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4장. 얻기 위해 버릴 것(4)
“흑, 난 그런 줄도 모르고….”
레이디를 위해 손수건을 준비하는 건 부집사가 할 일이었다.
브라운이 잘 접어놓은 손수건을 제니레이에게 건넸다.
“고마워요. 흐으윽.”
제니레이가 팽, 코를 풀었다.
레온은 그 앞에 다리를 꼬고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다 울었어?”
진정세가 보이길 한참 기다린 뒤 물었다. 브라운이 의외라고 생각할 정도로 다정한 목소리였다.
“이제 괜찮아… 고마워, 레온.”
얻어맞은 충격으로 잠시 정신을 잃었지만 이제는 괜찮다.
팔에 세로로 깊고 길게 베인 자상도 메리가 모두 상처를 돌보아 주었다.
“제니레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레온이 제니레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고개를 돌려야 하나?
브라운이 눈치껏 상황 판단을 하고 있을 때, 레온이 그녀의 어깨를 지그시 붙잡았다.
“그럼, 이제 말해.”
“…….”
“어째서 내가 하려는 일을 방해한 건지.”
기대한 것과 달리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깨를 붙잡은 손엔 힘이 들어갔다.
“왜 나를 미행했지? 누가 시키기라도 했나?”
가까이서 바라본 레온의 표정엔 분노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내뱉는 말엔 이미 신뢰가 전혀 없어 제 행동을 부끄럽게 만들었을 뿐이다.
“…부탁할 게 있어서 그랬어.”
다만, 제니레이에게도 이유는 있었다.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게 도와줘.”
“폰네시에 머무르고 싶단 뜻인가?”
“그럼 좋겠지만, 나와 결혼해 줄 생각은 없잖아?”
“없어.”
단호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제니레이는 상처받지 않았다.
“그럼 내가 도망갈 수 있도록 도와줘. 아니, 모른 척만 해줘.”
그 부탁을 하기 위해 찾아갔다.
거처를 나서는 수상한 뒷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하루 종일 기침만 하는 브라운에게 털어놓을 뻔한 이야기였다.
“아버지는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며 전리품을 얻어내듯 어린아이들을 납치하지.”
그렇게 얻은 아이는 타세트에겐 그저 물건이었다.
필요에 따라 교환을 할 수도, 경우에 따라 버릴 수도 있는 가치 없는 물건.
“핍은 값어치가 있을 만한 아이들을 물색하고 그들을 납치하는 일을 대신해.”
제니레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너무도 어릴 적에 붙잡혀 몰랐지만, 수상한 핍의 행적과 함께 자라온 아이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걸 보며 알게 됐다.
쓸모가 있으면 팔아넘기고, 더 이상 가치가 없으면 죽게 되는 게 납치된 아이들의 운명이었다.
“아버지의 곁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간 얼마나 나쁜 짓을 많이 했는지 몰라.”
살기 위해 남의 인생을 멋대로 결정했다.
아이들의 목숨이라도 살리는 일이라고 위로했지만, 결국엔 그들의 삶을 빼앗았다.
“더 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어.”
필요한 아이들을 고르고 적재적소에 그 아이들의 쓰임을 결정했다.
그러다 제니레이가 마지막으로 결정한 인생은 바로 자신의 것이었다.
“폰네시의 후계자와 결혼을 해 동맹을 공고히 할 것.”
“그게 네가 정한 네 역할인가?”
“그래, 이 일이 어긋나면 나는 어차피 죽게 될 거야.”
더 이상 가치가 없어진다. 타세트는 가치가 없는 자에겐 두 번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네게 살려달라고 하지 않을게. 내 목숨을 구하자고 네 인생까지 말려들게 만들지도 않을게.”
그저 배에서 내려 도망이라도 쳐보고 싶다.
남의 인생을 망쳐놓으며 살기 위해 발버둥 쳤던 그 힘을 이제 도망치는 데 써보고 싶을 뿐이다.
“그러니까 도망치게만 해줘. 살아만 있다면 내가 네게 언젠가 반드시 도움이 될 거야.”
속을 알 수 없는 어두운 눈동자가 레온을 응시했다.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이지만.’
적어도 가치 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값은 지금 치러.”
훗날의 도움은 필요 없다.
“네가 가지고 있는 독 향료를 줘.”
“…도, 독 향료를 네가 어떻게 알아?”
“그게 중요해? 배에서 내리는 게 더 중요하지 않나, 제니레이?”
살기 위해 모든 걸 버리는 사람은 반드시 살아남는다. 그녀는 이곳을 빠져나가 반드시 살게 될 것이다.
