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2장. 운명(2)
폰네시의 궁성 밖을 이 저녁에 홀로 돌아다니는 건 놀랍게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주변에 혹 누군가가 따라붙었을지도 모르지만.
레온이 재깍 몸을 돌려 뒤쪽을 살폈다. 메리에게 질 나쁜 협박을 던져놔서 그런지 아직까진 아무도 없는 것 같다.
‘루시오의 뜻을 꺾으려는 건데 가신들을 줄줄이 달고 갈 순 없잖아.’
밤이 찾아오고 어둠이 짙게 하늘을 물들인 동안에도 폰네시의 광장은 수많은 인파로 가득 차 있었다.
무려 7년 만에 열린 성문이다.
지난 영면기 동안 레브를 추모하기 위해 루시오는 성문을 닫고 영지를 다스려 왔다.
이처럼 수많은 인파가 폰네시를 찾고 활기를 되찾은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데로니스 놈들을 찾아야 해.’
후계자의 탄일 축제를 맞아 성문이 개방됐고, 공식적으론 독립 영지인 폰네시에 축하 의사를 건네기 위해 데로니스에서도 사절단을 보냈다.
레온은 그들을 찾아야만 했다.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이쪽은 타세트랑 한 패 먹고 뒤통수치기 직전인데.
레온이 후욱, 긴 앞머리를 불어 넘겼다.
루시오 공작이 이렇게 나올 줄 몰랐다. 적당히 가이아 왕조를 위하는 척하고 도리만 다하는 줄 알았더니, 정말 데로니스 놈들과 맞붙을 생각이었다.
‘섣부르게 움직여선 안 돼. 가장 중요한 사건이니 신중해야 해.’
이 폰네시가 데로니스 놈들에게 넘어가는 건 인어족의 운명 중에서도 꽤 중요한 사건이었다.
사냥개들을 찾았다면 모를까 당장은 변수를 차단하는 일이 급하다.
‘그래야 인어들이 몸을 숨길 수 있을 테니까.’
이 서대륙은 레온 몬데이어가 죽고 전쟁이 발발하며 오랫동안 타오르게 된다.
인어들은 그때를 틈타 사냥개들의 시선을 피했고 깊은 심해로 도망칠 수 있었다.
그런 기회를 함부로 날릴 순 없는 노릇이다.
‘뭘 할 수가 없네. 개자식들, 어디 숨은 거야?’
레온은 데로니스 사절단에게 이 정보를 흘릴 생각이었다.
문제는 만나야 정보를 흘리든가, 상황을 파악하든가 둘 중 하나를 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도대체 어디 있지?’
레온이 눈앞에 펼쳐진 난장판을 바라봤다.
휴전 중에 맞이한 축제답지 않게 영지민들은 경계를 아예 풀고 손님맞이에 정신이 없어 보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동북부의 팔 할을 차지하는 거대한 영지, 폰네시와 엮이고 싶은 건 고작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자자자! 오늘 밤은 이 주인장 맘대로 모두 공짜!”
“다들 어서 오세요! 내일 아침에 우리 가게 홍보 좀 많이들 해주고!”
요릿집 주인 내외가 호객 행위를 하기 시작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손님들이 모두 그곳으로 몰려들었다.
어어, 하는 사이에 레온도 그들과 뒤섞였다.
인파에 휩쓸려 내부에 들어서고 나니 어느새 눈앞에 호두 절임과 포도주가 내어져 있었다. 나 술 못 마시는데.
“호호,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걸 보니 그쪽도 중앙에서 온 …그분들인가 봐요?”
그때 종업원이 알아서 안주를 내오며 흘긋, 레온을 살폈다.
“예?”
레온이 정체를 숨기기 위해 챙겨 입은 복장은 조금 전 그들과 비슷했다. 구분하기 어려운 행색이었다.
절기와 맞지 않는 복장 하며, 정체를 숨기기 위해 애써 뒤집어쓴 후드가 특히 그랬다.
뭐, 어쩌다 혼자 떨어져 나온 건진 모르겠지만… 어리숙한 걸 보니 사뭇 그럴 듯했다.
그녀가 불쌍한 낙오자를 위해 힌트를 주었다.
내일도 이곳으로 끌어들일 만한 호의가 필요했다.
“동료들은 데릴의 여관으로 돌아갔어요. 아직 식사 전이라면 마저 먹고 어서 가보세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누가 누굴 찾아?”
“음? 중앙에서 온… 그러니까 그, 사절단… 아니에요?”
