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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문가의 지표자-10화 (10/133)

10화

3장. 탄일(4)

덴 토바가 우울한 표정으로 작은 창을 바라봤다.

폰네시에서 맞이하는 태양의 절기는 정말 눈부시고 이루 말할 수 없는 따뜻함이 있었다. 태어나 이런 온기를 느낀 건 처음이다.

아무래도 언제나 혹독한 센느와는 비교가 불가능했다. 태양이 따뜻하니 곡식도 잘 자라겠지.

“휴우.”

덴 토바가 다시 한번 우울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가기 싫다.”

사실 배정받은 거처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기 싫었다. 어젯밤에 느꼈던 괄시와 무시하는 시선이 밤새 덴을 괴롭혔기 때문이다.

“다들 모였으려나.”

하지만 기껏 한 달이나 걸려 폰네시에 왔는데 말도 못 해보고 돌아갈 순 없었다.

센느가 바람 앞에 촛불처럼 위험한 상황에서 부끄러움을 견디기 힘들어 이대로 숨어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가자.”

오늘 아침엔 레온 몬데이어가 주최하는 조찬 모임이 있다.

인근 영지의 후계자들만 초대한 자리로, 사실 삼남인 덴은 갈 수 없는 자리였다.

“하지만 난 형을 대신해서 온 거니까.”

형인 히스 토바는 폰네시까지 가는 여비도 아까워했다. 어차피 데로니스와 교류를 하게 된다면 폰네시는 적이 된다.

노선을 정한 마당에 시간과 돈을 들여 연회에 얼굴을 내비칠 필요가 전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덴은 가야만 했다. 센느를 구하기 위해선 폰네시의 도움을 반드시 받아야만 했으니까.

‘그렇게 빤한 거짓말에 우리 센느를 넘겨줄 순 없어.’

토바 가문 사람들은 모두 센느를 벗어나고 싶어 했다. 누나들은 물론 여동생과 남동생도 미래가 없는 센느를 포기하고, 혼인이나 모험으로 그곳을 떠났다.

영주인 토바 가문이 그럴진대 영지민들의 생각 역시 다르지 않았다.

척박하기만 하고 먹을거리도 없는 센느 따위는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다.

덴만 빼고.

‘그 아름다운 곳을 무참히 짓밟게 둘 수는 없어.’

서둘러 단장을 마친 덴은 거처를 벗어났다. 여비를 아끼느라 곁을 지켜줄 시종 하나 달고 오지 못했다.

구겨진 옷을 입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주변을 살필 때였다.

“덴 공자님?”

갈색 머리의 젊은 남자가 나타났다. 복장을 보아하니 집사인 듯했다.

“나를… 찾아왔소?”

조금은 경계 어린 표정으로 덴이 눈앞의 젊은 집사를 살폈다.

구불구불한 짧은 갈색 머리칼에 환하게 미소 짓고 있는 얼굴은 무척이나 상냥해 보였다. 또한 자세는 누군가가 그려놓은 듯 바르고 올곧았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몬데이어 공작가의 부집사이자 레온 공자님을 모시고 있는 브라운이라고 합니다.”

“레, 레온 공자를 모시고 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공자님께서 조찬장까지 덴 공자를 모시고 오라 명하셨습니다.”

덴 토바의 작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무 놀라 대답도 나오지 않았다.

“그럼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브라운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고 길을 안내했다. 레온이 기다리고 있을 조찬장으로.

***

술을 퍼마신 전날의 여파로 속이 아주 엉망이었다. 게다가 울렁거림이 밀려와 금방이라도 주저앉고 싶었다.

‘술 앞에선 라피스도 소용이 없는 거야?’

우욱. 레온이 토기를 가라앉히고 발걸음을 옮겼다.

뒤를 따르는 워렌은 언제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는지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와 있었네.”

“방금 전 착석하시는 걸 확인했습니다, 공자님.”

“그래, 브라운.”

레온은 조찬장 앞에 대기하고 있던 브라운을 발견했다. 무사히 덴을 사람들 사이에 앉혀두고 나온 브라운이 고개를 숙였다.

어제보다는 덜하지만 레온은 여전히 품에 맞는 복장을 갖추고 있었다.

연회 동안만이라도 자유인 같은 복장을 멀리하라는 메리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아주 죽겠다고.’

레온은 짧게 심호흡을 하며 정신을 집중하고 조찬장에 들어섰다.

레온을 기다리던 인근 영지의 후계자들이 모두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다들 귀한 시간 내어주어 고맙습니다. 편하게 앉으세요.”

