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4장. 얻기 위해 버릴 것(1)
브라운은 아주 훌륭히 일을 해냈다. 막연한 물음에도 적절한 답을 찾아왔다.
레온은 타세트의 항해단과 관련된 주요 정보와 약점으로 나열된 문서를 보곤 코웃음을 쳤다.
이런 쪽으로는 아주 특화되어 있는 능력이었다.
“무엇을 조사해야 할지 잘 몰랐을 텐데.”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위할 것인지만 기억했습니다.”
“머리를 잘 굴렸네.”
“감사합니다, 공자님.”
브라운은 웃지 않았다. 그저 신념대로 했다.
길을 잃었다는 레온의 말을 떠올리자 이런 정보가 필요하리라 판단했을 뿐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엮인 사이도 아닌데 무에 그리 충성을 하느냐 여길 수도 있지만, 그게 디카르테 가문이 살아온 방식이었다.
중요한 판단은 주인에게 맡긴다. 다만 주인에게 중요한 일은 디카르테가 판단했다.
비슷하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
레온의 세상엔 고려할 게 아주 많지만, 브라운 디카르테는 레온 몬데이어만 고려하면 됐다.
그가 온 세상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이게 도움이 되겠는데.”
증거가 필요했다. 루시오의 평정한 마음속에 그들을 향한 약간의 의심만 피어나게 만들면 됐다.
그 이상을 건드려 봤자 오히려 믿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레온이 문서를 톡톡 두드렸다. 브라운이 조사해 온 정보들 중 썩 괜찮은 걸 찾아냈다.
“이 독 향료라는 거. 구할 수 있을까, 브라운?”
“명하신다면 구해올 수 있겠지만, 공자님께서 필요하실 때까지는 얻지 못할 겁니다.”
독 향료는 서대륙 내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동대륙 내의 남부 지역에서 나는 약초로 만든 향료인데, 적절한 해독초와 함께 섞지 않으면 치명적이기 때문에 구한다고 해도 그들이 갖고 있는 것과 똑같을 순 없습니다.”
그건 오랜 바다 생활을 해온 그들의 특권 같은 것이었다. 주로 멀미를 가라앉히고 무료한 바다 생활을 버틸 만한 용도로 쓰였다.
독 향료는 불에 태워 연기를 들이마시거나 물에 타 마시는 것으로 환각과 신경 교란 등을 일으켰는데, 조금이라도 잘못 쓰면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 수도 있었다.
“그래도 구해야 한다면 그들의 거처를 털어볼 순 있겠죠.”
영 내키진 않지만 브라운은 제 역할대로 레온에게 해답을 주었다.
물론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누가 보면 독 향료를 구해 제 입에 억지로 털어 넣을 것처럼 기겁한 얼굴이었다.
레온은 별 상상을 다 하는 브라운을 보다 문서를 내려두었다.
“그럼 털러 가야겠네.”
“…정말요, 공자님?”
줄곧 참고 있던 브라운이 결국 레온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랐다.
본능이 분명 공자를 가로막아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괜한 일에 첨언을 한 걸지도 모른다.
이 일로 루시오 공작이 부집사 직을 파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라 해도 할 말이 없을 것만 같았다.
“너무 위험한데요, 공자님.”
“내가 뭘 할 줄 알고.”
“모시는 주인의 속을 함부로 떠보는 건 부집사로서 할 도리가 못 됩니다.”
“내가 하려는 일을 방해하는 건 괜찮은 거야?”
“공자님이 위험해지지 않도록 하는 게 제 일 아닙니까?”
“응, 아니야. 그건 워렌이나 할 일이지.”
레온이 흘끔 바깥을 살폈다. 어느새 밤이 모두 물러가고 따뜻한 볕이 내리쬐는 정오가 다 되었다.
“워렌 경에게 독 향료를 털어오라고 시키시게요?”
“그렇게 큰 인간이 털러 갔다간 단숨에 내가 범인으로 지목될걸.”
“그, 그럼 어쩌시려고요?”
레온은 미리 갈아입었던 외출복을 탁탁 정리하며 거울을 살폈다.
편안하게 놀고먹는 공자는 어디 가고, 다시 겉껍데기는 이 폰네시의 완벽한 후계자로 변해 있었다.
“그렇게 울상으로 있지 말고 가서 제니레이에게 만남이나 청하고 와.”
“예?!”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브라운은 제 몫을 완전히 해내고도 레온으로부터 뜻한 바를 제대로 전달받지 못했다.
