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3장. 탄일(2)
갑작스레 아주 바빠졌다.
하루 앞으로 다가온 탄일 연회도 골치가 아픈데, 쓸데없는 말을 들어 괜히 신경이 쓰였다.
“브라운.”
“예, 공자님.”
궁성으로 돌아온 레온은 조용한 곳에서 다시 브라운과 마주했다.
불필요한 짓을 했다는 건 분명했지만, 그 과정에서 브라운이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는 대강 파악했다.
돌다리도 제 확신이 들어야만 두드려 보는 인간.
아주 치밀하고 똑똑한 부류의 사람이란 뜻이었다.
“센느에 대해 아는 바가 있어?”
조금 전 상인들이 나눈 이야기가 신경 쓰였다. 그냥 무시하고 말 법한 주제는 아니었다.
센느는 황량한 북부 지역 중에서도 가장 별 볼 일 없고 규모가 작은 영지였다.
그들의 중요도는 데로니스도, 폰네시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하나 그건 모르는 소리다.
“서대륙을 돌아다니는 동안, 데로니스가 세력을 넓히기 위해 인근 소영지를 압박하는 모습을 많이 봤습니다, 공자님.”
브라운은 그간 보고 들은 세상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서대륙은 데로니스 세력인 중앙, 서부, 남부를 모두 합친 것만큼 동북부의 영향력이 큰 곳입니다.”
북부 쪽으로 갈수록 길게 늘어지는 지형이라 면적만으로 놓고 보면 폰네시의 규모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게 문제였다. 주변 영지를 모두 흡수하고 세를 넓혔지만, 동북부를 손에 넣지 못하면 데로니스도 서대륙의 패권을 장악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센느를 손에 넣으려 하는 거겠죠. 그곳을 북부의 거점으로 삼아 우리를 압박하기 위해서요.”
“내 생각도 그래.”
놈들은 북부 위에서부터 치고 내려올 작정인 것이다.
레온이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 둔다면 데로니스가 코앞까지 다가올지도 모른다.
‘그럼 날 죽이기도 쉬워지겠지.’
그들이 북부까지 진출하는 걸 막아야 한다.
검은 사냥개 놈들에게 복수도 못 했는데 무참하게 살해당할 순 없다.
‘북부엔 발도 못 붙이게 해주겠어.’
결국 그러기 위해선 센느가 데로니스 손에 넘어가는 걸 막아야 했다. 다음 할 일이 정해졌다.
“브라운, 센느에서 온 사절단 대표가 누구지?”
“토바 가문의 삼남 덴 공자입니다.”
“그에 대해 조사해 와. 하나도 빼놓지 말고.”
“예, 공자님.”
브라운이 짧게 인사하고 사라졌다.
***
잠을 깨운다고 창문을 열어놓고 자서 그런가. 레온은 목이 따끔거리는 것을 느꼈다.
곧이어 메리가 단장을 돕기 위해 들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 도련님. 안색이….”
“좀 피곤해서 그래.”
“연회의 주인공이신데 이런 몰골은 안 되죠. 어서 이리 오세요.”
입씨름을 할 기운도 없다. 레온은 얌전히 메리가 시키는 대로 머리를 빗고 단장을 시작했다.
“참, 오늘은 특별한 의복이 준비되어 있어요.”
“필요 없어. 불편한 건 딱 질색이라니까.”
“오늘은 안 돼요. 재단장이 내공을 갈아 넣은 드레스 코트란 말이에요.”
이번 연회는 레브의 영면식 이후 처음으로 열리는 특별한 날이었다.
지난 7년간 추모를 위해 모든 축제를 금하고 성문을 닫았기에 폰네시 주변의 수많은 세력이 오늘만을 기다려 왔다.
“그런 연회에서 주인공인 도련님이 입으실 의상이니 심혈을 기울일 수밖에요.”
“…쓸데없이.”
그렇다고 이런 자리에서 외곽 지역의 자유인들이나 입을 만한 넝마를 입고 나설 순 없었다.
레온은 하는 수 없이 메리의 독촉에 못 이겨 두 팔을 벌렸다.
“아무래도 달라붙는 옷은 처음이시니 준비가 필요할 듯해서요. 숨 좀 참으세요.”
여인의 몸을 가리기 위해선 단단한 사슴 가죽이 필요했다.
평소였다면 한 겹 정도로도 충분하겠지만 오늘은 다르다. 몸 선이 드러나는 의상이다 보니 더더욱 몸집을 부풀려야 했다.
“윽… 메리, 숨이 안 쉬어져.”
