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3장. 탄일(5)
남들이 모르는 미래를 내가 안다고 해서 늘 좋은 것만은 아니다.
‘해주일 때가 좋았지. 내 기억이 해답이니.’
레온이 드넓은 만찬회장 테이블에 턱을 괴고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곁에 앉은 피타가 휘휘,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 보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없다. 아무 일도.”
“그럼 고민이라도 있는 거야?”
“고민? …그건 있지.”
“뭔데. 말해 봐, 레온.”
몇 시간째 무기력하게 엎어져 있던 레온이 드디어 반응했다. 피타가 눈을 빛내며 그런 레온을 바라봤다.
레온이 번쩍 턱을 들고 그에게 물었다.
“너라면 설명할 수 없는 일을 설명해야 할 때 어떻게 할 것 같아?”
“설명할 수 없는 일?”
“그래, 예를 들면… 증거는 없지만 반드시 일어날 일이라든가, 설득할 게 내 확신밖에 없는 일 같은 것들 말이야.”
“망상 아니야, 그건?”
피타는 당최 레온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고민을 털어놓으라고 했더니 심오한 질문을 해댄다. 답이 있는 건 맞아?
피타의 표정에서 뜻을 읽은 레온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다시 무기력한 모습으로 테이블에 고개를 파묻었다.
“됐어. 못 들은 걸로 해.”
지난 조찬 모임에서 센느의 소식을 들은 직후 레온은 곧장 루시오를 찾아갔다.
데로니스가 타세트의 항해단과 손을 잡았고, 그들이 센느를 거점 삼아 북부에서부터 밀고 내려오리란 사실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근데 그걸 무슨 수로.’
증거가 없다.
‘타세트 놈들이 신대륙을 발견했고, 가이아 왕조를 복위시키는 데 관심 없다는 건 미래를 아는 나나 믿는 일이지.’
설명할 길이 없다.
내가 사실은 바다의 주인인 해주 인어라서 세상의 일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가 완생을 했는데, 죽고 보니 400년 전 인간 세상에서 다시 눈을 떴더라.
그러니까 내 말을 믿어라. 나는 앞으로 벌어질 미래를 모두 알고 있다, 고 말해봤자 미친놈 소리나 듣지 않으면 다행이다.
“후우….”
공작가의 후계자란 자리가 생각보다 큰 도움이 되지는 않는 것 같다.
루시오가 살아 있는 한 그의 뜻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게다가 난… 너무 놀고먹었어.’
검술 훈련도, 체력 훈련도.
이 서대륙, 작은 변방의 후계자들도 다 배운다는 예법이나 역사 공부 따위도 해본 적 없으니 루시오가 제 말을 신뢰할 것 같지는 않았다.
지금부터라도 행동거지를 바르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루시오의 눈 밖에 나면 이 폰네시의 힘을 멋대로 휘두르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축제가 마무리되면 당장 후계자 수업부터 받아야지.’
어쩌면 검은 사냥개를 추적하고, 데로니스를 쳐부수는 것보다 우선되어야 할 일이었다.
“그나저나… 아까부터 저 아가씨가 너를 바라보는데.”
그때 피타가 툭, 레온의 어깨를 쳤다. 죄 없는 파이만 신경질적으로 들쑤시던 레온이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맞닿기 무섭게 걸음을 옮기는 여인이 보였다.
“어느 가문의 아가씨지?”
레온은 천천히 걸어오는 새카만 머리칼의 아가씨가 그 어느 집안의 영애도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
따뜻한 햇볕에 그을린 피부, 잘 빗었지만 거칠한 머리칼.
아름다운 눈꺼풀 아래 점점이 자리한 흔적은 바다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타세트의 항해단인가?’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던 말소릴 줄였다.
이 만찬의 주인공에게 다가오는 저 아름다운 아가씨가 누구인지 모두가 궁금한 듯했다.
“어서 오시죠, 아가씨.”
피타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에게 의자를 빼주었다.
레온의 맞은편에 앉게 된 그녀가 환한 미소로 화답했다.
“환대해 주셔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피타는 원래도 알고 있던 사이인 것처럼 그녀를 자연스럽게 대했다.
반면, 레온은 표정 없는 눈빛으로 살필 뿐이었다.
그녀가 다가와 눈인사를 건네고 마주 앉을 때까지 한 번도 움직이지 않는 모습은 주변의 탄식을 불러일으켰다.
