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3장. 탄일(3)
피타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른다.
물론 쉽지 않았다. 그는 진짜 레온의 절친한 친구였고, 눈치를 볼 위치가 아니었다.
“아무튼 아버지께선 네게 힘이 되어주라 하셨어. 우리는 언제나 폰네시와 뜻을 함께할 거라는 말도 전하라 하셨고.”
“그으래.”
“너 취했어, 레온?”
“…어, 아니.”
“이런, 안 되겠다.”
피타가 손을 들자, 지켜보던 브라운이 단숨에 다가왔다.
“포도주가 좀 과했나. 네 주인을 모시고 가도록 해.”
연이어 다섯 잔을 마시게 만든 것치고는 태연한 목소리였다.
레온은 눈앞이 가물가물해지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애썼다.
“그래, 레온. 돌아가기 전에 다시 이야길 나누자.”
“어어, 안녕.”
피타가 미소 지었다. 절친했던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니 이보다 기쁜 날은 없을 것이다.
“공자님, 괜찮으세요?”
“…괜찮아. 물을 좀 마시고 싶은데.”
“잠시만 기다리세요.”
반면 레온은 그렇지 않았다.
태어나 술을 마셔본 것도 처음이고, 갑작스레 피타에게 붙잡히는 바람에 계획에도 차질이 생겼다.
‘뭐, 물론 피타도 만나볼 생각이었지만.’
피타 크루네는 길라의 후계자다.
길라는 남부와 경계를 맞대고 있고, 중앙 덴버그 지역까지의 진출도 쉬우며 엔드해로 나가는 해안 지역도 품고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절대 데로니스에게 넘겨줄 수 없는 곳이지.’
다행히 길라의 뜻도 그런 것 같다. 레온은 저 먼 곳에서 아직까지 손을 붕붕 흔드는 피타를 보며 대충 고개를 주억거렸다.
“공자님, 꿀 차를 좀 드세요. 한결 나으실 겁니다.”
어느새 브라운이 돌아왔다.
레온은 그가 내어주는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자 속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브라운.”
조금 붉어진 얼굴로 레온이 브라운을 바라봤다. 술기운이 가시는 게 느껴졌다.
아마 라피스가 아니었다면 저 대리석 바닥에 고개를 처박았을지도 모르지만.
레온은 휘휘, 딴생각을 몰아내며 주변을 살폈다.
“덴 토바를 좀 만나봤으면 좋겠는데. 그는 어디에 있어?”
덴은 센느에서 온 토바 가문의 삼남이다.
센느의 뜻을 확인할 필요는 있었다. 그들이 데로니스와 손잡기로 마음먹었다면 그 결정을 되돌려야만 했다.
“공자님, 덴 공자와 관련해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레온이 피타와 함께 포도주를 다섯 잔이나 마시는 동안 작은 사건이 있었다.
“실은 덴 공자께서 이곳에 있다 금세 거처로 돌아가셨습니다.”
“시간이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게… 아무도 찾지 않으셨거든요. 혼자 주변을 서성거리다 금세 돌아갔습니다.”
연회장은 많은 이들에게 중요한 자리였다. 이곳에서 친목을 다지는 것은 물론, 동맹 관계를 돈독히 하거나 경우에 따라선 혼인 문제를 논의하기도 했다.
수많은 가문을 한곳에 수용할 수 있는, 이런 규모의 연회는 적어도 동북부에선 몬데이어 공작가만이 가능했다.
“아무도 덴 토바와 이야기하지 않았단 소리야, 브라운?”
브라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덧붙였다.
“센느는 북부 중에서도 가장 별 볼 일 없는 곳입니다. 환경도 척박한데다가 워낙 인구수도 적으니 그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는 곳이죠.”
그러니 누구도 덴 토바를 찾지 않았단 뜻이다.
득이 되지 않으면 아무도 찾지 않는다니. 바다보다도 지독한 약육강식의 세상이군.
“그렇단 말이지.”
레온이 주변을 둘러봤다.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수많은 무리가 보였다.
‘아무래도 분위길 바꿔놓을 필요가 좀 있겠어.’
이대로 둔다면 데로니스가 센느를 포섭하든지 말든지 이곳에 모인 그 누구도 관심 없을 게 분명했다.
루시오 역시 마찬가지다. 센느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선 결국 그의 결단이 필요했다.
폰네시가 지원을 약속해야만 센느도 다른 선택지가 생긴다. 이런 식으로 센느가 무시받게 둘 순 없지.
레온이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브라운, 저쪽에 모여 있는 자들은 누구지?”
