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4장. 얻기 위해 버릴 것(3)
“에일 두 잔과 먹을 것 아무거나.”
“예! 금방 내오겠습니다, 도련님!”
레온이 익숙하게 자리를 찾아 앉는 동안 워렌은 그 옆에 꼿꼿하게 서 있었다.
“뭐 해. 안 앉아?”
지키는 호위 기사인 걸 어디 알리기라도 하려는지 태도가 몹시 올곧았다.
레온이 쯧, 짧게 혀를 차고 맞은편을 가리켰다.
“앉아. 몇 시간 정도는 기다려야 하니까.”
“예.”
이 말도 없고 정적인 기사와 도대체 무얼 하며 몇 시간을 보내야 할지는 레온에게도 문제였다.
그렇다고 주점에 앉아 말없이 에일만 홀짝이는 것도 영 수상쩍은데.
“…….”
“…….”
달리 할 말이 없다. 워렌은 여전히 바른 자세로 무릎 위에 살짝 말아 쥔 주먹을 올린 채 앉아 있었다.
차라리 브라운을 데리고 올 걸 그랬나. 적어도 브라운은 종알종알 쉬지 않고 주변 정세나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떠들어댔을 것이다.
‘아니지. 브라운은 아마 내가 서른 대를 맞아도 구해주지 못할걸.’
본 목적은 핍을 이용해 분란을 만드는 것이었기에 레온은 적막을 조금 견뎌보기로 했다.
“에일과 더불어 우리 주점이 자랑하는 최고급 안주입니다!”
그때 고요한 두 사람 사이를 뚫고 종업원이 달려왔다.
에일이 흠집 난 테이블 위에 급하게 놓였다.
더러운 걸 몹시 싫어하는 레온이었지만 잔에 흘러내린 잔해 따위는 봐줄 정도로 타이밍이 좋았다.
“자! 바다에서 민물까지 흘러들어 오는 어종으로 만들어 육질이 아주 쫄깃합니다. 한번 드셔보세요!”
만들어뒀던 안주를 도로 내온 게 틀림없다. 기름진 생선이 두 눈을 부라리며 조각난 레몬과 함께 테이블 위에 세팅됐다.
“난 생선 안 먹는데.”
“예, 예?”
노릇노릇해진 눈알이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7년간 인간 노릇을 했다지만, 수천 년 동안 바다의 주인으로 군림한 전적이 있다.
근데 생선을 먹으라고? 후드에 가려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레온의 목소리가 무척 좋지 않았다.
“값은 치를 테니 다른 안주를 다시 준비하는 게 좋겠군.”
“예, 예?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야 감사하지요! 새로운 걸 내오겠습니다!”
워렌이 생선 요리를 치우고 에일 잔을 매만졌다.
그제야 레온도 손을 뻗어 흘러내린 에일을 손끝으로 훔쳤다.
“생선은 왜 안 드십니까?”
용케도 먼저 입을 열었다.
기껏 고민한 물음이 생산성 없는 부류였지만, 레온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대답했다.
“물고기가 불쌍해서.”
“…예?”
“왜.”
레온의 입에서 튀어나온 질문이 상상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이다.
내 마음이야, 라거나. 고기가 더 맛있으니까, 정도의 대답을 예상했는데.
“먹고 싶어서 그래? 그럼 먹어. 내가 불쌍해하는 거지 남까지 그러라고는 안 하니까.”
“…감사합니다.”
공자치곤 상당히 이타적인 배려였다. 물론 워렌은 음식에 손도 대지 않았다. 에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레온을 지켜야 하는 순간이 언제 닥칠지 모른다. 그러니 다른 행동에 정신을 쏟는 건 불필요한 일이었다.
“대뜸 소란을 벌일 생각은 없어. 좀 기다려야 할 거야.”
“저쪽에 있는 무리들입니까?”
“그래, 워렌.”
“달리 제가 알아둬야 할 작전은 없습니까?”
“조금 지켜보다가 내가 너무 맞기 전에 저자를 치우면 돼.”
“치워요?”
“응, 저 자식이랑 치고받고 바닥을 뒹굴 거거든.”
대단한 계획이랄 것도 없다. 술과 독 향료에 찌들어 제정신도 아닌 핍에게서 독 향료를 빼앗을 방법은 아주 단순하고 간단했다.
시비가 붙어 몸싸움까지 이어진 순간 바닥에 뒹굴어 훔쳐내는 것이 계획의 전부였다.
‘독 향료는 확실한 물증이 되어줄 테니까.’
