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2장. 운명(1)
보름 뒤.
폰네시 궁성에서는 불의의 사고로 끝내 목숨을 잃은 공녀, 레브 몬데이어의 영면식이 거행됐다.
차마 가신들에게조차 보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시신은, 직계 가족인 루시오 공작과 레온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면을 맞이했다.
‘8년 뒤에 네 이름을 돌려주지.’
진짜 레온이 가문의 휘장에 둘러싸여 영영 돌아오지 못할 바다 너머로 흘러가는 것을 보며 안심했다.
바다의 기억대로 일이 진행됐으니 앞으로 8년만 조심하면 된다.
‘그 안에 방법을 찾아보겠어. 라피스를 들키지 않고 인어들을 지킬 만한 방법을.’
그리고 그날부터였을까.
몬데이어 공작가의 가신들은 완전히 달라진 레온 공자를 마주하게 됐다.
“…도련님께서 충격이 크셨나 봐.”
“어쩔 수 없지. 아무래도 두 분의 우애가 남다르셨으니까.”
그간 공부도, 수련도 열심이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레온은 레브의 영면식이 있던 그날부터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가신들을 놀라게 했다.
“근데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하루아침에….”
“그렇지? 정말 다른 사람 같으셔.”
“여기서 뭣들 하는 거야?”
“헉, 유모님!”
“죄, 죄송합니다. 저희는 그저….”
의복도 단정치 않고, 늘 아프다며 머리를 싸매고 드러누워 혼자만의 생각에 골몰했다.
게다가 후계자로서 늘 궁성을 지키던 것과 달리 틈만 나면 놀러나가기 일쑤였다.
또 평소 다정하던 모습과는 어찌나 반대인지. 공자는 쓸데없는 일로 가신들에게 화를 내는 일이 잦았다.
작은 일도 세심하게 챙겨주던 이전과 달리 레온은 저를 제외한 타인에게 극도로 무심했다.
“입들 조심해.”
아가씨가 도련님인 척 다른 이름으로 살고 있으니, 메리도 고민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이상함을 가신들이 의심하게 두어선 안 됐다.
“그간 힘드셨잖아. 그토록 사랑하던 여동생인데. 곧 원래대로 돌아오실 테니 다들 성심성의껏 도련님을 모시자.”
“…네, 유모님.”
하지만 당연하게도 레온의 행태는 금방 돌아오지 않았다.
7년 뒤.
“공자님, 대기사 이렌트께서 오셨습니다.”
“어, 다시 가라고 해.”
“예? 하지만 검술 수련은….”
“안 해.”
어차피 죽을 텐데 그런 게 뭐가 필요하다고.
“공자님, 기마 훈련을 받으실 때입니다.”
“싫어, 안 해.”
그래 봤자 써먹을 데도 없다.
말을 타고 전쟁에 나갈 것도 아닌데, 내가 왜?
“공자님, 예법 수업을….”
“공자님, 고대 역사 수업….”
“공자님….”
그 외에도 수많은 공자 타령이 있었지만 레온은 전혀 듣지 않았다.
그런 걸 할 시간 따위 없었다.
후계자 수업을 착실히 받아가며 어느 세월에 검은 사냥개를 찾는단 말인가.
‘문제는 허송세월을 보냈단 건데.’
레온이 모두를 물리고 중정 한쪽에 마련된 간이 침대에 몸을 뉘였다.
‘금방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검은 사냥개 놈들은 모든 흔적을 지우고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자취를 감췄다.
움직이지 않으니 찾을 수가 없다. 생각처럼 되지 않는 상황에 레온은 쉽게 예민해졌다.
“메리, 길라엔 언제쯤 출발하지?”
“도련님… 그게, 이번 길라행은 영주님께서 취소하셨어요.”
“뭐?”
레온이 벌떡 일어났다.
그 모습에 부채를 부치고 볕을 가려주던 가신들이 황급히 서너 발자국 정도 떨어졌다.
성질 나쁜 공자에게 잘못 걸리면 그날 하루는 고달파진다.
“길라행이 왜 취소돼? 왜 가지 말라고 하시는데?”
“그야… 곧 있으면 도련님의 탄일이니까요.”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영주님께선 도련님이 폰네시에서 탄일 축제를 보내시길 바라세요.”
지금 누구 탄일을 위해 날 못 가게 막는 거야?
인상을 찌푸리고 얼굴 위로 쏟아진 머리칼을 쓸어 올린 레온이 금세 몸을 뒤돌렸다.
누가 봐도 루시오 공작에게 쳐들어가 불만을 토로할 기세였다.
