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4장. 얻기 위해 버릴 것(2)
“내가 알아야 할 사람이던가?”
레온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브라운을 바라봤다.
이 폰네시의 후계자가 통성명까지 해야 되냐는 물음이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래.”
속내를 알아차린 브라운이 재빨리 과자점의 문을 열었다. 레온은 제니레이와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등 뒤에서 문이 닫히자, 제니레이도 드디어 숨을 내쉬었다.
“저기… 핍은.”
“알 필요 없는 사람이래도.”
레온은 눈에 보이는 대로 과자를 쓸어 담았다. 과자점 주인이 눈을 빛냈다.
축제 기간 동안 평균보다 매출이 좋았다. 한데 공자가 그간 팔았던 것보다 더 많이 사가니 웃음을 숨길 수 없었다.
“궁성까지 가져다 놓도록.”
“예, 공자님! 감사합니다!”
바깥이 고요해졌다.
레온은 떠나기 전 이곳을 노려보던 핍의 눈길을 잊지 않았다.
제니레이는 눈치를 보다 결국 입을 다무는 걸 택했다.
“브라운, 아가씨를 거처까지 잘 모셔다드려.”
“예.”
더 이상 함께 있어봤자 이룰 게 없다. 이 정도면 궁성까지 소문이 퍼지고도 남을 것이다.
루시오는 의문을 품고, 타세트는 만족스러워하겠지.
“…고마워.”
그녀가 무엇을 고마워하는지는 알 필요 없다.
레온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발걸음을 돌렸다.
***
“그들이 독 향료를 가지고 있어.”
눈깔들이 아주 맛이 갔다.
레온은 핍의 무리가 분명 독 향료를 가지고 있다고 확신했다.
“제니레이 아가씨는요?”
“글쎄, 일단 몸에 지니고 있는 것 같지는 않던데.”
본래 입고 다니는 옷이 아니니, 그곳엔 없을 것이다.
레온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동안 브라운이 눈을 좁게 뜨고 레온을 바라봤다.
“뭐.”
“…아닙니다.”
아까 유심히 뭘 봤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해명하기도 이상해 레온은 모른 척했다.
“제니레이를 통해 얻어내려면 시간이 더 필요해.”
과자를 산더미처럼 사줬다고 독 향료와 물물 교환 따위는 해주지 않을 것 같으니, 핍 무리를 통해 훔쳐내는 게 낫다. 그게 마음도 편하고.
“악질입니다, 공자님. 엮이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요?”
과연 그랬다. 브라운이 조사해 온 정보에 의하면 핍이란 자는 타세트가 굳이 나설 필요 없는, 껄끄러운 일을 도맡아 하는 그의 그림자나 다름없는 자였다.
평판이 나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얼마나 가혹한지 타세트마저 핍에게 자제하라 이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무척 아끼는 부하랬지.’
핍을 건든다면 타세트를 더욱 자극할 수 있었다.
폰네시 내에서 자신이 가장 아끼는 부하를 곤란한 상황에 몰아넣는다면 동맹 관계에도 상당한 타격이 될 수 있다.
‘달리 독 향료를 가지고 있는 다른 이를 찾아 나서기엔 시간도 없고.’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레온은 결정을 내렸다.
“작전을 짜자, 브라운.”
그들의 행동반경은 이미 브라운이 조사해 왔기에 줄줄 꿰고 있었다.
두 사람이 협탁 위에 문서들을 펴놓고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목적은 두 가지인가요, 공자님?”
“응, 독 향료를 빼앗을 것, 그리고 핍을 엿 먹일 것.”
“전자는 알겠지만 후자의 명분이 궁금하네요. 제니레이 아가씨를 위하실 리는 없을 테고.”
“모시는 주인의 속을 떠보는 건 부집사로서의 도리가 아니라며.”
“옙, 자중하겠습니다.”
타세트를 열 받게 하려는 걸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까지 브라운을 엮어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레온은 새삼 하루 만에 이 모든 정보를 정리해 온 브라운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칭찬할 점은 높이 사는 게 좋겠지.
“참, 브라운. 웬만해서 영지민들은 연루되지 않는 게 좋겠어.”
다른 이들이 엮였다간 생각지 못한 돌발 상황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었다.
