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5장. 약속의 땅(3)
우거진 숲속을 지나 귀를 아프게 만드는 웅장한 템프 폭포에 다다르자, 루시오의 전서조가 날아왔다.
“먼저 와서 기다렸어?”
레온이 전서조를 쓰다듬었다.
발끝에 매달린 서신을 빼내고 나니 전서조가 레온의 주변을 날기 시작했다.
이걸 읽을 때쯤이면 이미 행선지를 정했을지도 모르겠구나, 레온.
정갈하고 힘 있는 필체는 루시오의 것이 분명했다.
그곳으로 가 네 뜻을 전하거라.
지금부터 네 뜻이 우리 폰네시의 뜻이다.
짧은 메시지였지만 레온에게 필요한 말이기도 했다.
레온이 시선을 돌렸다. 곁에 대기 중이던 브라운이 서신지와 깃펜을 건네주었다.
“아니야. 센느에서 서신을 보내자. 아버지의 전서조는 그대로 돌려보내도록 해.”
“예, 공자님.”
템프 폭포에서 북부 끝 센느까지 는 아무리 빨리 가도 스무여 일은 걸리는 일정이다.
게다가 많은 병력이 줄줄이 따라붙었으니, 서두르지 않는다면 황량한 북부 한가운데서 혹한의 절기를 맞이할 수도 있었다.
“브라운, 센느까지는 어느 정도나 걸릴까?”
“한 달은 족히 걸리겠는데요? 아무래도 영지들을 돌아서 가야 하니까요.”
“인원이 반으로 준다면?”
“일주일 정도는 앞당길 수 있습니다, 공자님.”
쫓기고 있는 중이 아니니 이토록 많은 병력은 불필요하다.
게다가 센느에서 이들이 모두 머무를 수 있을지도 확실치 않았다.
지금 돌려보낸다면 내 행선지를 들킬 위험도 적겠지.
“워렌, 이들이 모두 떠나도 너는 나를 지킬 수 있지?”
“공자님 한 분만은 반드시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럼 메리와 브라운도 지킬 수 있는 기사들을 선별해. 식량과 자원을 보호할 인력도 추리고.”
워렌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메리가 울상이 된 표정으로 레온에게 물었다.
“도련님을 지키는 인원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게 아닌가요? 어째서 돌려보내려 하세요?”
“시일도 시일이지만 이 수많은 병력을 다 이끌고 가면 센느는 우리가 쳐들어오는 줄 오해할걸?”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브라운도 레온의 의견에 동의했다.
“맞아요, 메리 부인. 센느는 공식적으로 중립 영지잖아요.”
데로니스의 감시관이 떠나며 그들의 입장이 난처해졌다.
폰네시에 충성을 맹세한 곳도, 데로니스에 속한 곳도 아닌 것이 알려진 것이다.
“내가 줄줄이 병력을 이끌고 가는 게 곱게 보일 리 없어.”
다른 북부 소영지에 굳이 불안함을 심어줄 필요는 없었다.
폰네시를 제외한 그 어느 곳도 온전히 믿을 수 없다.
“브라운, 너 마차 몰 줄 알지?”
“서대륙을 홀로 다녔으니 당연하죠, 공자님.”
“그래?”
브라운이 자부심 넘치는 표정으로 레온을 바라봤다가 뜨헉, 당황한 듯 입을 벌렸다.
모든 근심을 날릴 것 같은 천사의 얼굴이 또 자신에게 웃어주고 있었다.
저 표정은 분명 바라는 게 있는 얼굴이다. 그것도 꽤 곤란한.
“워렌, 저 마부 둘도 돌려보내.”
무섭다고 영주의 명이나 줄줄 불어대는 게 아무래도 미덥지 못하다.
레온이 명하자마자 브라운의 어깨가 땅 밑까지 처진 듯했다.
“흑… 이제 곧 북부가 시작될 텐데요, 공자님.”
