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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문가의 지표자-17화 (17/133)

17화

5장. 약속의 땅(2)

길라로 향하는 공자의 행차는 그 규모가 대단했다.

레온은 수많은 기사와 가신들, 그리고 끝도 없이 늘어진 풍족한 식량과 자원을 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피타가 아주 좋아하겠어.”

그렇지 않아도 길라엔 늘 가보고 싶었다.

인근 숲 섬인 르테르는 인어섬과 가장 가까운 곳이었고, 아직 아름다웠던 기억 속 바다를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길라에서 검은 사냥개들에 대해 알아봐야겠어.’

레온이 어느새 배웅을 위해 나타난 루시오를 바라봤다.

“다녀올게요, 아버지.”

“몸조심하고 다치지 말거라.”

루시오 공작이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딸에서 아들이 된 직후 단 한 번도 안아보지 못했다.

레온은 가신들 앞에서 자신을 껴안는 루시오의 행동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뭐… 처음으로 떨어지는 거긴 하니까.’

루시오가 레온의 등을 토닥였다.

자식 사랑이 지극한 영주의 손길을 보며 메리가 괜히 코를 훌쩍였다.

“한 달 정도면 될 거예요.”

“그래, 그 한 달이 내게는 무척 긴 시간이 될 거야.”

“전서조를 보낼게요.”

“나도 보내마.”

루시오가 마지막으로 레온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제 그만 떠나라는 그 손짓에 레온이 밝게 웃어주었다.

“공자님, 다녀오세요!”

“다녀오세요, 레온 공자님!”

조금 냉랭하고 막무가내이긴 하지만 가신들은 그런 레온이 궁성을 떠나는 게 섭섭했다.

조각같이 아름다운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도 영 속상하고, 화를 내면서도 먹을 것만큼은 잘 챙겨주던 레온의 선택적 따뜻함도 그리울 것 같았다.

“길라에 가보고 싶다고 하셨는데 정말 잘됐어요, 도련님.”

“그러게. 메리도 추운 것보다는 더운 게 낫지?”

“늙은이는 아무래도 뼈가 시리니까요. 호호호!”

툭하면 병상에 드러눕는 레온을 돌보느라 지난 7년을 우울하게 보낸 메리도 이제야 좀 편안해 보였다.

레온은 비록 며칠간의 일로 병약 공자 타이틀을 얻었지만 지나간 일은 대수롭지 않았다.

“길라에 가면 아주 맛있는 날고기 파이를 파는 곳이 있습니다.”

서대륙 곳곳을 돌아다녔던 브라운이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그래, 내가 사줄게.”

“정말이십니까?”

“여기 있는 모두에게 사줄게.”

“역시 먹을 것엔 온정이 넘치시는군요, 공자님!”

레온이 한쪽 구석에 그림자처럼 앉아 있는 워렌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덕분에 금방 나았으니까.’

명령을 어긴 건 괘씸하지만 그 덕에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독 향료에 당하고도 겨우 나흘 만에 정신을 차린 건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잘한 일은 역시 먹을 것으로 보상하는 게 최고지.

레온이 금세 시선을 거두고 아름다운 폰네시의 숲을 눈에 담았다.

“좀 느리게 가도 되니까 편한 길로 가자.”

“예, 공자님.”

덜컹거리는 건 질색이다.

레온은 오래간만에 밀려온 평화를 온전히 누렸다.

***

궁성을 떠난 지 벌써 사흘이 지났다.

“…….”

마차 내부는 분위기가 삭막했다.

한쪽에 다리를 꼬고 앉아 창밖만 내다보는 레온의 표정이 몹시도 험악했기 때문이다.

“부집사님… 인근에 정말 머무를 곳이 단 한 군데도 없는 거예요?”

“이쯤이면 분명 월랜드에 도착했어야 합니다만….”

메리와 브라운이 속삭거렸다. 워렌이 그 목소리에 마차 밖을 살폈다.

이미 어둠이 내려앉았지만 주변 소영지는커녕 민가의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 숲속이었다.

그게 벌써 삼 일 연속이었다. 쉬엄쉬엄 가자는 레온의 명에도 일행은 궁성을 떠난 직후부터 한시도 쉬지 않고 숲속만 내달렸다.

“브라운.”

내내 고요하던 마차 안에 레온의 딱딱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마차 세워.”

거목이 우거졌다. 달빛마저 삼키는 우거진 숲속에 도착하자마자 레온의 인내심이 바닥을 내보였다.