레온은 무표정한 얼굴로 핍이 폰네시에 들어와 주로 무얼 했는지 꼼꼼히 살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쪽에서 의심하지 않을까요?”
딱히 설명해 주지 않았지만 브라운은 이미 의도를 완벽히 파악했다.
타세트의 항해단을 골탕 먹이면서도 레온이 했다는 의심은 피해야 했다.
“그자들만 소란에 엮인다면 누가 봐도 일부러 상황을 만든 게 티 날 텐데요, 공자님.”
“안 그래도 우리 쪽도 피해를 볼 사람이 따로 있어.”
레온이 브라운을 빤히 바라봤다. 브라운은 그 보석 같은 푸른 눈동자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준비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님을 위해 제가 이 한 몸 다 바치겠습니다.”
“누가 너래? 나 말이야, 나.”
“예? 공자님께서요?”
“그래, 너도 폰네시의 영지민이잖아.”
브라운은 좀 놀란 듯 말을 잇지 못했다. 무슨 일인지 감동을 받은 것 같기도 했다.
연한 눈동자가 이리저리 갈피없이 흔들리는 걸 보다가 레온이 쯧, 혀를 찼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집안에 종속된 가신까지 지켜야 할 영지민으로 생각할 줄은 몰랐다.
일반적으로 많은 귀족의 자제들은 집사를 소중히 여길 줄 모른다.
때로는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그저 잔심부름이나 하는 인생을 사는 이들도 있었다.
곁에서 능력을 뽐내 봐야 좋게 보는 이들도 별로 없었다.
어차피 중요한 건 집사들이 모시는 주인이다.
곁에서 집사가 무엇으로 도움이 되건 알아주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예, 제가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하겠어요, 공자님.”
해야 할 일은 레온 몬데이어를 위해 사는 것뿐이다. 브라운은 조금 전보다 기분이 꽤나 좋은 듯했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웃는 것까지 관여할 만큼 못되진 않았기에 레온도 입을 다물었다.
“좋은 생각이 났어.”
제법 반복적인 핍의 동선을 살피다 보니 그림이 그려졌다. 태도가 불량한 자들은 늘 그렇듯 술과 유흥에 가까운 법이다.
다만, 이 폰네시의 후계자가 그런 곳에 직접 드나들 수는 없다. 공식적으로 레온은 이 궁성 안에 있어야 했다.
“너, 아까 날 위해 네 한 몸 다 바치겠다고 했지?”
“그, 그렇긴 한데요.”
조금 전 광장에서 그랬듯 레온이 브라운을 아래위로 훑었다.
키가 좀 큰 편이긴 하지만 체격은 누가 봐도 든든함과는 거리가 멀다.
“좋아, 아주 딱이야.”
레온이 내일 벌어질 일을 머릿속으로 계산해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맞은편에 선 브라운만이 레온의 음흉한(?) 눈길을 받아내고 있었다.
***
열흘간 폰네시를 가득 채웠던 손님들이 모두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레온의 탄일 행사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고,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레온이 아프다고요? 어디가 어떻게요? 이런, 가기 전에 인사를 나눠야 하는데.”
“많은 귀빈을 상대하느라 조금 지치신 모양이에요. 피타 공자님의 진심은 제가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잠깐이라도 볼 수 없나?”
“그게….”
쿨럭쿨럭.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안쪽에서 진한 기침 소리가 이어졌다.
메리가 눈썹을 늘어뜨리며 피타에게 다시 한번 안부를 전하겠다고 다독이고 나서야 그가 느린 발걸음으로 사라졌다.
“내가 아주 제 명에 못 살지.”
누구 또 오는 사람이 없나 살펴보던 메리가 이윽고 문을 닫았다.
“쿨럭쿨럭!”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연신 기침을 토해내던 이가 슬쩍, 눈만 내밀었다.
푸른색을 담은 눈동자는 어디 가고 빛을 받아 더욱 연해진 브라운의 눈동자만 빼꼼, 메리를 바라봤다.
“됐어요, 됐어. 이제 아무도 없으니 그만 나오세요.”
“저도 그러고 싶지만 언제 영주님께서 오실지 모르니, 아직 좀 더 있어야죠.”
어째 좀 편해 보인다.