독 향료로 뭘 어쩌겠다는 건지도 납득 못 했는데, 이젠 제니레이를 만나러 가겠다니.
“그분은 공자님의 결혼 동맹 대상으로 이야기가 나온 분이잖아요!”
“그래, 네가 조사했으니 나보다는 더 잘 알겠지.”
“그런 분께 가서 만남을 청하고 오라고요?”
흡사 정말 결혼하시게요? 라고 묻는 것과 같은 목소리였다.
아, 정말 귀찮아 죽겠네.
레온이 방금 전까지 천사 같았던 얼굴을 뒤로하고, 눈을 매섭게 떠 브라운을 노려봤다.
“다녀오겠습니다, 공자님.”
예의 제 역할을 다 해낼 줄 아는 부집사로 돌아온 브라운이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그는 농을 칠 때와 본분을 잊어선 안 될 때를 잘 구별했다.
“광장에서 뵙자고 해.”
“예!”
일단은 루시오의 시선을 돌릴 만한 소란을 만들어볼 필요가 있다.
게다가 제니레이 역시 타세트의 항해단이니, 독 향료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도 컸다.
여차하면 훔쳐낼 기회도 오겠지.
레온은 제 손바닥 위에 놓인 여러 정보를 살살 굴려가며 광장으로 향했다.
***
왜 갑자기 만나자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좋은 일이었다.
제니레이는 가진 옷 중 가장 화려한 옷을 입고 광장으로 달려갔다.
귀족가의 영애는 소란을 떨지 않는 법이지만 어차피 상관없다. 영애도 아닌 데다, 만남이 날아갈 듯이 기뻤기 때문이다.
“레온 공자!”
멀끔한 외출복을 차려입은 레온이 보였다. 제니레이가 치맛자락을 들고 얌전을 떨며 다가갔다.
레온은 분수대가 만들어낸 그늘 곁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왔습니까?”
레온도 제니레이도 전날과는 전혀 딴판으로 서로를 대했다.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레온이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다.
마땅히 수줍게 볼을 붉히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데, 레온의 뭐 씹은 표정을 보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말을 그렇게 했으면 성의라도 좀 보이던가.
레온의 얼굴은 냉소적이기까지 했지만, 제니레이는 모른 척했다.
“날이 좋네요. 광장을 구경시켜 주신다니 정말 기뻐요.”
“예, 뭐.”
공식적으로 알려진 건 없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두 사람이 만난 것만으로도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여럿 귀족가는 충격에 빠졌다. 이번 연회에서 혼처를 물색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루시오 공작의 성미치곤 성급한 것 같기도 했다.
“모두가 우리를 보는데….”
후계자의 결혼이란 그런 것이다. 가장 필요한 세력과 결속할 수 있는 완벽하고 확실한 제도였다.
그런데 출신도 불분명한 자유인들이 모여 사는 마다비아의 사람이라니.
영지민들의 시선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의식하지 않으면 별것 아니게 느껴질 겁니다.”
“아뇨. 익숙해지는 게 좋겠죠?”
이 폰네시의 후계자와 결혼을 하게 된다면 늘 받게 될 시선이다.
레온은 어깨를 으쓱하고 사람이 좀 적은 곳으로 발길을 돌려주었다.
“그나저나 좀 놀랐는데요. 어젯밤엔 질색하시는 줄 알았거든요.”
그땐 귀찮은 짓을 벌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진짜 결혼할 사이도 아닌데 굳이 잘해줘야 할 이유도 없었고.
레온은 뒤에서 종알종알 신나서 뭐라 떠들어대는 제니레이의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대충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래도 여자를 대하는 건 어렵단 말이지.’
수천 년을 인어들과 부대끼며 살았지만, 따지고 보면 인어는 여자라기보다는 그저 독립적인 인어라는 개체 그 자체다.
자라오는 내내 여자라곤 늙은 메리 부인만 본 것도 한몫을 했다.
도통 이 나이 또래의 여자와는 말도 섞어본 적 없으니, 레온은 제니레이를 어찌 대해야 할지 어려웠다.
‘잘 꼬셔서 독 향료를 훔쳐야 되는데.’
어딘가에 숨겨놨을지 모른다. 중요한 물건이니 직접 들고 다닐 가능성이 크기도 했고.
그때 등 뒤에서 따라오던 브라운이 흠흠, 헛기침을 했다.
노골적으로 제니레이의 몸을 살펴보던 레온을 의식한 질책이었다.
모르긴 해도 결혼도 안 한 여성의 몸을 이렇게 훔쳐보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안다.
