지, 레온.”

루시오 공작이 중얼거렸다.

레브는 흘긋, 그의 손길 아래 쓰러져 있는 레온을 바라봤다.

“네가… 결국 죽어 버렸구나.”

내심 모든 게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길 바랐다.

그저 누군가가 상황을 잘못 전한 것일 뿐, 모든 게 원래대로 흘러가길 기대했단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은백색 머리칼과 똑같은 안색의 레온 위로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푸른 천이 뒤덮이는 것을 봤다.

‘진짜 죽었네, 너.’

레온은 죽었다. 이 몬데이어 공작가의 후계자는 인어들이 알고 있는 바다의 기억과 달리 죽고 말았다.

고작 가치 없는 인간 하나가 죽었다고 좋아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 녀석이 죽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이란 말이야.’

8년 뒤, 후계식에선 레온 공자가 수많은 축하를 받으며 공식적으로 폰네시의 후계자로 인정받게 된다.

동북부 폰네시는 서대륙 내에서 가장 중요한 힘의 주축이었다.

데로니스 왕조와 그 연합 세력에 대항할 수 있는 가장 거대한 세력이자, 가이아 왕조를 복위시킬 수 있는 구심적 역할을 하는 명문가.

하나 그 후계식에서 데로니스 세력이 레온을 살해하며, 이성을 잃은 루시오는 곧장 수도 덴버그를 향해 전군을 이끌고 달려간다.

분노를 참지 못한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 행동 하나로 수많은 인간이 목숨을 잃고, 데로니스 왕조는 서대륙을 손에 넣게 된다.

‘이 일로 우리는 기회를 얻지. 도망칠 기회.’

그러니 달라져선 안 되는 일이기도 했다.

인어들에게 혼란을 줄 순 없다.

“헤리스, 대사제를 부르고 영면식을 준비해라.”

“대사제는 현재 덴버그로 떠났습니다. …아가씨의 의식을 되찾을 방법을 찾기 위해 떠난 지 보름 정도가 지났습니다.”

되돌아오려면 그보다 배는 더 걸리는 일정이었다.

루시오가 레온의 주검 앞에 무릎 꿇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죽은 아이의 영면조차 바랄 수 없다니.

“아, 아가씨?”

줄곧 상황을 지켜보던 레브가 발걸음을 옮겼다. 쓰러진 레온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 창백한 얼굴을 제대로 살피며 물었다.

“정말 죽은 게 맞아요?”

“…그래.”

“어째서요? 왜 갑자기 죽어 버렸는데요?”

“…레온은 평소에도 몸이 좋지 않았잖니.”

급사한 건가. 정말이지 하찮은 인간의 생명력이었다.

“슬프겠지만 대사제가 오는 대로 영면식을 치러줄 거란다. 마지막으로 인사를 건네렴, 레브.”

루시오가 자리를 비켜주었다.

워낙 우애가 좋았으니 마지막을 기억할 만한 순간이 필요하다 판단했다.

손을 뻗어 낯선 레온의 얼굴을 무심하게 매만졌다.

“…….”

어째서 8년 뒤 살해당해야 할 인간이 벌써 죽어 버렸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레온이 여기서 이렇게 죽어버리면 8년 뒤 일어나야 할 일들이 무산되고, 그 뒤 바다의 기억이 뒤틀린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많이 닮았네요, 나랑.”

미래가 변하게 두어선 안 된다.

내가 남긴 기억에 의존해 검은 사냥개들을 피해야 하는 인어들에게 혼란을 줄 수는 없었다.

과거로 돌아온 지금, 당장은 검은 사냥개들을 찾아내 죽일 수 없다.

그것보다 우선할 건 얼마 남지 않은 인어를 지키는 일이었다.

“아버지, 선택을 하셔야겠어요.”

“…선택?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냐?”

운명은 반드시 해주의 기억대로 흘러가야 한다.

인어가 초상화 속 여자아이와 똑 닮은 레온을 보다 천천히 그 위에 푸른 천을 뒤덮었다.

그러곤 루시오 공작, 기사 헤리스, 유모 메리 부인을 차례대로 바라보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이 폰네시의 후계자를 잃으실지, 아니면 저를 잃으실지.”

레온 몬데이어는 반드시 8년 뒤에 살해당해야 한다.

