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3장. 탄일(1)
누가 깨우지도 않았는데 눈을 떴다.
아직 푸르스름한 새벽녘에 정신을 차린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레온은 머리맡에 놓인 미지근한 물 한 잔을 마시며 고요한 침실을 둘러봤다.
메리는 한 시간 뒤에나 일어날 것이다. 깨울까 하다 그간 나이 많은 메리에게 너무 가혹했던 것 같아 관뒀다.
“…….”
레온이 기다란 로브를 하나둘 벗어두고 해수가 들끓는 욕조 안에 몸을 담갔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바닷물을 가까이하면 하루가 편안했다. 정신도 맑아지는 것 같고.
레온이 짧은 목욕을 마치고 커다란 전신 거울 앞으로 향했다.
“…이제는 숨길 길이 없겠어.”
레온, 아니 이 몸에 주인인 레브의 나이도 어느덧 열일곱이 됐다.
시간이 흐른 만큼 몸도 점차 여인과 닮아갔다. 작고 왜소한 체구 탓에 비밀을 숨기는 데 큰 불편함이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점차 선이 얇아지는 얼굴은 날이 갈수록 아름다워졌다.
“이건 가릴 수도 없고.”
몸이야 두꺼운 옷과 헐렁한 로브로 가릴 수 있다지만 얼굴은 불가능하다.
레온이 거울 가까이 얼굴을 살폈다. 역시 사내다움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냉한 얼굴을 더욱 딱딱하게 굳혔다. 억지로라도 인상 쓰지 않으면 천사가 따로 없는 외모였다.
‘이제 더 조심해야 돼.’
오늘은 아버지가 보낸 부집사를 처음 만나는 날이다.
이틀 앞으로 다가온 제 탄일을 맞아 축제거리를 살펴보기 위한 외부 일정도 잡혀 있었다.
게다가 근거리에서 줄곧 지켜보는 호위 기사도 생겼다.
‘정신 똑바로 차리자.’
메리와 놀고먹으며 시간이나 때우던 날과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레온이 단단한 가죽으로 제 상체를 가리고, 그 위에 늘 입던 대로 헐렁한 의복을 걸쳤다.
공작가의 자제가 입을 만한 차림이라곤 생각할 수도 없게 볼품없는 행색이었다.
“도, 도련님! 언제 일어나셨어요?”
그때 메리가 황급히 욕실 안으로 들어섰다.
머리를 가릴 새하얀 두건도 정돈하지 못한 채 급하게 숨을 골랐다.
“준비를… 다 하셨네요? 왜 절 깨우지 않으시고요.”
아직 젖어 있는 은백색 머리칼을 내맡겼다.
메리는 작은 빗을 들어 천천히 레온의 머리를 빗기기 시작했다.
“이제부턴 내가 해야지. 언제까지 메리의 시중을 받을 순 없잖아.”
“제가 아니면 누가 해요, 도련님.”
“공식적으론 열아홉인걸.”
머리칼을 빗어 내리는 손길이 더뎌졌다. 거울에 비친 주름진 입가도 가늘게 떨렸다.
레온은 눈을 감고 설명을 덧붙였다.
“게다가 남자고.”
“…하긴, 그렇네요. 곧 있으면 성년이 되실 텐데, 언제까지 제 손길로 보살펴 드릴 순 없겠어요.”
“그래, 메리.”
때마침 모든 준비가 끝났다.
테라스 밖 하늘도 점차 채도 없는 빛을 보이고 있었다.
“식사하러 가자. 오늘은 바쁠 테니 빨리 움직여야겠어.”
“…예, 도련님.”
레온이 빠른 속도로 걸음을 내디뎠다.
***
탄일 축제를 맞은 폰네시는 활기가 넘쳤다.
지난 7년간 레브를 잃은 영면식의 여파로 모두가 축제를 즐기지 못한 영향이 컸다.
아주 오랜만에 닫혀 있던 성문을 열고 폰네시 주변, 데로니스 왕조에 속하지 않은 크고 작은 영지의 손님들을 맞이하며 도시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나저나 죽을 맛이군. 광장에서 기다려야 하다니.’
레온이 위험을 감수하고 이곳에 나온 건 새로 얻은 부집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네게 줄 이는 디카르테 가문의 사람이다.”
“지난 3년간 서대륙을 모두 돌아다니며 주변 정세를 살폈지.”
“마침 네 탄일 축제가 시작되는 날 폰네시로 돌아온다고 하니, 직접 맞이해주면 좋겠구나.”
툭툭 어깨를 두드리던 아버지의 손길에선 압박 같은 게 느껴졌다.
하는 수 없이 레온은 돌아오는 부집사를 맞이하기 위해 뙤약볕 한복판에서 대기 중이었다.
