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5장. 약속의 땅(1)
독 향료는 신경계를 자극해 환각이나 환청을 만들어냈다.
약초로 정제했다 하더라도 독성이 강해 조금만 잘못 쓰면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을 만큼 위험했다.
여긴 궁성인데.
레온은 브라운의 설명을 통해 지금 눈앞에 펼쳐진 모든 게 환각이란 걸 알았다.
익숙하지만 낯선 폰네시 궁성이 보였다. 은은한 암청색을 담은 석벽 부근은 이제는 폐쇄된 레브의 거처였다.
누구지?
안쪽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레온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했다.
어린 날 잠시 머물렀던 레브의 침실이다. 벽에 걸린 초상화가 벌써 아득한 기억처럼 눈을 사로잡았다.
‘언제 깨어날까요?’
‘할 수 있는 건 모두 했으니 좀 더 두고 볼 수밖에요.’
가장 먼저 보인 건 쓰러져 있는 레브의 모습이었다.
잠시 잠깐 누렸던 어린 공녀의 모습 그대로 은백색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채 잠들어 있었다.
그럼 넌 레온이겠구나.
어깨 끝에서 구불거리는 짧은 머리칼과 레브의 창백한 뺨을 쓰다듬는 손길에 확신했다.
다만, 침실 안에 알 수 없는 자가 한 명 있었다.
허리가 굽고 몹시 왜소한 체구의 노인이었다.
‘라리카로 언제 돌아가십니까?’
‘글쎄요. 어쩌면 조금 빨라질지도.’
노인이 시선을 돌렸다. 레온이 서 있는 곳이었다.
이곳을 보는 것 같기도, 아니면 허공을 응시하는 것 같기도 한 눈먼 자의 시선에 레온이 주춤했다.
‘언젠가는 진실을 밝혀야 할 겁니다, 도련님.’
‘그럼요. 레브가 깨어난다면 내가 모든 걸 말해줄 거예요.’
‘물론 그럴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요.’
‘예?’
노인이 미소 지었다.
그 주름진 얼굴을 마주하자 가슴께 어딘가가 아팠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던 몸의 감각이 점차 돌아오는 것도 선명했다.
레온이 무릎을 꿇었다. 이상한 기분에 숨을 헐떡거렸다. 그러자 침대 위 레브가 꿈틀거렸다.
‘레브!’
내내 감고 있던 눈가가 찌푸려졌다. 깨어나고 싶지 않은 것처럼 한참을 발버둥 치던 레브가 그 순간 번쩍, 눈을 떴다.
“…윽!”
암청색 석벽이 물러가고 시야에 잡힌 건 밝고 환한 빛이었다.
“도련님!”
메리가 드디어 깨어난 레온을 보고 비명처럼 울부짖었다.
곁을 지키고 있던 브라운과 워렌, 그리고 루시오의 명을 받은 가신들 역시 레온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도련님, 괜찮으신 거예요? 어디, 어디 아픈 곳은요?”
귓가가 먹먹했다. 레온은 방금 전까지 기억 속에 남아 있던 것들이 곧바로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괜찮아.”
메리가 뭐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듣는 귀가 평소보다 많은 탓이었다.
“공자님께서 깨어나셨으니 영주님께 보고를 드리는 게 좋겠습니다.”
“예, 부집사님.”
루시오가 보낸 가신들이 서둘러 거처를 벗어났다.
메리가 레온을 부축하고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한참이나 입술을 씹었다.
“버들가지 즙이 아니었다면 정말 큰일 나셨을 거예요.”
“버들가지 즙?”
“부집사님께서 어쩐 일인지 그게 효과가 있을 거라고 알려주셨는걸요. 아무튼 식사를 좀 내올게요!”
메리가 호들갑을 떨며 사라졌다.
“제니레이 아가씨께서 떠나시기 전 일러주셨습니다.”
해독 효과가 있다는 브라운의 설명에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지독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상황은?”
“말도 마세요.”
레온이 쓰러진 직후 워렌은 레온의 뜻대로 그를 메리에게 맡겼다.
그리고 곧바로 지하 감옥으로 가 핍을 풀어주었다.
“무슨 일인지 그자들이 지하 감옥을 탈출했더라고요. 덕분에 상황이 쉬웠어요. 영주님의 명으로 그자들을 잡아들일 수 있었거든요.”
루시오는 곧장 타세트와 함께 있는 무리들을 잡아들였다.
이 일로 타세트도 핍을 구할 수 없었다. 레온이 목숨을 위협받았고, 하필이면 그를 잡기 위해 온 순간 핍과 함께 있었으니 말이다.