가장 가운데 자리하고 나니 맞은편에 피타가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대충 입꼬릴 올려 웃어주곤 주변을 살폈다.

‘저자인가.’

들어오기 전 미리 브라운이 설명해준 착장으로 덴 토바를 찾았다.

물론 설명이 없었다 해도 알아보기 쉬웠을 것이다. 이곳에 모인 그 누구보다도 옷차림이 허름했기에.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지만, 폰네시에서 키워낸 식재료로 정성껏 차렸습니다. 다들 맛있게 들었으면 좋겠어요.”

레온의 너스레에 모두 미소 지었다. 폰네시의 식재료는 훌륭하기로 소문이 나 있다.

비옥한 토지에서 특별한 기법으로 키워낸 것들이니 품질이 특히 좋아 맛이 없기가 힘들었다.

“이렇게 좋은 자리에 술이 빠질 수야 없지.”

피타가 근처에 서 있던 가신들에게 포도주를 내올 것을 명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마셔대는 게 이곳 사람들의 특기이다 보니, 그 누구도 피타를 막지 않았다.

레온은 제 앞에도 놓인 술잔을 보며 윽,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숙취가 밀려들었다.

“이렇게 모인 것도 인연인데, 우리를 위한 건배사를 하는 게 어떻습니까, 레온 공자?”

동부와 북부 인근 영지 총 여섯의 후계자들이 모인 자리.

피타는 레온이 이 자리에서 좀 더 위엄 있는 모습을 보이길 바랐다. 그래야 충성을 맹세하기가 쉬울 테니 말이다.

“그보다.”

건배사를 하기 위해 일어난 레온이 술잔을 내려놨다.

그러곤 나이프질을 한 번도 하지 못하고 눈치만 보는 덴에게 시선을 주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처음 보는 이들도 분명 있지 않습니까?”

레온이 내려두었던 술잔을 들었다.

“그러니 서로를 소개하는 시간 먼저 가집시다.”

레온은 자연스레 덴 토바에게도 시선이 쏠릴 수 있도록 분위기를 이끌어냈다.

거리가 멀어 서로 교류가 적을 수밖에 없는 동부와 북부의 후계자들에게도 유익한 시간이었다.

레온은 한 사람, 한 사람 제 가문과 영지에 대해 가볍게 소개하며 반가움을 전하는 목소릴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다음은.”

모두의 시선이 덴에게 향했다.

그들은 이곳에 앉아 있는 저 납작하고 땅딸막한 자가 누구인지 아무도 몰랐다.

“만나보고 싶었소, 덴 공자.”

레온이 머뭇거리는 덴에게 가볍게 목례했다.

그러자 덴이 부끄러움에 달아오른 얼굴로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 반갑습니다. 나는… 센느에서 온 아이작 토바 남작의 삼남, 덴 토바라고 합니다.”

센느. 북부의 끝 작디작은 영지로, 어쩌면 세상의 끝과 맞닿아 있는 곳이라 일컬어질 만큼 험하고 척박한 지역이다.

자제들이 잠시 머뭇거리다, 레온이 박수를 치자 덴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비록… 센느의 후계자는 아니지만… 레온 공자가 나를 초청해주어 이곳에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보잘것없는 영지에서 온 자가 심지어 후계자도 아니라니.

피타가 주변을 살폈다. 그러자 같은 급으로 무시당한 것이라 여긴 동부 인근의 젊은 후계자들이 인상을 찌푸리는 게 보였다.

“그런 말, 마시오, 덴 공자.”

그때 레온이 술잔을 들고 덴에게 다가갔다.

“참. 나와 동갑이라고 했는데 편하게 대해도 될까, 덴?”

레온이 덴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주변 자제들이 휘둥그레 그 모습을 지켜봤다.

변방의 소영지에서 온, 심지어 후계자도 아닌 자에게 친구를 하자고 하다니.

“무, 물론이지, 레온!”

결국 또 술을 마시게 됐다. 레온은 덴과 건배를 한 후 포도주를 마셔 넘겼다.

“센느는 특별한 곳이야. 서대륙의 끝이자 시작인 곳이지.”

레온이 납득하지 못하는 자제들을 향해 약을 팔기 시작했다.

“다들 그곳에 묻혀 있는 과거가 궁금하지 않나?”

어느새 레온이 모두에게 편하게 말을 놓았다. 좌중을 휘어잡기 위한 방법 중 하나였다.

“센느의 얼음은 설인의 후예들이 발견한 이래 지금껏 단 한 번도 녹지 않았지. 그곳엔 우리의 과거가 고스란히 보관돼 있어.”