양 갈래 머리를 한 종업원이 쟁반을 내려놓고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혹시 엿듣고 있는 자가 있나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레온이 종업원에게 손을 뻗어 단박에 손목을 붙잡아 가까이 끌어당기니, 그녀가 토끼처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중앙에서 온 자들?”
“…그러니까… 덴버그… 어… 저는 그분들 일행인 줄 알고요. 아니라면….”
덴버그는 서대륙 중앙에 위치한 수도의 지명이었다.
그곳에서 온 자들이라면 데로니스의 사절단을 말하는 것이리라.
“아, 그런 거라면.”
레온이 겁먹고 제 실수를 마무리 짓지 못한 그녀에게 미소 지었다.
후드 아래 얼핏 보이는 아름다운 얼굴이 환하게 웃자 내내 눈치만 보던 종업원도 천천히 미소를 되찾기 시작했다.
수천 년 묵은 인어에게 인간들을 다루는 일이란 숨 쉬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실수가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우리의 정체를 알고 있는 걸 그렇게 떠드는 건 불편한 일이라.”
“아, 확실히 그러실 테지요. 제가 부주의했습니다. 흠흠.”
“휴전 기간이긴 하지만 반길 이들보다 경계할 사람들이 더 많지 않겠습니까? 무례를 용서하시오.”
레온이 톡톡, 종업원의 손목을 토닥이며 이내 의자를 물렸다.
예상치 못한 수확이었으나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데릴의 여관에 모여 있다고?
“조만간 보답은 후하게 하지.”
루시오에게 금화를 잔뜩 받아 건네주면 될 일이다.
레온은 벽면에 놓여 있던 포도주 병을 집어 들고 서둘러 요릿집을 나섰다.
‘그나저나 배짱도 좋네, 데로니스 놈들.’
그들이 광장 한가운데 위치한 고급 여관에 묵고 있다는 건 꽤나 열 받는 일이었다.
그곳은 궁성이 곧잘 보이는 위치였다.
무시하려 했지만 7년간 부대끼고 살아온 시간을 완전히 없었던 듯 취급할 순 없었다.
‘아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상관도 없는 인간들 따위.’
쓸데없는 생각이다. 불쾌하고 불편한 기분이었다.
레온이 한껏 인상을 찌푸리며 걷는 동안 어느새 여관 앞에 도착했다.
규모 있는 고급 여관답게 정문엔 일반 용병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그들이 매서운 눈길로 레온을 살폈다. 받은 만큼 일하려는 모습이 감동스럽기까지 했다. 일단 우겨볼까.
“다들 그 소식 들었어? 이 앞 유명한 요릿집에서 오늘 밤 모든 음식을 값도 받지 않고 제공한다더군.”
종업원이 오해할 만큼 행색이 비슷하니, 정신을 잘만 빼놓는다면 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레온이 취한 척 비틀거리며 정문으로 다가섰다.
일 잘하는 용병이 잠시 경계하는 눈빛으로 레온을 살폈다. 그러니 다른 생각 따윈 들지 못하게 서둘러야 했다.
“오늘은 내가 마지막 출입일 테니 이만 가서 즐기라고. 적군지를 돌아다닐 만큼 다들 생각이 없진 않으니 말이야.”
툭툭.
레온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용병은 잠시 의심하는가 싶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직전에 출입했던 일행들이 동료가 오면, 그땐 쉬어도 좋다고 명한 덕이었다.
“어느 방에 묵으십니까. 많이 취하신 것 같으니 그곳까지 모시겠습니다.”
“아냐, 그럴 것 없어. 이래 봬도 들어가서 한 병을 더 할 참이거든.”
레온이 요릿집에서 챙겨온 포도주 병을 들어 올렸다. 안에서 찰랑이는 경쾌한 소리가 용병들에게도 똑똑히 전해졌다.
비틀거리며 허허실실 웃고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자 등 뒤로 어느새 나무문이 닫혔다.
레온은 고요가 내려앉은 여관 내부를 둘러보며 금세 표정을 굳혔다.
‘최대한 침착하게 움직이자.’
다행히 모두 개인 정비를 하는 모양인지 접견실과 휴게실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레온이 단단히 후드를 뒤집어쓰고 오래된 나무 계단을 밟아 올랐다.
복도 너머 문틈에서 은은한 불빛이 보이는 곳으로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서신만 두고 오면 돼.’
레온은 약간의 파장만 일으켜 데로니스 놈들에게 여지를 줄 생각이었다.
폰네시의 움직임이 수상하다는, 바다 쪽을 집중해서 살펴야 한다는 딱 그 정도의 의심.
레온이 적어온 서신을 문틈 아래에 숨겨두곤 주변을 살폈다.