“가서 직접 확인하겠어.”
한낮의 피크닉이 이르게 끝났다.
내내 땡볕에 서 있던 가신들은 뒤쳐질세라 빠른 걸음의 레온 뒤를 바짝 쫓았다.
늙은 메리도 하는 수 없이 레온을 뒤따랐다.
‘길라엔 꼭 가야 하는데.’
근방에 마지막 실마리가 있다.
“아버지를 뵈러왔어.”
공작의 집무실을 지키고 있던 기사 헤리스가 고개 숙여 레온에게 인사를 건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터운 문이 무겁게 열리고 레온은 루시오 공작과 마주했다.
“아버지.”
“그래, 레온.”
널찍한 응접 소파로 나선 루시오가 뿔난 레온을 기다리며 미소 지었다.
왜 왔는지도 이미 알고, 왜 화가 났는지도 모를 수가 없었다.
“길라 여행이 취소되어 화가 난 모양이구나, 레온.”
“빛 속에 잠긴 길라를 보러 가는 건 제 인생 목표 중 하나였어요.”
그럴싸한 이유였다. 인간을 설득하기 위해선 이딴 낭만적인 조건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래, 전에도 한번 말한 적이 있었지 분명.”
“지난번에 여쭸을 땐 허락해 주셨잖아요. 왜 며칠 새 마음이 바뀌신 거예요?”
길라는 데로니스 왕조에 속하지 않은 동부의 영지로, 엔드해와 밀접한 해안 도시였다.
엔드해의 끝에 그곳이 있다.
인어족의 멸망이라 할 수 있는, 검은 사냥개들의 총공세를 버텨내지 못했던 인어섬이.
‘그곳을 확인해 봐야 하는데.’
그 섬이 마지막이다.
흔적도 없고, 존재도 찾을 수 없는 놈들을 추적할 수 있는 건 이제 그곳이 유일했다.
“레온, 네게 할 말이 있다.”
그때 루시오가 문을 지키고 선 헤리스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유모 메리를 제외한 모든 가신들이 집무실 밖으로 나가 자리를 비웠다.
“네 탄일을 맞아 중요한 손님들이 우리 폰네시를 찾아올 예정이다.”
“중요한 손님이요? 대체 그게 누군데요.”
“타세트의 항해단.”
“타세트라면….”
들어본 적이 있다. 옛 가이아 왕조와 대대로 동맹 관계를 유지했던 바다 위의 유랑 민족이다.
말이 유랑 민족이지, 그들이 이끄는 함대는 한 왕국을 방불케 할 정도로 그 규모가 대단했다.
‘근데 왜 갑자기 튀어나왔지?’
레온이 머릿속으로 재빨리 기억을 훑었다. 몬데이어 공작가와 그들이 엮였단 사실은 그 어디에도 없는데.
“그들이 왜요? …제 탄일에 왜 오는데요?”
부루퉁하게 입을 내밀고 있던 레온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지난 7년간 이 세상은 단 하나도 다름없이 제 기억대로 흘러갔다.
지금 이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힘을 실어 주겠다고 약속했어. 그들과 힘을 합치면 데로니스 왕조를 무너뜨리고 다시 가이아 왕조를 세울 수 있다, 레온.”
루시오가 손을 뻗어 레온의 짧은 머리칼을 만졌다.
어느새 열아홉, 아니 열일곱이 된 아이는 대륙에서 제일가는 외모를 가질 만큼 아름답게 피어나 있었다.
더 이상 죽은 이의 신분을 뒤집어쓰고 거짓된 삶을 살아가게 둘 수는 없었다.
“너도 이제 네 이름을 되찾아야지, 레브.”
글쎄 그럴 필요 없다는 데도!
레온이 벌떡 일어섰다.
집무실에 남아 있는 세 사람이 모두 놀란 눈으로 레온을 바라봤다.
“…레온?”
이대로 폰네시가 타세트의 항해단과 손을 잡고 가이아 왕조를 다시 세운다면, 바다의 기억은 말 그대로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그렇다면 인어들의 운명도 보장할 수 없게 되겠지.
‘아직은 안 돼. 놈들이 어디 있는지 찾아낼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해.’
인간들의 운명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다. 가이아 왕국이 다시 세워지건, 데로니스 놈들이 이 폰네시를 잡아먹건 상관없단 말이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인어들은 빛 하나 들지 않는 심해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기억에 의존해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며.
“제 탄일엔 지켜보는 시선도 많을 거예요. 왜 하필이면 그날이죠?”