“네, 공자님!”

살얼음 같은 그 목소리에 브라운이 즉각 마차를 세웠다.

여차하면 마부의 멱살이라도 틀어쥘 것 같은 레온을 말려야 한다.

갈 길이 먼데 그런 일은 없어야지. 메리가 신경쇠약에 걸린 표정으로 레온을 뒤따랐다.

“저들을 불러와.”

마차의 앞뒤로 행렬이 줄줄이 멈추어 섰다.

레온은 곧장 마부 둘을 불러들였다.

“어, 어찌 그러십니까, 공자님?”

“내가 분명 인근 민가에서 쉬었다 가자고 명했을 텐데.”

“…헙.”

마부들이 바짝 언 표정으로 레온의 발치만 내려다봤다. 두 사람 모두 눈동자가 아주 자유분방했다.

레온이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갔다. 제법 서늘해진 기온에 흙바닥이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무슨 속셈이지?”

레온이 거세게 마부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소, 속셈이라뇨, 공자님! 인근에 머무를 만한 민가가 마땅치 않아서 그랬습죠!”

“저흰 정말 그 어떠한 이유도 없습니다!”

“그래? 정말 없었어?”

“그… 그럼요!”

레온이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줄에 매인 짐승처럼 마부가 힘없이 레온에게 끌려왔다.

홀로 남은 다른 마부는 내내 눈치를 보느라 손을 벌벌 떨고 있었다.

“브라운, 내가 알기로 분명 이 주변에 소영지가 하나 있을 텐데.”

“맞습니다, 공자님.”

“우리가 길라로 가고 있는 게 맞다면 말이야.”

어둠 속에서 레온의 푸른 눈동자가 매섭게 빛났다.

‘길라로 가는 길은 모두 알아.’

태양과 맞닿는 바다의 표면은 구슬 같고, 그곳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은 바다에 안기는 듯한 기분이라고 했다.

레온은 오래도록 길라로 향하는 걸 꿈꿔왔다. 그곳으로 가는 길목은 줄줄 외고도 남았단 소리다.

“너,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길이 다르다. 여긴 폰네시에서 길라로 향하는 길이 아니다.

레온이 마부와 바짝 얼굴을 맞대고 날을 세웠다.

“똑바로 고하지 않으면 결국 죽여 달라고 빌게 될 거다.”

마부의 머리 위로 오만 가지 상상이 스쳐 지나갔다.

거꾸로 매달아 사람의 피를 다 뽑아 버리신다던데.

이유 없이 가신들을 괴롭힌단 소문이 자자했으므로 마부는 치를 떨었다.

“살려주십시오! 저희는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조용히 하지 못해, 브랙?”

“이러다 큰일 나요, 아버지! 영주님께서도 숨길 수 있을 때까지만 숨기라고 하셨잖아요.”

영주? 다른 마부의 입에서 나온 말에 레온이 그자를 노려봤다.

브랙이란 자가 눈치를 보다 조심스레 사실을 털어놓았다.

“사실은 영주님께서 명하신 일입니다.”

밝히지 않는다면 저 괴팍한 공자가 가죽을 다 벗겨 두 사람을 이곳에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브랙이 지레 겁을 먹고 훌쩍거렸다.

“가는 동안 절대 그 누구에게도 행적을 들키지 않게 영지들을 돌아가라는 명이 있으셨어요.”

“…아버지께서?”

“예에! 저희가 어째서 이유도 없이 공자님의 여정을 불편하게 머리를 굴리겠습니까요!”

브랙의 외침에 브라운이 주변을 살폈다.

솟아난 거목의 기둥과 넓적한 잎, 그리고 불어오는 바람의 방향이나 하늘을 보며 이곳이 어디인지 짐작했다.

“템프 폭포로 가는 길이군요.”

“맞습니다! 영주님께서 그곳까지 쉬지 말고 달려가라 명하셨어요.”

브라운이 레온에게 다가와 설명을 덧붙였다.

“길라까지 가는 빠른 길은 아니지만, 템프 폭포에서도 길라로 방향을 틀 수 있습니다.”

“어째서 빠른 길을 놔두고 이런 명을 내리신 거지?”

물론 하나뿐인 자식의 신변을 우려한 일일 수도 있었다.

안전한 폰네시 밖으로 내보내는 일이니, 데로니스 세력의 기습을 염려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랬다면 반드시 설명했을 것이다. 비밀을 품고 있는 걸 아는 마당에 숨겨야 할 이유가 없다.