단순히 주점에서 영지민과 소란을 벌인 것 정도로는 타세트에게 위협이 되지 못한다.
레온은 핍에게서 독 향료를 훔쳐내 타세트도 구해주지 못할 만한 일을 벌일 작정이었다.
“…….”
워렌이 맞은편에 앉아 레온을 살폈다. 후드에 가려 있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평소와 달리 독한 입이 얌전했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
위험한 일을 벌일 것 같다는 추측은 당연했다.
공자는 궁성에 앉아 손가락만 까딱하면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럼에도 직접 이곳까지 나와 움직이는 걸 보니, 말은 그래도 이번 일에 몹시 신중을 기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됐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판단은 하지 않는다. 워렌은 잠시 스쳐 지난 생각을 잠재우며 다시 레온을 바라봤다.
그저 공자의 명대로, 레온이 움직이라는 대로만 하면 된다. 제 역할은 그것뿐이다.
“워렌, 아무 얘기나 좀 해봐.”
이것도 명이라면.
“검술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기껏 시켜서 한다는 말이 다른 것도 아닌 검술이라니. 레온은 기대도 안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워렌은 레온이 시키는 대로 제가 알고 있는 검술의 기본기를 줄줄 외우기 시작했다.
***
때가 됐다.
이런 식으로 기회가 올 줄은 몰랐지만, 핍의 기본기가 저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이라 손쉽게 껴들 타이밍이 닥쳤다.
“지, 진정하세요.”
“이거 안 놔?”
에일을 여섯 잔쯤 마시자 창밖은 완전히 어둠이 내렸다.
밤이 되니 축제 기간 동안 바빴던 주변 상인들도 피로를 풀기 위해 주점으로 몰려들어 인파가 상당했다.
“수준 안 맞는 자식, 시간 내서 영 재미 좀 보게 만들어 놨더니 이제 와서 내빼?”
“시, 실버가 없는 것을 뭐 어쩌란 말이오! 게다가 조금 전부터 계속 같은 카드만 내는 게….”
“뭐라 말했어?”
핍이 단박에 넓은 테이블을 밀어뜨렸다. 시끌벅적한 주점이 금세 고요해졌다.
“내가 바다에 부끄러운 짓이라도 했다는 거야, 지금?”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널려 있던 카드와 술잔이 모두 쏟아져 바닥을 더럽혔다.
핍이 함께 어울리던 상인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말리려는 주변 이들은 핍의 일행이 막아섰다.
“바다의 자식은 그런 짓 따윈 하지 않는다!”
“사, 살려주시오.”
상인의 손이 덜덜 떨렸다.
가까이서 마주 본 핍의 생기 없는 눈동자가 아주 이상했다. 안광이 하나도 없었다. 어디를 보는 건지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기묘하고 섬뜩한 눈동자를 마주하자 등 뒤에서 소름이 오스스 돋아났다.
“뭐래. 조금 전부터 지켜보니 패를 숨겨놓고 아주 약아빠졌던데.”
드르륵.
남김없이 에일을 마셔 넘긴 레온이 의자를 밀고 일어섰다.
어둠 속에서 채도 낮은 로브를 뒤집어쓴 자가 튀어나오자 핍도, 주변 사람들도 모두 시선을 돌렸다.
“엿 먹이려고 작정하고 판을 깐 주제에 그만하겠다는 사람을 붙잡는 건 좀 치사하지 않냐?”
듣고 있는 핍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돌변했다.
레온이 설설 웃으며 중앙으로 다가갔다.
“고작 몇 실버 더 얻겠다고 그러고 있는 게 웃기잖아. 내가 적선할 테니 그 사람은 놔주는 게 어때?”
레온의 뒤로 워렌이 바짝 붙었다. 핍을 지키는 덩치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존재 자체로 위압감이 느껴졌다.
“자, 여기.”
쨍그랑.
레온이 별것 아니란 투로 실버를 나무 바닥에 던졌다.
방금 전 쏟아진 술과 음식이 너저분하게 스며든 얼룩 위에 실버가 나뒹굴었다.
“이 새끼가!”
과연 도발이 먹혔다. 수준이 낮은 자식은 몇 마디 말로도 엮어낼 수 있는 게 당연한 일이다.
레온은 위협적으로 달려드는 핍의 다리를 걸고 넘어졌다. 그러곤 곧장 넘어진 핍의 위에 올라타 멱살을 움켜쥐었다.
“마, 말려야 하는 것 아니오?”