“자칫 잘못하면 자신도 엮여들 게 분명한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래서 타세트는 핍을 버리기로 결정했다.
폰네시의 후계자를 독살하려 했다는 누명을 벗겨줄 마음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광장에 떠들썩한 소문도 이미 보고받으셨고, 공자님께서 사경을 헤매시는 것도 확인하셨어요. 독 향료를 바른 나이프도 발견하셨고요.”
타세트의 수하를 손에 넣을 빌미기 완벽해진 것이다.
“물론 공자님께서 이 일을 꾸미신 거란 걸 눈치채신 것 같지만요.”
그건 괜찮다.
루시오 공작처럼 똑똑하고 분별력 빠른 사람이 이 상황을 의심도 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실망했을 것이다.
“아버지를 뵈러 가야겠어.”
“지금은 안 됩니다.”
“안 됩니다, 공자님!”
내내 고요하던 워렌과 브라운 두 사람이 동시에 소리쳤다.
레온이 무표정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둘 역시 서로를 쳐다보다 이내 반대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명령을 내리는 쪽은 나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죠. 저희는 공자님을 지키는 쪽이죠.”
아무튼 눈을 뜨자마자 움직이는 건 막아야 했다.
브라운이 쉬지 않고 가선 안 되는 이유를 줄줄 읊는 동안, 워렌은 말없이 거처의 문을 딱 지키고 섰다.
하여간 저 구황 작물은 뭐든 지키는 게 최우선이다.
“알겠으니까 그만하고 둘 다 물러가. 좀 쉬어야 하겠으니까.”
“죄송하지만 메리 부인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여기 있겠습니다.”
“혼자는 안 둡니다, 공자님!”
이것들이 진짜.
레온이 푸른색 눈으로 두 사람을 쏘아봤지만 도통 통하지가 않았다.
“맘대로 해라, 맘대로 해.”
지금은 화를 내고 고집을 부릴 기력도 없었다.
레온이 멀쩡한 팔을 들어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제 눈앞을 가려버렸다.
“커튼을 쳐 드리겠습니다.”
용케도 브라운이 레온의 뜻을 알아챘다.
드넓은 침실의 빛이 물러났다. 순식간에 세 사람 모두 고요함에 파묻혔다.
***
언제 터질지 모를 것 같던 긴장의 분위기가 가셨다.
태양의 절기는 지나갔고, 혹한의 절기로 향하는 길목에 서서 하늘은 점차 높아져만 갔다.
우리 영지성에 주둔해 있던 데로니스 감시관이 완전히 철수했어.
아버지와 형이 그들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이유를 캐물었지만 반응이 쌀쌀맞은 걸 보니 아무래도 우리에 대한 관심이 완전히 사라졌나 봐.
글자에서 신남이 느껴졌다.
레온은 센느의 덴 토바로부터 온 편지를 읽으며 미소 지었다.
지난번에 미리 일러준 대로 폰네시에서 식량과 자원도 도착했어.
정말 고마워, 레온. 이걸로 이번 혹한의 절기는 모두가 버틸 수 있을 거야. 다만… 앞으로는 어쩌지?
네게 부담을 줘서 미안해. 하지만 데로니스도 철수한 마당에 우리가 기댈 곳은 폰네시밖에 없어, 레온.
핍과 제니레이를 잃은 타세트는 분노를 참지 못했다.
더 이상 폰네시에 남아 있다간 이곳을 불바다로 만들지 모르니, 이만 떠나겠다는 위협도 숨김없이 드러낼 정도였다.
타세트가 이를 감추고 사라진 직후 레온은 센느로 식량과 자원을 보냈다.
폰네시를 손에 넣을 방법을 잃은 데로니스 세력은 우선 한숨을 고르기로 작정한 듯했다.
센느에 주둔해 있던 그들 세력을 도로 불러들이고, 센느는 다시 황량함만 머무르는 땅이 됐다.
“공자님, 브라운입니다.”
“들어와.”
서재에 있던 레온이 고개를 들었다. 늘 그렇듯 브라운이 방긋 웃으며 다가왔다.
“영주님께서 만찬을 함께하자고 하십니다.”
“으음, 혼날 때가 된 건가.”
“그렇진 않을 거예요. 그럴 이유도 없으시고요.”
하긴, 일을 꾸짖을 작정이었다면 늦어도 한참 늦었다.
레온은 태양이 물러나는 동안 얌전히 루시오의 눈치를 봤다.