메리가 눈을 좁게 뜨며 의심하자 브라운이 어깨를 으쓱였다.
중요한 손님들이 대부분 돌아갔으니, 이제 슬슬 루시오 공작도 얼굴을 내밀 때가 됐다.
“그나저나 제 얼굴을 확인하시면 어쩌죠?”
곤히 잠든 척을 해볼 요량이지만 이불을 거둔다면 그것도 끝이다.
브라운은 제게 이런 시련을 안겨준 레온의 웃는 얼굴을 떠올렸다. 웬만해선 늘 냉랭한 그 얼굴이 천사같이 나올 때 의심했어야 한다.
“안에 뜨거운 물이 준비돼 있으니 이참에 좀 푹 쉬고 나오세요, 부집사님.”
“…예?”
“아무리 자식 사랑이 지극한 영주님이시더라도 씻고 계시는 것까지 살펴보진 않으니까요.”
“아! 과연 그렇겠군요.”
이불에 둘둘 싸여 있던 브라운이 당장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지난 3일간 레온을 못살게 군 사슴 가죽이라도 들이밀며 몸살을 설명한다면, 루시오 공작도 민망함에 금방 돌아설 터였다.
“그나저나 우리 도련님께 정말 별일 없는 거죠?”
“글쎄요. 지금 뭘 하고 계실지.”
두 사람이 한 사람을 떠올렸다. 이 모든 상황을 만들어놓고 유유히 바깥나들이를 나선 장본인을.
“좋아. 피타도 떠났네.”
레온은 광장 구석에서 폰네시를 나서는 마차 행렬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그중 길라의 크루네 가문 휘장까지 모두 확인하고서야 한숨을 내쉬었다.
‘브라운이 잘해주고 있는 모양이야.’
레온은 오늘 이곳에서 핍과 그 무리를 만날 예정이었지만, 공식적으로는 궁성 내에 남아 있어야 했다.
루시오는 물론이고 그렇게 알고 있는 자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워렌, 가자.”
“예.”
레온이 뒤쪽을 향해 말했다. 어딜 가든 눈을 사로잡는 외모들이라 두 사람은 후드를 깊게 눌러썼다.
어차피 워렌은 속일 수 없다. 늘 시선이 제게 향해 있는 사람이고, 게다가 이번 작전에서 없어선 안 될 중요한 역할이었다.
“지금부터 내가 위험한 짓을 할 거거든, 워렌.”
공자는 설명하지 않는 법이지만 말도 없이 이번 일을 벌였다간 시작도 못 해보고 끝이 난다.
레온은 하는 수 없이 워렌을 어르고 달래야 했다.
“제가 누굴 공격해야 합니까?”
“아니, 너는 가만히 있어.”
“…그럼 공자님께서 공격을 하십니까?”
“아니, 나도 가만히 있을 건데?”
슬슬 다 와간다. 비루한 행색으로 두 사람이 광장 구석 주점 앞에 도착했다.
아직 인파가 모여들 시간은 아니었지만 안을 보니 그곳엔 이미 핍과 그 무리가 모여 노름을 즐기고 있었다.
“내가 저들한테 좀 맞아야 되거든.”
맞는다는 부분에서 워렌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레온의 시선은 이미 핍에게 향해 있었다.
“역시 눈깔이 맛이 가 있네. 좋아. 별로 사리 분별은 잘 못 하겠어.”
독 향료를 훔쳐내기 위해선 반드시 핍의 옷 속을 수색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쉬운 방법은 핍과 함께 저 주점 바닥에서 치고받고 구르는 일이었다.
빌미는 이쪽에서 만들지만, 잘못은 반드시 저들만 해야 한다. 괜히 타세트에게 좋은 먹잇감을 쥐어줄 순 없으니.
“그러니까 지켜보다가 내가 너무 많이 맞기 전에 날 구해.”
“예, 공자님.”
“나보다 쟤네 상처가 더 많으면 곤란하니까 위협 정도만 하고.”
후드 아래 워렌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도 그를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들어갈게.”
레온이 짧게 심호흡을 내뱉고 술 냄새 가득한 주점의 문을 열어젖혔다.
“어서 오세요~!”
딸랑.
머리 위에선 공간과 어울리지 않는 경쾌한 종소리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