그래야 전쟁이 일어나고, 그 전쟁으로 이 폰네시가 불바다가 되며, 모두의 죽음 위에 세워진 데로니스 왕조는 결국 바다의 기억대로 역사를 만들어갈 테니 말이다.

“지금부터 제가 레온 몬데이어로 살겠어요.”

그 안에 검은 사냥개들을 찾아낸다면 모를까.

더 이상 나 때문에 인어들이 죽게 내버려 둘 수 없다. 내 과오를 반복하진 않을 거야.

“그러니 부디 선택하세요. 제가 선택한 미래를.”

그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만큼 간절한 목소리였다.

***

“…전 정말 이게 옳은 일인지 모르겠어요.”

레온의 거처.

시신을 레브의 거처로 옮겨두고 난 후 레브, 아니 레온이 욕실 한가운데에 서서 커다란 전신 거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서 아가씨께서.”

유모 메리 부인이 울상을 짓고 본래의 몸보다 한 품은 더 큰 남자 의복을 입혀주었다.

옷 속에서 허리 끝까지 구불거리는 탐스러운 은백색 머리칼을 빼내주고 나니 마음이 더욱 울적했다.

“정말 이러셔야겠어요, 아가씨?”

제 가슴께 남짓의 작고 왜소한 아가씨가 앞으로 남자로 살아가겠다니?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런 선택을 한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직 되돌릴 수 있어요. 굳이 그러시지 않아도 되잖아요.”

“내가 왜? 가치로 따지면 있으나 마나 한 이 어린애보다 폰네시의 후계자가 더 중요한 거 아니야?”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세요? 누가 그렇게 생각한다고요.”

그딴 건 중요하지 않다.

충격에 빠진 메리를 뒤로하고 다시 전신 거울 앞으로 향했다. 그러곤 미리 준비해 두었던 단검을 들었다.

“난 레온으로 살 거야. 번복은 없어. 루시오 공작도 허락한 일이니 더 이상 시끄럽게 굴지 마.”

이 폰네시의 후계자 정도라면 사냥개 놈들의 정체를 알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레온이 망설임 없이 길고 탐스러운 은빛 머리칼을 잘라냈다.

어깨와 간신히 맞닿을 정도로 짧아진 머리칼이 레온의 발치에 떨어져 내렸다.

“맙소사….”

메리가 털썩, 주저앉았다.

한평생 제 손으로 내내 빗고 정돈해준 머리칼이 저토록 볼품없이 짓밟힐 줄이야.

“울지 마.”

레온이 단검을 내려두고 메리에게 다가갔다.

작은 몸을 숙여 늙은 눈동자를 마주하고 나니 제 얼굴이 비칠 정도로 많은 눈물이 고여 있다.

이게 그렇게 울 일인가? 난 인어를 살리는 선택을 하는 거다.

내 동족을 위해 인간 따위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게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도 생각하지 마. 좀 대충 살란 말이야.”

어차피 8년 뒤면 모두가 죽고 없을 테니.

레온이 툭툭, 메리의 어깨를 몇 번 토닥인 뒤 몸을 바로 세웠다.

남자의 옷을 입은 모습은 정말 레온과 똑 닮은 것처럼 보였다.

“대사제가 돌아오기 전까지 난 이 방에서 한 발자국도 안 나갈 테니 그동안 메리가 수고 좀 해.”

대사제가 돌아오고 나면 썩어 문드러진 레브 몬데이어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게 레브가 아니고 진짜 레온이란 건 조금 전 이 방에 모여 있던 세 사람을 제외하곤 아마 그 누구도 모를 테지.

“후계자가 죽었다는 걸 알게 되면 폰네시가 위험에 처할 거예요.”

“연합 세력이 이 땅을 노리고 있다는 걸 아시잖아요. 그들이 이 일을 빌미로 쳐들어오면 어쩌죠?”

“그것만은 막게 해주세요. 제 목숨보다 이 폰네시의 영지민들 목숨이 더 귀하지 않으신가요?”

서대륙은 동북부 폰네시 지역을 빼놓고는 대부분 새로운 왕조, 데로니스에 충성을 맹세했다.

전대 왕조와의 의리를 지키는 몬데이어 공작가만이 이 폰네시를 내어주지 않고 치열하게 싸운 끝에 겨우 휴전 협정을 끌어내 대치 상태를 유지 중이었다.