‘루시오가 이유도 없이 이런 명을 내리진 않았을 텐데.’

레온이 마부의 멱살을 드디어 놓아주었다.

한참을 끌려가 있던 마부가 땀을 닦아 내리며 숨을 크게 내뱉었다.

브랙이 재빨리 아버지를 챙겼다.

‘분명 뭐가 더 있는데.’

어째서 템프 폭포일까.

레온이 생각에 잠긴 브라운을 돌아봤다. 이미 머릿속으로 여러 상황을 정리 중인지 그의 표정이 진지했다.

“브라운, 템프 폭포에 대해 알아?”

“예, 그곳이라면 동부와 북부의 정확히 가운데 있는 길목입니다.”

넓고 긴 지형의 폰네시를 반으로 뚝 자르는 곳이 바로 템프 폭포다.

그곳을 기준으로 위쪽은 북부, 대각선 아래쪽은 동부로 나뉜다.

“…공자님.”

드디어 생각이 정리된 건지 브라운이 조심스레 레온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레온만 들릴 만큼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면 영주님께서는 주변을 의심하고 계신지도 모르겠습니다.”

“의심?”

어째서 길라로 가는 편한 길이 아닌 이곳, 템프 폭포로 가는 길로 에둘러 가라 명했는지 짐작이 갔다.

“아무리 바다를 누비는 자들이더라도 영주님께서 데로니스와 그들이 접촉했단 걸 놓치실 수는 없어요.”

줄곧 신경 쓰던 문제였다.

서대륙 내의 가장 강한 패권을 쥐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루시오 공작이었다. 그의 정보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더군다나 데로니스는 늘 촉각을 곤두세운 채 지켜보는 반대 세력이었다.

그런 자들이 타세트의 항해단과 접촉을 했는데 놓칠 수 있을 리 없다.

“저 역시 정보를 몰랐고요.”

동북부는 물론이고 서대륙 전반에 수많은 정보책을 가지고 있는 자신 또한 몰랐다는 건, 이미 폰네시에 정보를 가로채는 자들이 있다는 걸 뜻했다.

“게다가….”

“이번 여정의 규모가 매우 크지. 꽤나 시끄러웠고.”

늘 레온의 안전을 최우선 과제로 생각하는 루시오답지 않은 결정이었다.

브라운이 잔뜩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꼭 누군가에게 일부러 정보를 흘리는 것처럼 대대적으로 길라행을 알리셨죠.”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궁성 내에 의심스러운 세력이 있는 모양입니다. 영주님께선 일부러 함정을 파신 거예요.”

이번 일은 그 세력을 잡아낼 루시오의 계책이었다.

‘왠지 불안한데.’

이미 너무도 많은 병력이 이곳에 따라붙었다. 고작 몇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호위를 위한 기사단은 폰네시의 핵심 병력이기도 했다.

루시오가 적극적으로 적을 찾아 나서는 것도 경계할 만한 일이었다.

데로니스가 빈틈을 노리고 있다. 이대로 두 세력이 맞붙는다면, 안 좋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데로니스 놈들은 라피스를 가지고 있어. 검은 사냥개들과 연관이 있으니 우리 병력으론 절대 이길 수 없을 거야.’

역시 그들을 이길 만한 확실한 무기가 필요했다.

“워렌, 저들 중에 믿을 자가 있어?”

“두 사람 정도 신임하는 자가 있습니다, 공자님.”

“한 명이면 돼. 말을 전할 테니 폰네시로 돌려보내야겠어.”

“그자를 불러오겠습니다.”

레온이 쉬지 않고 달려온 어두운 숲속을 돌아봤다.

이제 길라로는 갈 수 없다. 조금만 더 가면 템프 폭포다. 폰네시의 정중앙 끝.

그곳에서 갈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다.

‘동부로 가거나, 북부로 가거나.’

데로니스 놈들을 이기기 위해선 반드시 얻어야 할 것이 있다.

“…….”

레온이 제 뒤에 줄줄이 따라붙은 수많은 행렬을 바라봤다.

핵심 병력과 수많은 식량, 그리고 몇 해는 너끈히 버틸 수 있을 만한 풍부한 자원을 보니, 이제야 루시오가 제게 직접 전하지 못한 메시지를 이해했다.

“우리는.”

갈 곳은 한 곳뿐이다.

“센느로 간다.”

숨마저 얼어붙게 만드는 북부.

바로 그 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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