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문가의 지표자-6화 (6/133)

6화

2장. 운명(4)

루시오 공작이 궁성의 정예 호위 기사들 중 실력 있는 자 몇을 꾸려 레온에게 보냈다.

라피스의 활기로 몰라보게 좋아졌지만 아직까지 거동이 어려운 레온을 위한 배려였다.

“다들 검술 실력이 최강이라지.”

넓은 레온의 거처엔 모두가 처음 와봤다.

그러니까 레브 몬데이어의 영면식 이후로 근거리에서 공자를 마주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경들끼리 싸워 겨룬다면 누가 반드시 이기지?”

자존심 강하고 자부심 넘치는 기사들이 그런 걸 쉬이 털어놓을 리가 없었다.

다만, 레온의 속엔 수천 년 묵은 인어의 영혼이 들어 있다.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숨결이나 스치는 눈동자의 움직임만으로도 분위길 읽을 줄 알았다.

‘저자군.’

폰네시의 상징인 은백색 갑옷에 푸른 망토를 걸친 자.

기사들 중 가장 키가 컸으며, 상당한 미남자로 대륙에선 흔치 않은 금발 머리가 은백색에 가깝게 빛났다.

“처음 보는 얼굴이 있군. 몇 가지 물어야겠어.”

그자를 제외한 기사들이 안도한 듯 작게 미소 지었다.

공을 세운 전적이 수두룩하니 아무렴 방구석 후계자라도 저들의 명성을 알아주는 것이 못내 뿌듯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 검술을 배웠지? 침묵의 기사단엔 언제 들어왔고.”

“저와 겨룬 모두에게 배웠습니다. 기사단엔 5년 전 들어왔습니다.”

그자의 대답에 기사들은 또 한 번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루시오 공작과 최후의 협곡 전쟁에서도 함께 겨뤄 이긴 자들이었다.

다만, 그런 노련한 기사들이 모두 실력으로 저자에게 뒤진다는 것을 티 냈다.

근데 어째서 이름을 모르겠지?

레온이 의문을 품는 것 같자 그의 곁에 서 있는 기사가 자애롭게 설명을 덧붙였다.

“이자는 영주님의 명으로 엔드해를 따라 지난 5년간 정찰을 다녀왔습니다.”

“정찰? 그곳에서 뭘 정찰했나.”

“말할 수 없습니다.”

대화를 듣던 기사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허업.”

“이럴 수가.”

아무리 어려도 눈앞에 서 있는 자는 이 폰네시의 후계자였다.

앞으로 모셔야 할 주군이 되는 건 이미 정해진 수순.

노련한 기사들이 당황하여 금발의 젊은 기사를 다그치려 한 순간, 레온이 손을 내저었다.

“됐어.”

루시오 공작의 명이었다면 타세트의 항해단과 접촉했을 것이다.

그는 내내 가이아 왕조를 복위시키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었다. 최측근에게도 숨길 정도로 은밀했다.

‘그런 일을 맡길 정도라면 상당한 실력자란 뜻이겠지.’

레온이 시선을 거뒀다.

그리고 제 거처에 찾아와준 기사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바라봤다.

“나를 위해 목숨을 내걸라 한다면 경들은 모두 기꺼이 명예를 걸고 나를 지켜줄 겁니다. 그걸 아시니 아버지께서도 경들을 내게 보내주신 거겠죠.”

레온이 그들을 향해 예를 갖춰 인사를 건넸다.

공자의 인사를 받은 기사들의 눈동자가 하나둘 휘둥그레졌다.

“하나 아버지와 함께 세운 경들의 공이 너무도 크고, 앞으로 해야 할 더욱 중요한 일들이 많으니 내가 시간을 빚질 순 없을 것 같군요.”

그들의 얼굴에 당혹감과 뿌듯함이 함께 뒤섞였다.

소문대로 막무가내 철부지일 줄만 알았더니 보여주는 모습은 그와 거리가 멀었다.

“경들은 앞으로도 아버지의 곁에서 이 폰네시를 지켜주시오.”

“여, 영광입니다, 공자님.”

“온 명예를 걸어 이 폰네시를 지킬 것입니다!”

기사들과 인사를 나눈 레온이 시선을 돌렸다.

가장 왼쪽, 우뚝 서 있는 금발 머리의 기사가 운명을 직감한 듯 레온을 바라봤다.

“경은 나를 지키고.”

어설픈 풋내기는 필요 없다.

내게 필요한 건 최고의 실력자이다.

***

레온의 앞으로 따뜻한 차 한 잔이 내어졌다.