내일 아침에 저들이 이 정보를 발견한다 하더라도 당장 손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하나 타세트의 항해단과 폰네시가 손을 잡으리란 정보를 알게 된 순간부터 그들은 궁성을 향해 촉각을 곤두세울 것이다.
‘루시오에겐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어.’
폰네시를 빼앗기는 것보다 인어들의 멸망이 더 뼈아팠다.
레온이 컴컴한 어둠 속에서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 내부엔 일렁이는 빛마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주변이 정말 고요했다. 까딱 잘못했다간 숨 쉬는 소리마저 들킬 정도로 아무 소음도 없었다.
‘저기로 나가자.’
여관 복도엔 외부 계단과 이어지는 쪽문이 있다. 이곳을 찾아올 때부터 눈여겨보았다.
레온이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겼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아 일이 제법 수월했다.
바깥을 지키고 있는 용병과 마주치지만 않는다면 계획대로 모든 게 끝나리라.
레온이 눈앞으로 바짝 다가온 문을 열기 위해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엔드해 부근의 르테르 섬까지 추적해 보았으나 별다른 흔적은 찾지 못했습니다.”
…르테르?
복도의 가장 끝 방에서 들려오는, 귀를 사로잡는 단어에 레온이 멈추어 섰다.
“녀석들은 물 밖으로 반드시 모습을 드러낸다. 행적을 놓친 지 오십 년쯤 됐으니 그 주기가 됐어.”
“요새는 인어들에 대해 알고 있는 자가 아무도 없으니, 소문을 좇는 것도 쉽지 않네요.”
“그래, 우리 손에 넣기 위해선 우리를 제외한 그 누구도 몰라야 하니 말이야.”
두 사람의 낮은 목소리가 고요한 복도 밖으로 새어 나왔다.
레온이 멍하니 서서 그들이 지껄이는 이야기에 대해 떠올렸다.
르테르는 인어섬 근처의 작은 숲으로 이루어진 섬이었다. 저곳에 있는 이들이 인어를 안다.
즉, 인어를 쫓고 있다.
‘검은… 사냥개?’
하지만 이곳엔 데로니스의 사절단들뿐이라고 했는데.
‘설마. 녀석들이 검은 사냥개인 건가?’
지난 수천 년간 인어족을 사냥하고, 인어들의 라피스를 파괴한 자들이 지금… 이곳에 있나?
레온의 푸른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이곳에 검은 사냥개들이 있다.
죽지도 못하는 한평생을 그날에 갇혀 살게 만든 그 개자식들이 바로 이곳에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려야 해.’
이제 중요한 건 기억을 뒤바꾸지 않는 것 따위가 아니었다.
운명적으로 놈들의 실마리를 찾았으니 뭐라도 해봐야 한다.
‘들키면 안 돼.’
레온은, 아니 인어는 감정적이지 않았다.
순간적인 기분에 못 이겨 일을 그르칠 만큼 수많은 시간을 헛살지 않았다.
두 주먹을 꽉 움켜쥐고 애써 고개를 돌렸다.
데로니스가 검은 사냥개들과 연관이 있다. 어쩌면 다른 존재가 아니라 같은 이들일지도 모른다.
판단보다 중요한 건 이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었다.
‘아직 그 일이 일어나기 전이야. 내가 막을 수 있어.’
이곳에서 검은 사냥개들을 없앤다면, 미래에 그 일이 벌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공격하는 자가 없기 때문에 죽는 자도 없겠지. 검은 사냥개들만 없앨 수 있다면 인어들도 살아 숨 쉴 수 있다.
‘돌아가야 해, 궁성으로.’
그 개자식들이 데로니스 왕조와 연관이 있는 거라면, 지금 그 누구보다 제게 필요한 건 루시오의 분노였다. 그리고 폰네시의 힘이었다.
레온이 바깥과 연결된 문고리를 붙잡았다.
재빨리 문을 열어젖히자 내내 억눌렀던 가쁜 숨이 터져 나왔다.
“…하!”
드디어 바꿀 수 있다. 그 비극을 내 손으로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레온이 쿵쿵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좁은 외부 계단을 향해 뒤도는 순간이었다.
“볼일은 끝났나.”
뒤편에서 낯선 목소리가 이어졌다.
레온이 눈동자만 돌려 제 목에 겨누어진 날카로운 검날을 살폈다.
그 서슬 퍼런 검이 점차 턱 선을 타고 후드를 벗겨냈다.
“레온 몬데이어?”
후드가 벗겨지며 어둠 속에서도 환한 레온의 머리칼이 드러났다.
몬데이어의 상징인, 그 은백색 머리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