레온은 콧잔등을 찌푸리며 다시 광장을 거닐었다.
“타세… 아니, 아버지와 이야기를 해봤어요. 아마 혹한의 절기가 오기 전엔 결혼식을 하는 게 좋겠다고 하시더군요.”
루시오 공작이 제대로 그를 설득할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아주 동맹이랍시고 비밀을 다 밝히고 표면적인 결혼식을 올리게 만들 작정이던데.
전적으로 타세트를 믿고 있으니 일이 어떻게 된다 해도 레온이 선택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어디 도망이라도 가면 모를까.
“제 말 듣고 있어요?”
못 들었다. 레온은 짐짓 어젯밤의 본모습을 내비친 것 같은 제니레이를 돌아봤다.
“저 과자 좀 사달라고요. 기왕이면 입에도 넣어주고.”
“뭘 어쩌라고요?”
“알아들었으면서 그러네, 참.”
멍한 틈을 타 기다렸다는 듯 제니레이가 레온의 팔에 팔짱을 꼈다.
여느 혼인을 약조한 사이처럼 다정해 보이기도 했다. 몸이 닿자마자 매정하게 굳어지는 레온의 표정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오해를 했나 본데, 어젯밤 만인 앞에서 쌀쌀맞게 군 게 결례인 것 같아 네 면을 세워주려던 것뿐이야.”
거짓말이다. 레온은 상대방이 느끼는 불편함이나 무안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러면 시늉이나 더 하지, 왜 이제 와 속내를 밝히는데?”
제니레이 역시 본모습을 드러냈다. 방긋방긋 웃던 밝은 얼굴을 치우고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미는 게 레온과 제법 닮아 있었다.
“이 손 좀 치우라고.”
같은 여자이니 신체의 비밀을 알아차릴 가능성도 컸다.
레온은 먼저 팔짱을 낀 영애를 내친 결례가 어젯밤의 그것보다 더 크다는 것도 인지 못 하고 그녀를 밀어냈다.
“흠, 좋아. 결혼을 할 사이라면 서로 간에 솔직한 게 좋을 테니 나도 사실대로 말하겠어.”
그럴 일은 없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레온은 입을 다물었다.
독 향료를 훔쳐낼 기회만 노리는 주제에 사실을 깨우쳐주는 건 딱히 제게 유리한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우리 결혼은 두 어른들의 뜻대로 이뤄질 테니, 힘 빼지 말자고. 평생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까 결혼만 해줘.”
제니레이는 결혼이 이뤄질 거라고 완전히 믿고 있었다.
“뭐?”
수천 년을 살았어도 이런 청혼은 처음이라 레온은 어젯밤처럼 놀란 목소릴 그대로 드러냈다.
조금 떨어져 있던 브라운이 호기심 넘치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결혼이 장난도 아니고… 이렇게, 성급하게.”
숙맥이네, 숙맥이야.
브라운은 냉골 같은 레온도 조금은 사람다운 구석이 있다며 킥킥거렸다.
“누가 장난이래? 나한테 가장 중요한 문제니까 이렇게 빌빌거리며 부탁하지.”
제니레이가 고집스럽게 다시 레온의 팔짱을 끼었다.
그녀는 생전 처음 보는 유형이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일단 환상을 깰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가까이 부대껴 오는 것도 불필요한 일이다.
“알겠으니까 일단 떨어져.”
레온은 인상을 찌푸리며 제니레이를 밀어내다가 순간 입을 꾹 다물고 말없이 고개 숙이는 그녀를 봤다.
방금 전까지 고고하고 당당하게 결혼해 달라 말한 사람치고는 무척 움츠러든 모습이었다.
“뭐야.”
기분을 상하게 했나. 그럼 독 향료를 못 훔치는데.
“과, 과자 안 사줘서 그래?”
레온이 쩔쩔매고 있을 때 사람들이 붐비는 광장 어귀 골목에서 어느 한 무리가 다가왔다.
그들은 빠른 속도로 레온과 제니레이 앞에 섰다.
누가 봐도 흥미로워 죽겠다는 듯 비웃음이 작렬하는 얼굴이었다.
“이게 누구야.”
뒤쪽에서 바람이 불었다.
“우리 공주님께서 왕자님을 만났나?”
바다 냄새가 풍겼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난 이 애와 같은 밥을 먹고 자란 핍이라고 합니다만.”
타세트 항해단의 일원이다.
핍이란 자가 악수를 청하기 위해 손을 들자, 제니레이의 몸이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