‘바다 냄새가 나네.’
귀족 영애들이 입는 복장을 갖췄지만 어딘지 모르게 남의 옷을 입은 것 같다.
피타는 레온이 눈싸움을 거는 것처럼 아가씰 노려보자 분위길 수습하기 위해 먼저 입을 열었다.
“이토록 아름다우니 가문이 아가씨를 꽁꽁 숨길 수밖에요. 실례지만 어느 영지에서 오셨는지 알려 주시겠습니까?”
“음, 저는 어느 영지의 사람도 아닌데요.”
“예?”
그녀가 머리칼을 넘겼다. 길게 늘어진 검은 머리에선 진한 향기와 뒤섞인 바람 냄새가 났다.
레온이 뚫어져라 그 얼굴을 바라보며 눈썹을 까닥였다.
“뭐, 나한테 용건이라도.”
지금은 쓸데없이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해야 할 일들이 아주 많다. 그런 일 중에 여자와 노닥거릴 시간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궁금해서 보러 왔는데.”
가운데 낀 피타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궁금하긴 뭐가 궁금한지.
타세트가 시켜서 왔나? 폰네시의 후계자가 누구인지 좀 알아보라고?
레온의 표정이 더욱 딱딱하게 굳어갈 때였다. 눈앞에 마주 앉은 아가씨가 턱을 괴고 레온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기 시작했다.
“지금 뭐 하는 거지?”
“구경하지.”
“뭘.”
“내 남편이 될지도 모르는 널.”
뭐?
레온의 표정이 전에 없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잘생겼구나? 생각보다.”
맞은편에 앉은 아가씨가 생긋 웃었다. 누구라도 사랑할 만한 환한 미소로.
***
만찬이 끝나기도 전에 폰네시 궁성에 소문이 빠르게 퍼졌다.
근본 없는 자유 도시 마다비아에서 온 여인이 이 폰네시의 후계자를 넘보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레온은 만찬이 끝나자마자 루시오 공작을 찾아갔다.
‘내가 여잔데 지금 누구랑 결혼을 시킨다고?’
기다렸다는 듯이 퍼지는 소문으로 보아 루시오도 어느 정도는 이 일에 연관돼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레온과 연관된 뜬소문이라면 조금도 참지 않고 막아서는 것에 앞장서는 인물이었다.
늘 비밀을 들킬까 전전긍긍하는 루시오가 지금껏 손쓰지 않은 건, 이 소문이 퍼지게 두겠다는 뜻이었다.
“아버지는?”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사 헤리스가 문을 열어주었다.
올 줄 알았다. 기다리고 있던 루시오는 어느새 여유를 되찾고 레온에게 앉을 것을 권유했다.
“대체 왜 가만히 구경만 하세요? 진짜 저를 그 여자랑 결혼이라도 시킬 셈이세요?”
“꼭 내가 그 소문을 퍼뜨린 것처럼 말하는구나, 레온?”
“타세트는 이 폰네시를 손에 넣을 작정이에요. 우리 동맹이 아니라구요.”
레온이 앉자마자 루시오를 향해 쏘아붙였다.
그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명확해졌다. 말도 안 되는 결혼을 핑계로 폰네시를 집어삼킬 목적이었다.
“음,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럴 수도 있는 게 아니라 분명하다니까요?”
차라리 잘됐다.
타세트가 이런 어이없는 계획을 꾸민 탓에 루시오에게 말이라도 꺼내볼 수 있게 됐으니 말이다.
레온이 루시오의 팔을 흔들었다. 그는 시선을 외면하고 관심 없는 일을 듣는 것처럼 다른 생각에 파묻힌 둣했다.
“아버지!”
그간은 데로니스와 타세트의 항해단이 손을 잡을 만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가이아 왕조를 지지하던 그들이 한순간 데로니스에게 충성을 맹세했단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폰네시를 넘겨주기로 약속했다면.
늘 정착할 땅을 찾아 평생 바다를 누린 그들에게 이 동북부를 주기로 약속했다면 모든 게 설명이 된다.
“레온, 오늘 본 그 아이는 타세트가 어려서부터 키운 양녀다.”
“…왜 갑자기 설명을 해주세요? 절 정말 그 아이와 결혼시키려는 건 아니죠, 아버지?”
“그럴 리가. 그저 타세트가 동맹을 확실히 하기 위해 결혼을 요구하는 게 당연하단 걸 알려주려는 거다. 그들은 네 비밀을 모르니까.”