레온은 그걸 알았다. 언젠가 제니레이가 자신에게 반드시 도움이 될 거란 것도.
“그러니 네가 원하는 삶을 살아.”
레온이 손을 내밀었다. 제니레이가 조심스레 그 손을 맞잡았다.
***
레온은 브라운에게 두 가지의 명을 내렸다.
제니레이를 안전하게 폰네시 궁성 밖으로 내보내 줄 것, 그리고 영지민들에게 소문을 하나 낼 것.
“그런 소문은 왜 내신 겁니까?”
지하 감옥으로 가는 도중 워렌이 물었다. 시키는 대로 이행만 하는 워렌답지 않은 물음이었다.
“궁금하긴 했나 보네. 그런 걸 다 묻고.”
“주점에 간 일은 숨겨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랬지.”
원래 계획은 그랬다.
그곳에서 그 누구도 모르게 독 향료를 훔쳐내고, 타세트의 항해단이 공자의 거처를 습격했단 일의 증거로 삼으려 했으니 말이다.
“근데 다들 봐버렸잖아. 소문은 막는다고 막아지는 게 아니야.”
제니레이가 껴드는 바람에 일이 틀어진 이상, 곧장 새로운 수를 생각해 내야 했다.
“저 자식이 그간 우리 영지민들을 괴롭혀 준 덕분에 고민을 덜었지.”
어두컴컴한 지하 감옥에 도착했다.
레온은 그곳에 갇혀 저를 노려보는 핍을 마주했다.
“안색이 나쁘네. 워렌이 친절하게 굴지 않은 모양이지?”
“이 개자식!”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워렌이 지하 감옥의 문을 열었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데.”
어두컴컴한 것만 빼면 춥지도 않고 공기도 쾌적하다.
레온이 좁은 지하 감옥 내부를 둘러보다 이내 핍에게 시선을 주었다.
“야, 내가 조금 전에 소문을 하나 냈거든.”
자세를 낮춰 안광 없는 눈빛을 마주하고 나니 몹시 불쾌하다.
이 초점 없는 눈으로 얼마나 많은 아이들을 납치했을지. 레온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네가 이 폰네시의 후계자를 죽이려 했다고 말이야.”
“내가 언제!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냐, 이 대륙 놈들.”
레온이 손을 뻗었다. 묶여 있는 통에 핍은 레온이 하는 양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여기 어디 있을 텐데.”
꿇어앉힌 몸을 더듬는 건 이쪽에서도 상당히 불쾌한 일이었다.
허리춤을 몇 번 뒤적이고 나서야 레온이 목표한 바를 찾아냈다.
“지금쯤 폰네시에 파다하게 소문이 퍼져나갔을 거야. 네가 주점에서 내게 칼을 휘둘렀고, 그 탓에 내가 아주 크게 다쳤다고.”
레온이 찾아낸 칼을 핍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그제야 핍의 생기 없는 두 눈이 흔들렸다.
“하, 하지만… 그게 거짓이란 건 그곳에 있는 모두가 봤다!”
칼을 휘두르긴 했지만 그곳에서 상처를 입은 건 제니레이였다.
“네가 다치지 않았다는 걸 모두가 봤는데 그딴 소문이 통할 리 없지!”
“과연 그럴까?”
레온이 서슬 퍼런 칼날을 핍의 목 가까이 위협했다.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반드시 피를 볼 정도로 가까웠다.
“지난 며칠간 네가 그곳에서 부린 행패를 기억하는 자들은 몇이나 될까?”
제멋대로 굴며 주변 상인들 모두에게 위협이 되었던 지난 시간은 되돌릴 수 없었다.
“네 억울함 따위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 아무렴 정체도 모르는 자보단 이 폰네시의 후계자 안위가 더 중요하겠지.”
설령 진실을 본 자들이 있다 하더라도 사람들의 분노 앞에 그깟 사실은 보잘것없는 일이 된다.
아직 거리는 공자의 탄일을 축하하는 분위기가 남아 있었다.
모두가 몬데이어 공작가가 베푼 은혜를 풍족히 누린 기억을 잊기도 전이다.
그런 순간 공자를 위협했으니 영지민들의 가슴이 분노로 들끓을 만도 했다.
“넌 지금부터 날 죽이려 한 공자 시해자야.”
“……!”
“그간의 죗값을 치르게 해줄게.”
탁, 레온이 핍의 눈앞에서 나이프를 거두었다.
그러곤 더 이상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발걸음을 돌렸다.