“사방이 적이에요. 적들에게 빌미를 주지 마세요.”

누가 들으면 진심인 줄 오해할 만큼 정말 간절한 목소리였다.

루시오 공작은 어린 딸이 이런 결단을 내렸다는 걸 믿을 수 없는 눈치였다.

다만 그건 자신이 고민하고 있던 문제였다.

후계자를 잃게 되면 세력을 보태고 있는 주변 영주들의 마음이 흔들릴 것이다.

연합군과 맞설 세력을 키우기 전까지 그 어떤 약점도 보일 수 없었다.

“내가 하루빨리 네 이름을 되찾아주마. 그때까지만 레온으로 살아다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그런 일을 막자고 귀찮음을 감수하는 거니까.

난 그저 멸문까지 남은 8년 동안 내 기억을 지키기만 하면 된다. 검은 사냥개 놈들을 추적하며.

‘놀고먹는 공자가 되면 몰래 조사하기도 쉬워지겠지.’

애써 이 망할 인간 도련님으로 열심히 살아줄 필요 따위는 없다.

“나 좀 쉴게. 메리도 이만 가서 쉬어. 아무도 들이지 말고.”

“예, 아가… 아니, 도련님.”

적응이 필요할 것이다.

레온이 시무룩한 메리를 뒤로하고 서재로 향했다.

내부는 얼마 전까지 진짜 레온이 머물렀던 흔적으로 가득했다.

‘일단 내가 알고 있는 사실들을 적어두자.’

아직 기억이 그대로긴 하지만 언제 이 기억이 사라질지 모른다.

바다를 떠났고, 인어의 몸이 아닌 데다 모든 게 불확실한 상황이니.

게다가 부분적으로 흐릿한 기억도 존재했다.

“음.”

레온은 낯선 책상에 앉아 그보다 더 낯선 깃펜을 들었다.

적을 만한 것을 좀 찾아보자 웬 종이 뭉치가 보였다.

“…이게 뭐지?”

단단한 가죽으로 감싼 뭉치들을 풀어내자 글씨가 빼곡했다.

어머니의 영면소에 다녀오기 위해 길을 나선 레브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에 의해 납치당했다.

침묵의 기사단은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지만 이는 분명 거짓이다. 분명 그들 중 누군가가 레브를 위험에 처하게 만들었다.

레브가 위험하다. 이번에는 겨우 살렸지만 다시 또 죽을지 모른다.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레브를 지켜야 한다.

“이번엔 겨우 살렸지만? …목숨?”

진짜 레온이 남긴 기록이었다.

자세한 지형지물을 적어둔 것은 물론 침묵의 기사단을 지켜봐야 한다는 분명한 메시지까지 있었다.

“이것도 좀 알아볼 필요가 있겠는데. 내가 왜 이 망할 인간 세상에 휘말린 건지도 알아내야 하니까.”

레브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건지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레온은 가죽 뭉치를 서랍 깊은 곳에 잘 보관해두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우선은… 기록부터 남겨놓자.”

바다의 기억과 다른 일이 언젠가 또 일어날지 모른다.

섣부른 변화를 막아야 한다.

검은 사냥개들을 발견하기 전까진 기억하고 있는 대로 운명이 흘러가도록 모든 변수를 철저히 제어해야 했다.

인어들이 믿을 건 오직 나 하나뿐이다.

지금 과거가 뒤틀려 함부로 400년 뒤 미래가 변하는 일만큼은 조심해야 한다.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까.’

레온이 세 시간 남짓 제 기억을 모두 적어놓는 데 집중하는 동안 해가 완전히 저물었다.

“아가씨, 주무세요?”

잠자리를 봐주러 왔던 메리가 조심스레 서재 문을 열었다.

책상에 엎드려 곤히 잠든 짧은 머리칼을 보자니 입꼬리가 묵직하게 내려갔다.

“아가씨도 참.”

도련님이라고 불러야 하는데 쉽지 않다.

메리는 조심스레 열린 창문을 닫아주며 레온의 어깨 위에 따뜻한 담요를 덮어주었다.

“좋은 꿈꾸세요, 아가씨.”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게 달라질 것이다. 여자로서 남자 행세를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테니까.

메리가 수천 년 동안 잠들지 못했던 레온의 머리칼을 넘겨주며 조심조심 서재를 빠져나왔다.

오늘 밤만큼은 편히 쉴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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