또래의 남녀 자식을 두고 있으니 보다 관계를 명확히 하기 위해선 사실 결혼만큼 완벽한 제도가 없었다.
“어쩌면 네게도 비밀을 숨길 확실한 기회가 온 걸지도 모르지.”
“…그게 무슨 소리세요?”
“그들은 우리 동맹이니 믿어도 된단 소리야.”
“동맹이 아니라니까요.”
그들의 속내가 그렇게 순수할 리 없다.
레온은 덴에게 들은 센느의 소식을 전해주며, 타세트의 항해단이 데로니스와 손을 잡았단 사실을 정확히 설명했다.
“그러니 제발 믿지 마세요. 아버지가 아는 사실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잖아요.”
루시오 공작이 레온을 바라봤다.
늘 다정하게 바라봐주던 푸른색 눈동자에 매서움이 담겼다.
“그래, 레온. 네가 아는 사실도 전부가 아닐 수 있지.”
루시오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님들이 모여 있는 연회장의 불빛은 아직도 밝게 빛났다.
“네 말대로 데로니스 세력이 센느를 노리는 상황이라면, 우리가 센느를 믿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지? 그들이 이미 한 패일지도 모르는데.”
“…그건.”
“생각해 보렴, 레온. 데로니스 입장에서 우리가 누구와 손을 잡는 게 가장 큰 부담일지.”
폰네시와 타세트의 항해단이 손을 잡는다면 데로니스에겐 큰 타격이 된다. 어쩌면 승기를 아예 넘겨주는 계기가 될지도 몰랐다.
“우리가 타세트와 손잡는 걸 막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놈들이다.”
“덴이 저를 속였단 말씀이세요? 그럴 리가 없어요. 전….”
“네가 뭘 확신할 수 있지?”
미래를 알고 있다는 헛소리가 나올 타이밍이 아니다. 결국 레온은 말을 삼키었다.
“항상 모든 상황을 염두에 둬야지. 확실하지 않다면 말을 꺼내는 것조차 조심해야 하고.”
루시오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레온에게 말했다. 지금껏 본 적 없는 엄한 표정이었다.
“네 속내를 너무 쉽게 털어놓지 마라. 그 누구에게도.”
***
“공자님, 도대체 영주님과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부리나케 거처로 돌아온 브라운이 조잘거렸다.
“어째서 제게 공자님의 손님을 통제하라는 명을 내리셨죠?”
“아버지가 내 손님을 통제하래?”
“예, 그 누구도 만나지 못하도록 명하셨어요.”
“그거 나한테 말해도 되는 거냐.”
“그럼요. 저는 공자님의 사람이니까요.”
똑똑한 사람이 이유도 없이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건 아직 적응되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디카르테라면 믿을 수 있을 가문이긴 하지.’
디카르테는 몬데이어 공작가가 멸문한 이후에도 그들을 위해 살아간 가문이었다.
레온이 손을 들어 단검이 박혔던 제 심장을 문질렀다. 손끝이 닿으면 흉이 남은 상처에 고통이 묻어났다.
이 고통을 몸에 새긴 놈들을 찾아내야 한다.
이대로 데로니스가 북부에 자리 잡는 걸 두고 볼 수만은 없다.
“브라운, 넌 진정한 디카르테지?”
“예, 공자님. 저는 대대로 몬데이어를 위해 길을 찾아온 디카르테입니다.”
레온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어둠 속에서도 총기를 잃지 않은 브라운의 연한 눈동자가 똑똑히 보였다.
“그래, 지금 난 길을 잃었거든.”
대대로 몬데이어 공작가를 위해 곁을 지킨 디카르테의 총명함이 있다면, 이 답 없는 상황을 벗어날 돌파구를 찾을지도 모른다.
“타세트의 항해단에 대해 알아봐 줘. 그들은 지금 마다비아에서 온 교역 상단으로 정체를 숨기고 우리 폰네시에 와 있어.”
브라운이 조금 놀란 듯 입을 동그랗게 모았다. 갑작스러운 요청이었지만 할 수 없는 일은 아니다.
그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반드시 알아내겠습니다. 공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걸요.”
“그래, 브라운.”
이러려고 널 내 곁에 둔 거니까.
레온은 의심을 거두고 브라운을, 디카르테 가문을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비록 그들이 죽일 듯이 증오스러운 인간이라 하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