그는 모든 외부 일정을 취소하고 궁성에 틀어박혀 서대륙의 정세를 살폈다.
“아무래도 타세트 쪽의 정보를 놓치신 게 신경 쓰이셨겠죠. 물론 저도 놓친 게 많았지만요.”
“대륙과는 달라. 그들의 주 무대는 바다잖아. 해류를 타고 돌아다니는 자들의 정보는 아무리 수집해도 모자랄 수밖에 없지.”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편안해지네요, 공자님.”
바다를 누비는 그들은 대륙에 묶여 있는 우리보다 훨씬 자유롭다.
제니레이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그들이 무슨 흉악한 일을 벌이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들이 데로니스 쪽과 손을 잡기로 한 것도 알 수 없었다.
덴의 결단이 아니었다면 모르고 당했겠지.
“제니레이는 어떻게 됐어?”
“동쪽으로 가는 것까진 확인했지만, 그 이후로는 행적을 놓쳤습니다.”
“잘 빠져나간 모양이네. 그래도 더 찾아봐. 기껏 도망쳤는데 다시 붙잡히게 둘 순 없지.”
브라운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혼담이 오고 갔던 아가씨를 끝까지 책임지려 하는 모습에 조금 감동한 것은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가자.”
시간이 다 됐다.
레온은 브라운과 워렌을 거느리고 만찬을 들기 위해 거처를 나섰다.
“공자님.”
중정을 지나 루시오의 거처에 다다르자 대사제가 보였다. 영주를 뵙고 오는 길인지 방향이 그랬다.
“오랜만입니다, 대사제.”
“제가 보낸 보식과 약은 모두 드셨겠지요?”
“덕분에 이렇게 싹 나았지.”
“직접 상처를 돌볼 수 있다면 더 좋았을 텐데요.”
신의 뜻을 받들어 더욱 효험 있는 방도로 레온을 낫게 할 수도 있었다.
대사제가 아쉬움과 걱정에 레온을 샅샅이 살폈다.
“나는 메리가 아니면 좀 부끄러움이 많아서.”
공자께서?
뒤편에 서 있던 브라운이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금세 지워버렸다.
워렌 역시 레온이 부끄러움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란 걸 알았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생명의 귀중함이 어찌 그런 감정보다 우선일 수 있겠습니까, 공자님. 다음번엔 부디 제가 직접 돌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지요.”
“다음번에 또 다치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마세요.”
“물론 그게 가장 중요할 테지만요.”
대사제가 예의 있게 고개를 숙였다. 레온은 그가 먼저 지나갈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는 것으로 마음을 대신했다.
‘죽을 때까지 나를 돌보진 못할걸.’
만일을 대비해 비밀은 최대한 유지할 생각이었다.
검은 사냥개들이 모르는 비밀 하나쯤 가지고 있는 게 여러모로 유용할 테니 말이다.
레온이 다시 표정 없는 얼굴로 발길을 돌렸다. 만찬장에 도착하고 나니 이미 루시오 공작이 기다리고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버지.”
“아니다. 앉아라.”
루시오와 레온이 긴 테이블의 중앙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았다.
“네가 좋아하는 음식을 많이 준비했으니 든든히 먹으렴.”
과연 평소 공작이 먹는 양보다 세 배는 넘게 음식을 준비했다.
수천 년간 굶어서 그런가. 레온은 남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음식을 잘 먹었다.
그렇게 먹고도 왜소한 체구는 가신들이 궁금해하는 것 중 하나였다.
“길라에 좀 다녀오는 게 좋겠구나, 레온.”
“길라에요? 갑자기 그곳엔 왜요?”
한창 식사가 이어지던 중 루시오가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길라는 우리가 놓칠 수 없는 연합 세력이니, 성의를 보이는 게 좋겠지. 네가 가고 싶어 하던 곳이기도 하고.”
물론 그렇긴 했다. 폰네시에선 이미 태양의 절기가 물러났지만 길라라면 아직 쏟아지는 햇빛을 맛볼 수 있으리라.
“피타가 좋아하겠네요.”
“그렇겠지.”
분명 무슨 뜻이 있을 텐데.
‘일단, 급한 불은 껐으니까.’
상황을 정리할 순간이 왔다.
길라라면 인어섬과 가까운 곳이니, 그곳에 틀어박혀 검은 사냥개들에 대해 조사해도 좋을 것이다.
“맛있네요.”
“많이 먹으렴, 레온.”
간만에 입맛이 좋다. 레온이 맛있게 음식을 우물거리며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