우리 센느가 그렇게 가치가 있던가.

덴이 포도주를 홀짝이며 눈을 굴렸다. 어째 레온이 말하니 그런 것도 같다.

“난 덴에게 허락을 구하고 그곳에 우리 학자를 파견해 볼 생각이네.”

“학자?”

“무엇을 연구하기 위해섭니까?”

좌중이 모두 빠져들었다.

방금 전까지 불쾌했던 감정을 모두 잊은 채 레온이 던진 물음에 각각 해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시간.”

레온이 다시 모두에게 포도주를 권했다. 그들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술을 마셔야만 했다.

“그곳에 묻힌 지나간 시간을 연구해보고 싶은 건 너무도 당연한 욕구 아닌가?”

레온이 그럴듯한 말로 덴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우리는 이 서대륙의 미래를 이끌어나갈 인재들이야.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선 지나간 시간 역시 끊임없이 잊지 않고 탐구해야 하지.”

덴의 어깨 위에 레온의 손이 얹어졌다. 모두의 시선이 레온과 덴을 향해 있다.

“우리가 함께 센느에 탐구 모험을 떠날 수만 있다면….”

레온이 아련하게 천장을 바라봤다.

“그곳에 우리가 함께한 시간을 묻는다면 얼음 아래 영원히 우리의 우정을 새길 수 있을 테지.”

인간들은 이딴 낭만적인 이야기를 좋아했다.

레온의 몇 마디 말로, 센느는 이제 동북부 인근의 모두가 탐낼 만한 땅이 됐다.

‘물론, 실제로 중요하기도 하고.’

레온은 센느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얼음 아래 무엇이 묻혀 있는지 알고 있었다.

‘절대 데로니스에게 빼앗길 순 없어.’

데로니스도 무리해서 폰네시를 건들진 않았다.

적군 연합이 전부 센느에 관심을 두고 있는 이상 손쉽게 빼앗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럼, 우리의 우정을 위하여.”

“영원한 우정을 위하여!”

톡톡.

레온이 환하게 웃는 덴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많이 웃어둬라. 나중엔 울게 될 테니까.’

그곳에 무엇이 묻혀 있고, 어떻게 빼앗길지 안다면 이토록 해맑게 웃진 못할 것이다.

“…고마워, 레온.”

“고맙긴. 우린 친구잖아.”

“…치, 친구?”

덴이 제 어깨 위에 얹어 있는 레온의 손을 흘끔 보다 잠시 머뭇거렸다.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지 한참이나 고민했다.

“할 말이라도 있어?”

눈치 빠른 레온이 덴에게 물었다.

“그게….”

덴이 눈을 굴려 주변을 살폈다. 후계자들은 모두 녹지 않는 얼음에 대해 떠들어대고 있었다.

레온이 다시 한번 덴의 어깨를 힘 있게 쥐었다. 그리고 푸른 눈동자로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거야, 덴?”

“우리 센느에 대해 좋게 봐줘서 정말 고마워, 레온.”

그야 그곳에 묻힌 게 무엇인지 아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어쩌면 센느를 빼앗길지도 몰라.”

“빼앗기다니. 누구에게?”

물론 누가 노리고 있는지도 알고 있다. 레온은 모른 척 진지한 표정으로 덴의 어깨를 흔들었다.

“데로니스 왕조가 우리에게 지원을 약속했어….”

그랬겠지.

레온이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우리가 새로운 영지로 이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대.”

“…뭐?”

“엔드해 건너에서 발견한 신대륙을 우리에게 주겠다고 약속했어.”

“…그게 무슨 소리야. 엔드해 너머엔 아무것도 없잖아.”

“새로운 대륙을 발견한 자들이 있대. 그들이 우릴 그곳까지 데려다주기로 약속했고.”

“뭐라고?”

엔드해 너머 새로운 대륙이라.

어째 조건이 일치하는 자들이 손쉽게 떠오른다.

‘…타세트의 항해단.’

레온의 눈빛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그들이 데로니스와 이미 손을 잡아놓고 폰네시를 속였다. 루시오는 그것도 모르고.

“하지만… 너무 의심스럽지 않아, 레온? 얻는 것도 없이 우리를 돕겠다는 게. 난 이 모든 게 너무나 잘 짜 맞춰진 거짓 같아.”

덴이 흘러내린 레온의 손을 꽉 붙잡고 호소했다.

“우릴 도와줘, 레온.”

이제 믿을 건 이 폰네시의 후계자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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