“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메리가 몇 겹의 사슴 가죽으로 레온의 몸을 꽁꽁 조이기 시작했다.
이 더운 날 거친 가죽으로 몸을 감싸니 아주 죽을 맛이었다.
“자, 거의 다 됐습니다.”
“…날 죽일 셈이야?”
“인간은 이런 걸로 쉽게 죽지 않아요!”
레온의 안색이 파리해졌을 때 메리가 드디어 드레스 코트를 레온에게 입혀주었다.
은백색 머리칼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새하얀 복장은 눈이 부실 듯 레온의 안색을 밝혔다.
“자… 정말 마지막입니다.”
재단장이 신체 치수를 측정했다면 문제없겠지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결국 메리가 옆구리 쪽에 줄줄이 달린 끈을 온 힘을 다해 홱, 조여 매달렸다.
“으윽!”
그간 참고 있던 레온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도련님, 괜찮으….”
쾅!
그때 엄청난 소음과 함께 거처의 문짝이 날아왔다.
“괜찮으십니까.”
“고, 공자님!”
“에구머니나! 세상에!”
메리가 화들짝 놀라 레온을 껴안았다. 떨어져 나간 문짝에서 먼지가 폴폴 피어올랐다.
레온은 문짝을 부수고 달려든 워렌과 그 옆에 멍하니 서 있는 브라운, 그리고 제 등에 고개를 묻은 메리를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뭐 하는 짓들이야.”
레온의 목소리가 낮게 내려앉았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이 짓은 워렌 기사께서 단독으로 벌인 일입니다.”
“그, 그렇죠, 아무래도? 전 내내 도련님과 함께 있으니까요.”
예상치 못한 일을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공자였다.
메리와 브라운이 재빨리 책임 소재를 분명히 했다.
“워렌.”
“예.”
워렌이 짧게 대답했다.
“비명을 듣고 문을 부순 거야?”
“그렇습니다.”
지켜야 할 것을 지킨다더니.
비명이 들려 위험을 감지했고, 그랬기에 가장 빠르게 확인을 위한 조치를 취했다.
레온은 워렌을 탓할 생각이 없었다. 다만 매번 이런 식이라면 곤란하다. 딱히 비밀을 들키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
“거처에 있는 동안 위험이 닥치면 네 이름을 부를게. 그러니 이곳에 들어오기 전엔 딱 3초만 참아.”
“예, 명심하겠습니다.”
화낼 기운도 없네.
레온이 달라붙은 시선을 모두 무시하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연회장으로 가자.”
모든 준비를 마친 레온이 예민한 표정으로 발길을 돌렸다.
브라운이 가는 동안 레온에게 오늘 모인 인원들 중 신경 쓸 만한 무리를 설명해 주었다.
“동쪽의 여러 영지에서 자제들을 사절 대표로 보냈습니다. 특히 길라의 크루네 가문 장자는 공자님과 또래이니 친목을 다져두시면 도움이 될 겁니다.”
“그… 피타 도련님과는 어렸을 적 종종 자주 만나신 사이니 아무래도 더 반가우시겠죠?”
브라운이 말을 마치자 곧바로 메리가 레온에게 주의를 주었다.
피타 크루네는 레온과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다.
그러니 처음 보는 사이처럼 굴었다간 의심을 살 게 분명했다.
“그래, 정신이 없을 것 같으니까 다가오면 미리 알려줘.”
“예, 공자님.”
오늘부터 3일간 연회가 시작된다. 레온은 그동안 계획에 필요한 여러 사람들을 만나볼 생각이었다.
“들어가자.”
드디어 연회장에 도착했다.
한 달을 내리 준비한 성대한 탄일 연회에 주인공이 입장을 앞두고 짧게 숨을 몰아쉬었다.
‘불편해 죽겠네.’
수천 년을 산 영혼이라고 해도 긴장이 되는 것을 막긴 어려웠다.
레온은 남장을 한 후로 처음 달라붙는 옷을 입어 신경이 쓰이는 것을 느꼈다.
사슴 가죽을 몇 겹이나 덧대어 입어 숨이 잘 안 쉬어지고, 눈앞이 팽팽 도는 것도 상황을 안 좋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그래도, 가야겠지.
“몬데이어 공작가의 후계자이자, 이 폰네시의 영광! 레온 몬데이어 공자께서 입장하십니다!”
가신이 쾅! 발을 구르고 집중을 모았다.
레온은 양옆으로 활짝 열린 문을 지나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
“…….”
일순 연회장이 고요해졌다.