***
거처로 돌아온 레온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기에 워렌은 레온의 골몰한 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
함께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레온은 늘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도통 어떻게 나올지 전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곤란한 부탁을 할 때도 있었다.
‘명령을 가려들을 건 아니지만.’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명심할 건 그것뿐이었으나 웬일인지 워렌은 이번 일이 자꾸만 신경에 거슬렸다.
“워렌.”
“예.”
내내 생각에 잠겨 있던 레온이 시선을 돌렸다.
“밤이 되면 그자를 풀어줘.”
따라야 하는데.
“잡아두지 않으십니까?”
다행히 공자는 별달리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 풀어주는 거야.”
물론 내뱉은 말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워렌은 레온의 대답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좀 피곤한데. 이만 물러가도록 해, 워렌.”
“예, 공자님.”
“참, 오늘은 숙소로 돌아가서 푹 쉬어. 그간 고생했잖아.”
지난 축제 기간 동안 궁성을 지키는 기사들의 피로도가 매우 높았다.
워렌도 마찬가지였다. 레온은 바빴고, 그를 지키기 위한 워렌 역시 전혀 쉴 수 없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토 달지 않는다. 그래, 시키는 대로 그저 따라야 한다.
워렌이 짧게 인사를 남기고 거처를 벗어났다.
“…….”
홀로 남은 레온은 주변이 고요해지길 기다렸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루시오도 내 진심을 외면하진 않겠지.’
레온이 테라스로 나섰다. 축제가 물러간 폰네시의 밤은 평화로웠다.
내일이면 그 평화가 깨지게 된다. 레온은 그러기 위해 선택을 했다.
“소문을 진실로 만들어야지.”
퍼져나간 소문이 진실이 되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져야 한다.
타세트도 핍을 구할 수 없는 확실한 물증이 되어 루시오가 그를 의심하게 만들어야 했다.
레온이 손을 뻗었다.
나이프와 독 향료. 두 가지를 번갈아보다 레온은 나이프로 작은 유리병을 깨뜨렸다.
금세 칼날에 독 향료가 묻어났다. 혀끝을 내어 칼날에 독 향료를 새기던 핍의 행동과 같았다.
‘라피스가 있으니 괜찮아.’
죽지 않는다. 비록 라피스가 좀 소진될지라도 큰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레온이 독 향료를 묻힌 칼날로 제 팔을 깊게 짓이겼다. 심장을 노린 자를 막기 위해 발버둥친 것처럼 뼈가 보일 정도로 거세게 눌렀다.
“…윽!”
팔에서 고통이 퍼져나갔다. 상처를 조각조각 내는 듯한 뜨거운 열감도 함께였다.
쨍그랑, 날카로운 나이프가 테라스에 나뒹굴었다.
과연 독 향료의 기운이 퍼지는지 레온은 온몸에 힘이 점차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더럽게 아프네.”
숨을 쉴 때마다 고통이 온몸으로 번져나갔다.
레온은 테라스에 주저앉아 뚝뚝, 흘러내리는 검붉은 피를 바라봤다.
이 일로 루시오 공작은 제 진심을 알게 될 것이다.
타세트를 밀어내기 위해 이렇게까지 일을 꾸민 노력을 가상하게 여겨 다시 한번 그와의 동맹을 고려해 주겠지.
그거면 된다.
폰네시는 그 누구에게도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향후 400년간의 흐름을 모두 알고 있는 내가 막을 테니까.
“…….”
점차 의식이 희미해졌다. 눈앞이 흐려지며 온몸의 감각이 무뎌지는 것을 느꼈다. 이러다 숨을 쉬는 것도 잊게 되면 어떡하지.
쓰러진 레온이 두 눈을 감기 직전, 어둡고 고요한 침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다가오는 누군가가 보였다.
“공자님!”
워렌이 빠르게 다가와 레온의 상태를 확인했다.
“너….”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내가 지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워렌이 레온의 얼굴을 똑똑히 바라봤다.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을 보자 화가 났다.
“아뇨. 전 공작 저하의 명을 따릅니다. 그분이 공자님을 지키라 하셨으니 그분의 명을 따릅니다.”
그러니까 공자가 제멋대로 위험에 빠지는 걸 모른 척 두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워렌이 재빠르게 레온을 안아 들고 거처를 나섰다.
엉망으로 흔들리는 시야를 겨우 붙잡고 레온이 말했다.
“메리에게 가.”
“하지만.”
“…명이다, 워렌.”
이 정도는 들어주겠지.
워렌이 정신을 잃은 레온을 바라보며 발걸음을 서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