레온이 생각에 잠긴 척 넓은 집무실을 거닐었다.
탄일은 당장 열흘 뒤다. 이대로 그들이 들이닥친다면 대비할 시간이 없다. 어떻게든 머리를 굴려야 했다.
“모두가 이 폰네시를 찾는 날이잖니. 정체를 숨기고 들어오기에 그보다 더 명분 있는 날은 없다, 레온.”
“그래서 더 위험하죠. 명분 있는 날이니, 데로니스에서 더욱 주시하고 있을 테니까요. 그들이 이미 여기 와 있잖아요?”
레온의 탄일을 축하하기 위해 데로니스에서도 사절단을 보냈다.
레브의 죽음 이후 무려 7년 만에 성문이 열린 행사였다. 그들이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그러니 더욱 방심하고 있을 테지. 난 더 이상 눈치만 보고 있을 순 없다.”
방심한 순간 뒤통수를 갈라 짓밟을 것이다.
레온이 루시오의 결연한 표정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진지한 푸른 눈동자로 그에게 간청했다.
“예감이 좋지 않아요. 너무 이른 것 같아요. 조금만 더 신중하게 결정하시는….”
“네 마음은 고맙다만 그들은 이미 폰네시에 와 있다, 레온.”
“벌써요…?”
“너무 걱정 마라. 네 탄일엔 항상 좋은 일이 일어났으니까.”
루시오 공작이 레온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좋은 일은 개뿔. 난 진짜 레온도 아닌데.
“가보렴. 탄일 준비를 해야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양어깨를 짓누르는 듯했다.
***
이대로라면 한 것도 없이 미래가 달라질 가능성이 컸다.
거처로 돌아온 레온이 불안하게 주변을 돌아다니자 메리가 눈썹을 늘어뜨렸다.
“길라행이 취소되어서 많이 속상하세요, 도련님?”
저 성질머리에 오늘 밤을 그냥 보내실 것 같지는 않고.
메리가 레온이 좋아하는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둘 준비하며 까탈스러운 공자님을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하긴, 그동안 왕래가 막혀 있었으니 이번 기회를 놓친 건 저도 아쉽게 생각해요.”
“…….”
“하지만 앞으로 시간이 많잖아요. 태양의 절기는 매년 돌아오고 길라는 사라지지 않을 테니 말이에요.”
제대로 헛다리짚은 늙은 메리가 레온의 어깨를 토닥였다.
“게다가 저것 좀 보세요.”
그녀가 골난 공자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테라스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탄일을 축하하기 위한 축포가 밤하늘에 펑펑 흩날리고 있었다.
레온이 고개를 돌려 그 의미 없는, 빛나는 쓰레기를 바라볼 때였다.
불현듯 머릿속에 그럴싸한 계획이 스쳐 지나갔다.
“메리, 오늘부터 매일 축제가 열린다고 했지?”
“예, 도련님.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 폰네시를 찾아왔어요. 그들에게 제대로 베풀어야죠.”
그래, 축제가 있다.
분명 데로니스 왕조에서도 축하 사절단을 보냈다고 했지?
레온이 수많은 인파로 가득한 바깥을 살폈다.
방구석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나 잠깐 나갔다 와야겠어.”
“지금요, 도련님?”
“그래, 지금 당장.”
왜 갑자기 미래가 변할 만한 일이 생긴 건지 알아봐야 했다.
다만 함부로 행동할 순 없다.
인간들의 작은 움직임 한 번에 인어들은 모조리 이 세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으니까.
‘내 일을 그르칠 셈이야, 루시오?’
직접 살펴보고 크게 운명이 변할 만한 상황이라면 대책을 준비해야 했다.
“그러면 저도 준비할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도련님.”
“아니, 나 혼자 갈 거야.”
“예? 절대 안 될 일이에요. 혼자 밖에 나갈 때마다 여기저기 다쳐서 돌아오시잖아요!”
“그게 메리가 다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어머.”
“얌전히 있어. 이제 늙었는데 건강 잘 챙겨야지, 메리.”
레온이 메리의 어깨를 토닥였다.
챙겨주는 척하지만 그 속에 담긴 말의 뉘앙스가 어째 협박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메리가 눈물을 꾹 참고 멀어져가는 레온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레온이 손을 붕붕 흔들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거처를 나섰다. 왜인지 신이 나 보이기까지 했다.
“다녀올게!”
“다치시면 안 돼요, 도련님! 꼭이요, 꼬옥!”
앞으로 일어날 일 같은 건 꿈도 못 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