메리는 이 방 안에 낯선 남자가 출입하자 불안을 감출 기색이 전혀 없어 보였다.

“메리.”

쉬지 않고 눈앞에 앉은 기사를 노려보기에 결국 레온이 손을 들어 메리를 뒤로 물렸다.

하여간 메리 때문에 다 들키게 생겼다.

“이름은?”

“워렌 라일리입니다.”

“나이는?”

“스물다섯입니다.”

아마 검술 수련이나 기마술을 배웠다면 마주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후계자 수업은 개나 줘버린 지 오래됐으니, 이 젊은 기사를 만날 기회가 없었던 건 당연한 일이다.

“그래, 불만은 없고?”

타세트의 항해단과 접촉할 정도였다면 루시오의 아래서 꽤 중요한 일을 도맡았단 뜻이다.

한낱 어린애를 졸졸 따라다니며 목숨을 내걸고 싶진 않았을 터.

워렌이 여전히 정면을 바라보며 짧게 고개를 내저었다.

“없습니다.”

“생각보다 솔직하지 못하네. 하루아침에 내게 충심이 생긴 것도 아닐 텐데.”

곁에 두고 오래 쓸 만한지 알아봐야 했다.

레온이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찻잔 뒤에 날카로운 푸른 눈을 감추고 워렌을 살폈다.

“왜 불만이 없지?”

제 두 배는 될 듯한 탄탄한 체구와 이목구비의 주장이 상당히 강력한 얼굴은 꽤나 잘 어우러진다.

신이 정성 들여 빚어낸 듯 잘난 얼굴은 그 물음에도 전혀 미동이 없었다.

“저는 지켜야 할 것을 지킵니다.”

워렌은 고민하지 않았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새 주군이 된 레온에게 답했다.

“저는 루시오 공작 저하의 명을 따릅니다.”

“이제 넌 내 호위 기사야.”

“상관없습니다. 그분이 공자님을 지키라 하셨으니, 단지 그 명을 지킬 뿐입니다.”

“뭐? 지금 말 다 했어?”

뒤에 서 있던 경계심 가득한 메리도 삐끗해 쟁반을 놓쳤다.

어이가 없다. 기사가 이래도 되는 건가?

“야, 네 목숨은 이제 내 거거든? 너 방금 나한테 명예를 바쳤잖아.”

조금 전 제 앞에서 무릎을 꿇고 검을 내민 의식은 무어란 말인가.

레온이 어이없이 바라보자 워렌이 짧게 고개를 숙였다.

“명예는 바쳤으나 목숨은 지난날 공작 저하에게 이미 맹세했습니다.”

“뭐가 다르지?”

“공자님을 위해 목숨은 걸 수 있지만, 그건 그저 공작 저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야!”

어디서 저런 구황 작물 답답이가 굴러왔는지 모르겠다.

“됐어. 너, 나가.”

“예, 나가 보겠습니다.”

“뭐?! 아니, 내 말은.”

레온이 뭐라 더 말하려던 입을 꾹 다물고 워렌을 바라봤다.

워렌은 명이 떨어지지 않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충심이 다른 데에 있는 사람치곤 무척이나 충성스러운 모습이었다.

“됐다. …알았으니까 넌 앞으로 내 목숨이나 지켜.”

“예, 알겠습니다.”

“그래. 빨리 가버려, 너.”

레온이 서둘러 워렌을 내보냈다.

화가 좀 가시고 나자 머릿속이 또다시 바삐 돌아가는 걸 느꼈다.

‘저런 답답이만 가지곤 부족한데.’

방구석에 앉아 가만있다고 알아낼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다. 아무리 수천 년을 산 경험치가 있다 해도 그건 한낱 인어의 기억이다.

인간들의 세상을, 오직 이 세계만 정확히 알고 있는 자가 필요했다.

‘내 두 눈과 귀가 되어줄 사람이 필요해.’

이곳에 검은 사냥개들이 있다. 그들의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또 데로니스 왕조와는 얼마나 깊이 엮여 있는지 확인이 필요했다.

게다가 공작 부인이 죽은 것 역시 의심스러웠다.

라피스를 빼앗겼다고 했지? 알아볼 게 아주 많다.

레온이 메리에게 손짓했다.

“아버지를 뵈러 가야겠어.”

“지금요, 도련님?”

“응, 급한 일이야.”

“하지만 아직 거동이 불편하시잖아요. 안 돼요, 도련님.”

“그러니까 부축해 달란 소리잖아.”

레온이 서 있는 메리의 팔을 억지로 잡아끌고 무게를 실었다. 가자는 눈빛으로 메리를 노려봐도 어째 움직이질 않는다.