“주변을 좀 살펴볼 테니 기사들 중 하나를 대기시켜 놓도록 해.”
“예.”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이곳에서 마냥 기다릴 순 없지.
레온은 더위에 약한 메리를 데리고 광장의 그늘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상인들은 포도주를 마시며 노래를 부르거나 저들끼리 이야길 나누느라 바빠 보였다.
오랜만에 맞이한 축제로 모두 장사는 뒷전이었다.
“도련님, 덥지 않으세요? 후드는 벗으셔도 될 텐데요.”
메리의 우려에도 레온은 제 머리칼을 숨겼다.
귀찮은 건 딱 질색이다. 영지민들이 탄일의 주인공을 가만 내버려둘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사냥개도 있고.
‘며칠이 지나도 부고 소식이 들리지 않아 이곳을 떠나지 못했겠지.’
목숨을 노리는 이가 있는데 친절하게 정체를 드러내고 돌아다닐 순 없는 노릇이다.
레온은 다시 한번 은백색 머리칼과 얼굴을 후드 아래 숨기고 시원한 요릿집에 자리를 잡았다.
“뭐라도 시켜. 좀 앉아 있게.”
“예, 도련님.”
레온이 다리를 꼬고 앉아 생기로 가득한 광장을 눈에 담았다.
데로니스군과 휴전 중이란 사실을 전부 잊은 것처럼 밝고 그늘이 없어 보였다.
하긴, 20년간 긴장 속에 살았으니 모두가 오늘을 즐길 만했다.
‘여기 있는 이들 중 과연 몇이나 살아남을까.’
레온의 예정대로 후계식에서 살해당한다면, 루시오는 그 즉시 데로니스군과의 휴전을 종료하고 덴버그를 향해 돌진하게 된다.
그리고 데로니스군과 연합 세력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주인이 떠난 폰네시를 탈환하며 이 전쟁을 끝내겠지.
그 과정에서 전부가 죽는다.
적어도 레온이 알고 지낸 모두가 말이다.
이제 그 운명은 정말로 제 선택에 달려 있었다. 이제는 어떻게 하면 살해당하지 않을지 고민해야 했다.
“그나저나 그 철부지에게 폰네시가 넘어갈지도 모른다니 걱정이군.”
“이봐, 말조심하라고. 지금은 그 철부지의 탄일 주간이니 말이야. 하하하!”
나를 두고 하는 소리다. 역시 없는 데서 나누는 뒷담이 가장 재밌는 법이지.
레온은 못 들은 척 여유롭게 찻잔에 고개를 처박고 콧노래를 불렀다.
“지금이야 우리 위대하신 루시오 공작께서 버티고 계시지만 말이야.”
“그분도 곧 신의 품에 안겨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지.”
“듣자 하니 센느 쪽이 좀 수상하다던데. 데로니스 왕조에 붙으려는 게 아닐까?”
“센느? 그 촌구석이라면 그럴 만도 하지. 북부의 황량함을 이겨낼 방도가 어디 하늘에서 뚝 떨어지겠나?”
센느는 폰네시 위쪽에 위치한 북부 소영지로, 데로니스와 손잡지 않은 채 방치된 영지 중 한곳이었다.
“폰네시에 의존하는 것도 한두 해지 무려 스무 해가 지났어.”
“하나뿐인 후계자란 자가 저 모양이니 미래를 논할 가치가 없지.”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였다.
인근 소영지가 데로니스에 굴복하지 않고 휴전 협정에 동의한 건 모두 폰네시를 믿기 때문이었다.
그런 와중에 하나뿐인 후계자가 놀고먹으며 훗날을 대비하지도 않으니 걱정이 될 만했다.
‘판단이 제법이군.’
레온은 남 일을 듣는 듯 쓸데없이 그들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시간만 아까웠다.
“차라리 공녀가 살아 있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지.”
“그래! 여인이라면 그 미모를 보는 재미라도 있으니 말이야.”
순간 내내 평온하던 레온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뚫린 입이라고 말을 제멋대로 하네.
옷매무새를 다듬고 일어나자 주변이 고요해졌다.
레온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뭐지?”
후드 아래 그들의 얼굴이 모두 보였다.
오랜만에 맞이하는 축제를 방해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말이야. 아무리 내 앞길을 내가 훼방 놨다고 해도 남들이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게 있는 법이다.
“궁금하군. 그렇게 떠들어대다니.”
“뭐야. 어디 어른 말하시는 데 껴들….”
“폰네시도 데로니스 왕조에 고개를 숙여야 한다고 생각하나?”
낮게 내려앉은 목소리에 그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위협적인 행동은 없었지만 이상하게 긴 후드를 뒤집어쓴 꼬맹이에게선 위압감이 느껴졌다.
“아니, 뭐….”