여러 곳에서 소소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모두가 입장하는 레온을 바라보다 넋을 잃었다.
온 세상이 레온을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과연… 신이 주신 선물이 틀림없습니다.”
“내 태어나 저토록 잘생긴 얼굴은 본 적이 없소.”
사람들의 떠들어대는 목소리가 예민한 레온의 귀에도 닿았다.
그들은 새하얀 드레스 코트를 입고 바르게 걸어오는 레온에게 완전히 압도당했다.
“어쩜….”
“실로 이 서대륙에서 제일가는 외모를 가졌군요.”
지난 7년간 공식적으로 레온이 수많은 사람 앞에 모습을 드러낼 일은 전혀 없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레온을 처음 보는 이들도 수백이나 되었다.
“신도 질투할 얼굴입니다.”
“가까이서 한 번만 보면 소원이 없겠어요.”
체구가 왜소하기는 했으나 오히려 그게 잘 어울렸다. 머리칼 하나부터 피부결까지 레온을 구성하는 그 모든 게 짜 맞춘 듯 완벽했다.
레온이 걸을 때마다 가문을 상징하는 암청색 사파이어가 조명을 반사시켰다.
회장에 모인 모두가 꿀꺽, 침을 삼키고 레온이 단상에 오르는 모습을 지켜봤다. 실로 그림 같은 움직임이었다.
“아버지.”
“왔구나, 레온.”
눈앞이 어지러웠다. 아무래도 옷을 좀 손보는 게 좋겠는데.
레온이 표정을 숨기고 루시오의 곁에 서서 시선을 돌렸다.
수많은 이들이 보였다. 폰네시에 보호를 청하기 위해 온 자들이, 또 그런 폰네시를 경계하기 위해 몰래 숨어 들어온 자들이.
“폰네시의 영광을 위해 이곳에 모여 주신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다만, 연회의 주인공이 등장했으니 시작을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루시오 공작이 곁에 선 레온의 손을 자랑스럽게 높이 쳐들고 큰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의 미래가 환히 빛나기를.”
“빛나기를!”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가장 높은 곳에 선 레온을 연호하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소문만 들었을 땐 엉망진창으로 쓸모없는 후계자일 줄로만 알았다. 하나 대중 앞에 선 레온은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빛이 났다.
“레온, 내려가서 네 귀빈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렴.”
“예, 아버지.”
그전에 숨부터 쉬고.
‘메리는 어디 있지?’
레온은 단상에서 내려오자마자 주변을 둘러봤다.
드넓은 연회장 안에 빽빽이 차 있는 사람들 사이, 메리의 모습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 간 거야.’
이대로 가만있다간 인사는커녕 졸도를 할지도 모른다. 레온이 불안하게 주변을 살펴보는 동안 브라운이 다가왔다.
“공자님, 괜찮으십니까?”
“브라운, 메리는 어디 있어?”
“메리 부인이라면 방금 전 거처로 돌아갔습니다. 이곳에서 할 일은 없으니까요.”
“뭐?”
레온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기도 전 브라운이 레온의 귓가에 고개를 가까이 내렸다.
“도련님, 우측에서 길라의 후계자 피타 크루네 공자께서 오십니다.”
망할. 피타라면 진짜 레온과 절친한 사이였다. 하필이면 준비도 안 된 이때,
“지금 뒤도시면 됩니다.”
브라운의 안내에 따라 레온이 침착하게 숨을 들이마시며 고개를 돌렸다.
“레온? …정말 레온 너 맞아?”
레온보다도 훌쩍 큰 피타가 놀란 눈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레온은 아무 일도 없는 척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손을 뻗었다.
“반가워, 피타. 오랜만이네.”
“너….”
피타가 아래위로 레온을 살폈다.
열두 살 때보다야 크긴 컸지만 또래보다 훨씬 컸던 그때와 비교하면 전혀 자라지 않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게다가 좁고 가느다란 턱 선과 도드라지게 큰 눈. 어찌나 왜소한지 딱 달라붙는 드레스 코트 위 드러난 몸이 자꾸만 시선을 잡아끌었다.
“…레온.”
피타가 심각한 표정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말없이 피타가 레온의 가녀린 팔을 한참이나 응시했다.
“너, 이 자식. 마음고생을 많이 했구나.”
사랑하는 동생을 잃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울먹거린 피타가 레온의 손을 꽉 잡아당겼다.
그대로 덩치 큰 피타의 품에 안긴 레온은 컥, 숨이 막히는 것을 느끼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반갑다, 레온!”
정말이지, 끔찍한 첫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