“북부 인근에서 온 소영지 무리입니다.”
“마침 잘됐네.”
레온이 브라운에게 찻잔을 건넸다. 그러곤 지나가는 가신에게서 포도주 한 잔을 받아 들었다.
“가자, 브라운.”
작업 좀 하러 가야겠다.
레온이 가짜 미소를 머금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
연회의 주인공답게 레온은 수많은 사람과 이야길 나누었다.
그사이에 오고 가는 술잔도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레온 공자의 말을 듣고 보니 나 역시 북부로 훌쩍 모험을 떠나보고 싶단 생각이 드는군요.”
“저도 그렇습니다. 지금껏 녹지 않은 그 얼음을 내 눈으로 지켜보고 싶어졌어요.”
“과거를 모두 간직한 유일한 결정체라. 어찌 그 땅을 그렇게 표현할 수가 있는지… 레온 공자의 넓은 식견이 그저 부럽습니다.”
북부의 자제들이 빛나는 눈으로 레온을 바라봤다.
레온은 이곳에서 북부의 권위를 높여주었다.
얼음이 녹지 않고 냉기에 노출된 척박한 환경을 비교 못 할 멋진 곳이라 칭찬하며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전 센느에 반드시 가볼 거예요.”
레온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두 시간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 누구도 관심 없던 센느가 단숨에 누군가가 평생 꿈꿔온 아름다운 모험지가 되었다.
“그곳의 오로라를 다 함께 본다면 정말 멋진 추억이 되지 않겠어요?”
“그야말로 완벽한 모험이겠네요!”
“우리 반드시 센느로 갑시다!”
레온이 주변에 모여 있는 이들과 다시 한번 술잔을 나누었다.
북부의 자제들이 뒤쳐질세라 레온을 따라 포도주를 마셔 넘겼다.
“그럼 전 잠시.”
얼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레온은 더 이상 술을 밀어 넣을 속도 남아 있질 않은 것 같아 연회장 옆 테라스로 자리를 옮겼다.
몇 겹이나 껴입은 탓에 열기가 사라지질 않았다.
레온이 테라스 난간을 쥐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공자님.”
“아, 깜짝이야.”
어둠 속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워렌이 서 있었다.
“놀라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귀신도 아니고 소리도 없이 따라오진 않았을 텐데. 기척도 못 느낀 걸 보니 취하긴 많이 취한 것 같다.
레온이 느리게 눈을 깜빡거리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됐어. …그보다 왜 불렀어?”
난간을 짚고 있는 손에 힘이 빠졌다. 잠시 휘청거린 레온의 어깨가 홱 돌아갔다.
“야, 아프잖아.”
“죄송합니다.”
단숨에 어깨를 잡아 되돌린 워렌이 고개를 숙였다. 레온은 엄청난 악력에 어깨를 문지르다 난간에 기대앉았다.
“…….”
워렌이 흘끔, 테라스 안쪽 연회장을 살폈다. 자리를 비운 레온을 기다리는 이들이 많았다. 자연히 시선도 이쪽으로 모여들었다.
결국 워렌은 넓은 어깨로 레온의 앞을 가로막았다.
“거처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찮아.”
팔짱을 끼고 난간에 고개를 기댄 레온이 중얼거렸다.
연회장에서 이어지는 음악 소리와 중정에 모여든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로 레온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대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공자님.”
워렌이 한쪽 무릎을 굽혀 레온에게 다가갔다. 고개를 돌리고 이번엔 목소리를 잘 듣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다시 하명하십시오.”
레온이 코앞까지 다가온 워렌의 금발 머리통을 바라보며 천천히 그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곤 그의 뒷목을 낚아채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귀찮으니까 날 거처까지 좀 데려다주라.”
“…예?”
“명이다, 워렌.”
숨 쉬는 것도 귀찮은 마당에 걸어서 거처까지 걸어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공자님.”
결국 완전히 뻗어버린 레온이 워렌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푹, 고개를 숙였다.
이를 어쩐다. 워렌은 자신의 가슴팍에 고꾸라진 레온을 내려다보며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사람들의 시선이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워렌은 레온을 한쪽에 잘 기대어 놓고 난간 아래를 살폈다. 조금 높긴 하지만 뛰어내린다 해도 다칠 정도는 아니었다.
“뭘 어쩌시려고요. 설마 공자님을 모시고 그쪽으로 뛰어내리려는 건 아니죠, 워렌 경?”
어디로 갔을까 한참 레온을 찾았더니만.
브라운이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테라스에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진짜 뛰려고 한 겁니까?”
“사람들 앞에 이런 모습을 보일 순 없으니까.”