“뭐 해, 안 가?”

“그러니까 가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요. 도련님이 직접 걷지 않아도?”

“응? 내가 안 걷고 어떻게 가?”

메리가 눈을 좁게 뜨고 레온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주름진 그 녹색 눈동자 안에 비친 갈망이 무엇인지 분명히 전해졌다.

‘그, 그놈한테 업히라고?’

레온이 메리를 거세게 밀어내고 단호하게 고갤 저었다.

“좋은 말 할 때 입 다물어, 메리.”

“하지만 기사님께선 다리도 기니 영주님께 가는 시간도 단축될 거예요! 제가 불러올까요?”

“됐다고, 진짜!”

한 방에도 못 있게 하더니 아주 비밀을 들키라고 고사를 지내는 게 분명하다.

하는 수 없이 레온이 절뚝이며 문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코앞에서 대기 중이던 워렌이 곧장 몸을 돌려 고개 숙였다.

“모시겠습니다, 공자님.”

“됐으니까 저 멀리 떨어져.”

“호호호! 도련님도 참!”

메리가 서둘러 뿔이 난 레온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이유 없이 성질머리를 마주한 워렌만이 눈을 깜빡거릴 뿐이었다.

***

곁을 지킬 기사는 제 안목으로 골랐지만 대신 두 눈과 귀, 머리가 되어줄 이를 찾는 건 더욱 중요한 문제였다.

레온은 응접 소파에 앉아 루시오와 이야길 나누었다.

“아버지께 곧 있으면 다가올 탄일 선물을 청하러 왔습니다.”

포도주 한 잔을 마셔 넘기던 공작이 두 눈을 크게 떴다.

레온이 후계자의 신분을 새로 얻게 된 후부터 탄일을 그리 중하게 여기지 않았던 탓이다.

“그래, 따로 원하는 게 있는 거냐, 레온?”

“있습니다.”

“말해 봐라. 네가 원하는 건 뭐든 해줄 테니 말이다.”

편하게 앉아 있던 레온이 자세를 바로 했다.

늘 심통 난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리던 얼굴도 한결 진지해졌다.

“제게 사람을 주십시오.”

“…사람?”

“세상 이치에 밝고 생각이 깊어 언제든 제게 해답을 줄 수 있는 사람 말입니다.”

레온이 진지하게 청하자, 루시오도 깊은 생각에 잠겼다.

“과연 네 곁에도 그런 이가 필요할 때가 되었구나.”

인재를 내어주는 건 당연한 일이다. 레온의 곁에 그런 인재가 있다면 분명 힘을 보태줄 수 있을 것이다.

하나, 그 전에 분명히 확인해야 할 게 있다.

“네게 사람이 왜 필요하지?”

그간의 행태로 보아 레온이 쓰임 있게 곁에 두고 잘 활용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사람을 주는 건 그 사람의 운명을 뒤바꾸는 일이다. 공연히 가벼운 욕심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레온이 푸른 눈동자로 루시오를 응시했다.

“저 이제 진짜 후계자가 되어 보려고요.”

그간은 시늉만 했다. 레온 몬데이어란 이름만 걸치고 노력 하나 없이 운명대로 죽길 기다렸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끊임없이 죽이고 싶던 존재들이 이 세상에 실재한다는 걸. 그들을 쳐부수기 위해선 레온 몬데이어의 허울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도.

“저 이제 진짜 레온 몬데이어가 되려고 해요, 아버지.”

검은 사냥개들을 모조리 없애기 위해선 제게도 힘이 필요했다. 그러려면 폰네시가 무너지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이대로 데로니스 놈들에게 처참히 짓밟힐 순 없다.

일부든, 전부든.

검은 사냥개들과 연관이 있단 걸 안 이상 데로니스 역시 무너뜨려야 할 대상이었다.

“앞으로 아버지에게 힘이 되어 드릴게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존재로서.”

살아났으니 살아가야 했다.

죽지 않고 또 살아버렸으니 죽기 전까지 레온 몬데이어로서 반드시 살아남아야 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이 폰네시의 후계자로서 데로니스와 대적할 것이다.

“그러니 제게 사람을 주세요.”

인어들을 지키기 위해 나를 지킬 사람들이 필요했다. 완벽하게 내 편이 되어 힘을 보태줄 사람들이.

“그들이 결국 아버지의 힘이 되어줄 겁니다.”

편하게 놀고먹다 죽기는 정말 다 글렀군.

“그게 제 유일한 바람입니다.”

이젠 거짓말도 어렵지 않다.

레온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다가올 운명을 받아들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