광분한 핍이 레온에게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레온은 그런 와중에도 워렌에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 독 향료를 빼앗지 못했다. 어디다 숨겨뒀는지 멱살을 쥐고 가슴께를 샅샅이 뒤져도 도통 집히는 게 없다.
“네가 바다의 자식이면 나는 바다의 주인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바다를 욕보이지 마라!”
“너만 가만있으면 그럴 일 없을 거 같거든?”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주점에 모인 사람들이 쓸데없는 일로 바닥을 구르는 두 사람을 보며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소란은 벌이지 말랬는데.
핍의 무리들만 안절부절못하고 불안한 눈초리로 주변을 살피던 순간이다.
“너! 목숨이 값어치 없나 본데 내가 이참에 없애주지.”
한참을 옥신각신하고도 분이 안 풀리는지 핍이 허리춤에서 날이 선 나이프를 꺼내들었다.
“…….”
“왜, 이제 조금 무서워?”
일순 주변이 고요해졌다.
레온의 명만 기다리던 워렌의 눈빛도 차갑게 내려앉았다.
“조잘거리던 주둥이는 왜 딱 붙어버렸지? 바다의 주인께서 두려움을 느끼는 건가?”
핍이 비열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혀를 내어 서슬 퍼런 칼날을 핥았다.
보랏빛으로 시커멓게 돌변한 혓바닥이 칼날을 피로 물들였다.
‘제길.’
상황이 안 좋다. 독 향료는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는 줄도 모르고.
핍은 내내 독 향료를 물고 있었다. 불에 태우거나 물에 타거나 할 정도로 정제된 독 향료가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까분 대가는 톡톡히 치러야 할 거다, 이 꼬맹이야.”
핍이 히죽거리며 나이프를 높게 쳐들었다.
이런! 큰일 나겠다!
지켜보던 상인이 워렌을 부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응? 방금 전까지 여기 있었는데?
생각한 순간 소란의 근원지에서 비명이 오고 갔다.
“윽!”
“안 돼, 핍!”
갑작스레 남자와 여자 한 명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는 줄곧 얻어맞던 자를 단숨에 보호했고, 똑같이 후드를 뒤집어쓴 여자는 나이프를 휘두르는 남자의 가슴팍을 밀쳤다.
“이런!”
“다치겠어요!”
레온이 워렌의 품에 안겨 있다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피 묻은 입가가 고개를 돌리는 틈에 더욱 찢어져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제니레이?”
시선 끝에 이제는 익숙해진 뒷모습이 보였다. 핍을 막기 위해 몸을 내던진 건 제니레이였다.
달려드는 틈에 흘러내린 후드에서 새카만 머리칼이 쏟아져 나왔다. 커다란 눈이 핍을 올려다보며 두려움에 일그러졌다.
“이, 망할 계집이.”
“으으윽!”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분이 풀리지 않는다. 핍을 밀치며 팔뚝을 길게 베인 제니레이가 그가 휘두르는 주먹에 금세 쓰러졌다.
주변에서 지켜보던 모두가 비명을 질렀다.
근데 저 새끼가.
레온이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제니레이의 앞을 막아섰다.
“그만.”
어째서 갑자기 제니레이가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
왜 이곳에 숨어 있다 위험한 일이 터지기 직전에 핍을 말리고 자신을 구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봐주려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네.”
레온이 뒤편에 서 있던 워렌을 응시했다. 그가 곧장 쓰러진 제니레이를 부축했다.
“네놈이 감히 이 폰네시에서 소란을 일으켜?”
레온이 찬찬히 후드를 벗었다.
어두운 후드를 벗자 레온의 은백색 머리칼이 어깨 끝에서 찰랑였다.
몬데이어 공작가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그 머리칼을 보자 주변에 모여들었던 영지민들이 모두 레온의 발치에 엎드렸다.
“레, 레온 공자님이다!”
“공자님! 어찌 이런 곳까지!”
“보나 마나 우리 영지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지켜보고 계셨던 게지!”
이 폰네시의 후계자를 두드려 팼으니 제 죄가 없다고 발뺌은 하지 못할 것이다. 이곳에 모인 모두가 증인이었다. 게다가.
“…….”
레온이 쓰러진 제니레이를 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피를 본 사람도 생겼다. 잘만 짜 맞춘다면 생각했던 것보다 일을 키울 수도 있으리라.
“너, 죗값은 치러야겠지?”
레온이 흐리멍덩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핍에게 웃어주었다.
“워렌, 이자를 끌고 가. 우리 영지의 법대로 처리한다.”
과연 천사의 미소라고 할 만큼 아름다운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