“그야 그렇지만요.”
워렌이 조심스레 레온을 어깨에 들쳐 멨다. 이대로 연회장을 나선다면 시선이 집중될 게 분명하다.
그리고 소문이 파다하게 나겠지. 폰네시의 후계자가 술을 못 이겨 완전히 뻗어버렸다고.
“그렇다고 여기서 뛰어내리려 하다니. 말도 안 됩니다.”
“하명은 공자께만 듣도록 하지.”
고작 이 정도 높이에서 뛰어내리는 건 워렌에게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공자님의 안위를 살피는 게 제 일입니다.”
“내 일이기도 하지.”
“지금 저랑 말싸움 하세요?”
“난 칼싸움밖에 안 하는데.”
워렌은 브라운에게서 시선을 떼고 성큼, 난간 위에 다리를 올렸다.
“거처로 갈 테니 부집사도 그곳으로 오도록.”
“이봐요!”
워렌이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새어 나오려는 비명을 꾹 참고 브라운이 아래쪽을 내려다봤다.
열 받는 감정보다 레온의 안위가 더욱 중요했다.
브라운이 아래쪽을 향해 소리쳤다.
“공자님은 괜찮으십니까?”
“물론이지. 부집사도 어서 오도록.”
흘러내린 레온을 다시 어깨에 들쳐 메고 워렌이 발걸음을 돌렸다.
“내가 못 살아, 정말.”
브라운이 한숨과 함께 테라스를 벗어났다.
***
목은 타들어갈 것만 같고 머릿속에선 포도주가 찰랑이는 듯 울렁거렸다. 게다가 겹겹이 조여 놓은 몸통은 고통을 호소했다.
“으윽….”
레온이 잘 떠지지 않는 눈으로 주변을 더듬거리며 살폈다. 푹신한 침대였다. 거처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메리.”
혼자서는 할 수 없다. 레온이 어질어질한 시야에 결국 눈을 감고 간절하게 메리를 불렀다.
“옷. 옷 좀 벗겨줘.”
이러다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서두르는 게 좋겠다는 협박도 이었다.
레온은 메리가 오기까지 기다리며 천천히 목을 옥죄고 있는 펜던트부터 풀어내기 시작했다.
묵직한 사파이어와 곁에 달라붙은 리본을 풀고 어깨 위를 짓누르는 장식도 벗어 던졌다.
그리고 목 안쪽부터 연결된 단추를 뚝뚝, 떼어내고 있을 때 드디어 도움의 손길이 나타났다.
“가슴이 답답하니 가장 먼저….”
“도련님!”
쾅! 하고 방문이 열렸다.
레온은 머리맡에서 들려오는 메리의 목소리에 천천히 두 눈을 떴다.
그러자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금발의 푸른 눈, 워렌의 자기주장 강한 이목구비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
“…….”
에구머니! 메리가 비명을 지르며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다행히 레온의 옷은 그대로였다. 물론 어깨 한쪽이 다 드러나 있는 것만 빼면.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벗기라고 하셔서 벗기고 있었습니다.”
그래, 내가 그렇게 말했지.
레온이 두 눈을 깜빡였다. 여전히 단추 위엔 워렌의 손이 있었다.
레온이 정신을 차리곤 급하게 그를 밀쳐냈다.
“그, 그렇다고 기사님께서 하실 일은 아니지요. 제가 도와드릴 테니 기사님께선 이만 나가 보시겠어요?”
레온이 당황해 눈만 깜빡거렸다.
말문이 막힌 레온을 대신해 메리가 꾸벅, 고개를 숙이고 워렌을 내보냈다.
“앞을 지키겠습니다.”
“어, 아냐… 오늘은 가서 푹 쉬어.”
오늘은 그 누구보다 워렌이 가장 위협적이었다.
“예.”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워렌이 고개를 숙였다.
레온은 문이 닫히자마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들키는 줄 알았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다. 남들에게 비밀을 들켜 다시 한번 운명이 뒤틀리는 일 따윈 없어야 한다.
“그나저나, 메리.”
“예, 도련님.”
“…나 좀 벗겨봐.”
레온이 벌렁, 침대에 드러누웠다. 이러다 데로니스가 아니라 사슴 가죽에 목숨을 잃을 판이다.
“알겠으니 좀 쉬세요. 술 냄새가 진동을 해요.”
“으으으응.”
“팔은 이리 주시구요.”
“그래애애.”
“하여간, 제가 제명에 못 살아요, 정말.”
메리가 심장을 졸이며 레온의 옷을 하나하나 벗겨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