대답을 기다리는 유령 같은 푸른 눈이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들이 우물쭈물 눈치를 보다 결국 성질처럼 대답을 내놓았다.
“딱히 그건 아니지만! 폰네시도 대세에 편승하길 바라는 건 당연한 일이지.”
“데로니스건, 가이아건! 우리에게 중요한 건 그저 폰네시가 무너지지 않는 것뿐이다, 이 말이야!”
“우리가 높으신 분들 땅따먹기 하는 걸 어찌 막지? 그런 것보다 당장 아름다운 아가씨를 눈에 담는 게 더 중요하지 않나!”
“그래, 맞아! 죽은 공녀의 미모가 저 먼 남부 슐츠까지 소문이 자자했지?”
확실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
레온은 아무 대꾸도 없이 테이블로 돌아갔다. 평소의 성정대로 테이블을 뒤엎으시나 했더니만.
메리가 아쉬운 눈으로 레온을 바라볼 때였다.
레온이 무표정한 얼굴로 워렌의 검집에서 검을 단숨에 빼들고 그들을 향해 검을 겨눴다.
“좋은 날이니 이번 한 번은 헛소리를 못 들은 걸로 해주지. 하지만 다음에 한 번만 더 내 동생을 입에 올리는 날엔.”
레온이 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계속 감춰져 있던 은백색 머리칼이 어깨 끝에서 찰랑이고, 차갑게 내려앉은 레온의 눈동자가 그들을 모두 응시했다.
“영면 따윈 다음 생에나 바라게 만들어주마.”
***
레온을 알아보지 못한 모든 이가 그의 발치에 엎드렸다. 쉽게 군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공자님이라 알아볼 턱이 없었다.
게다가 소문과도 달랐다. 실제로 가까이서 마주한 이 폰네시의 후계자는 그보다 위엄이 있는 듯했다.
“공자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어디서 모두 지켜보고 있었는지 부집사가 상황을 정리하고 나섰다.
모여 있던 이들을 전부 물리고 처음 보는 워렌을 통해 주변의 경계를 강화할 것을 지시했다.
레온은 조금 전 그곳에 똑같은 포즈로 다리를 꼬고 앉아 부집사를 만났다.
“브라운이라고.”
“예, 브라운 디카르테입니다, 공자님.”
이름처럼 갈색 머리가 유난히 진한 사람이었다.
곱실거리는 짧은 머리칼을 보며 레온이 서늘한 표정으로 턱짓했다. 용케 알아들은 브라운이 예의를 차리고 맞은편에 앉았다.
“이곳에서 만나기로 아버지께 청한 건 네 뜻이겠지.”
“과연 간파하셨군요. 맞습니다, 공자님.”
눈이 휘어지게 웃은 브라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오가 광장에서 부집사를 맞이하라 했을 때부터 눈치챈 일이었다.
비밀이 들킬까 전전긍긍하는 아버지가 사람 많은 곳에 억지로 등을 떠밀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내가 저들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하나?”
오늘 이곳에서 들은 이야기는 그저 몇몇의 생각이 아니었다. 적어도 이곳에 모여 있던 대부분은 동의하는 다수의 의견이었다.
레온이 자세를 풀고 브라운에게 가까이 고개를 내렸다.
맑게 웃고 있던 브라운의 표정이 잠시간 멈칫했다.
“현실을 직시하라고 날 여기다 데려다 놨어?”
코앞으로 보이는 레온의 표정엔 그 어떠한 분노도 없었다.
그저 동의도 없이 이런 상황을 만든 브라운이 가소로울 뿐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운명을 바꿔 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인간의 모습이 우습기만 했다.
“저는 앞으로 제 모든 걸 걸고 공자님을 보필할 테지만, 모두가 저처럼 공자님에게 조건 없이 전부를 걸진 않을 겁니다.”
브라운이 코앞에 다가온 레온을 빤히 바라봤다.
오늘 이곳에서 레온이 무엇을 느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무턱대고 의견을 무시하는 자가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확실히 알았다.
브라운이 곧장 의자를 물리고 일어났다.
그리고 저를 노려보는 레온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공자님께서 그렇게 되게 만드셔야죠.”
영지민들이 전부를 걸어 폰네시를 지키고 스스로를 지키도록.
결국 레온이 가야 할 방향은 그쪽이었다.
“제가 그렇게 되도록 돕겠습니다, 공자님.”
브라운이 짧게 고개 숙여 레온을 향해 충성을 맹세했다.
“웃기지도 않는군.”
누가 도대체 뭘 어떻게 돕는단 말인가. 저희들 운명도 모르는 주제에.
“유흥은 끝났어. 궁성으로 돌아간다.”
레온이 다시 커다란 후드 아래 은백색 머리칼을 숨기고 뒤돌았다. 아주 빠른 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