템프 폭포만 지나면 태양의 절기 따윈 머무른 적 없는 순수한 얼음의 땅, 북부가 시작된다.
브라운은 벌써부터 뼛속 깊이 추위가 밀려오는 것 같아 어깨를 떨었다.
“괜찮아, 워렌이 교대해 줄 테니까.”
“…….”
“그렇지, 워렌?”
“명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 그놈에 명이니까 반드시 따라야 할 거야.”
마차를 몰 줄 안다는 대답은 없었지만 레온은 이미 결정을 내렸다.
브라운과 워렌은 어쩐지 이 일이 지난번 명령을 따르지 않았던 일에 대한 복수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갈 길이 바쁘다. 모두 서둘러.”
은백색 머리칼의 레온이 마차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뒤끝이 상당한 공자님은 남모르게 웃고 있었다.
***
보름 정도를 쉬지 않고 내달리니 모두의 체력이 바닥을 보였다.
게다가 비교적 온화한 기후의 폰네시에선 평생 느껴본 적도 없는 추위가 쉴 새 없이 사방에서 몰아쳤다. 정말이지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조금 쉬었다 가는 게 좋겠어.”
날이 추워질수록 메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레온은 그녀가 조금 더 따뜻한 곳에 머무를 수 있도록 오늘 밤은 야영을 하기로 결정했다.
“공자님, 아마 세 시간 정도만 더 간다면 온해수 지역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브라운의 목소리에 메리가 눈을 빛냈다.
온해수 지역이라면 폰네시에서도 들어본 적이 있다. 뜨거운 물이 샘솟는 땅이었다.
“그래, 그럼 그곳으로 가.”
일행이 조금 더 속도를 냈다. 모두가 그곳에 가면 고단한 몸을 녹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워렌 경! 여기서 동서쪽으로 쉬지 않고 달리시면 됩니다! 하하하!”
말이 끝나자마자 브라운이 마부석과 연결된 작은 창을 닫아버렸다.
바깥바람이 들면 안 된다는 이유도 있지만, 교대 시간을 모른 척 넘어가기 위한 꾀였다.
“메리, 이걸 더 덮도록 해.”
“어휴! 아니에요, 도련님. 전 괜찮으니 도련님 몸이나 돌보세요.”
이를 달달 떨면서 메리가 연신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따뜻하게 한다고 해도 쉬지 않고 달리는 마차 안은 추울 수밖에 없다.
레온이 말없이 메리의 두툼한 손을 붙잡았다. 옆에 앉은 그녀의 무릎에 따뜻한 담요를 나눠 덮고 나니 메리의 호들갑이 잠잠해졌다.
“참, 공자님. 슬슬 북부 끝 지역에 다다르는 것 같아 드리는 말씀이지만요.”
브라운이 눈치 없이 껴들었다.
“북부 지역에서 발견되는 스노우 울프에 대해 들어보신 적이 있으시겠죠?”
스노우 울프?
레온이 대답하지 못하자 메리가 박수를 치며 대화에 합류했다.
“들어본 적 있어요! 푸른 눈을 감으면 흰 눈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새하얀 짐승이라죠?”
“메리는 알아?”
“그럼요. 관련된 전설 같은 건 예전부터 내려온 게 많잖아요.”
“음.”
인간도 아닌데 전해 내려오는 전설 같은 건 들어봤을 리 없다.
레온은 잠자코 모른 척 입을 다물고 브라운의 설명을 들었다.
“스노우 울프는 얼음의 땅에서만 발견되는데, 그 크기가 거목처럼 대단하고 흉포함이 다른 짐승에 비할 바 없이 끔찍하다고 해요.”
센느가 황량해진 데에 스노우 울프의 책임이 영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뭐, 지금은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으니 괜찮겠지만 간혹 센느 주변에서 흔적이 발견된다고 하니,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알겠어. 알아둘게.”
“오! 다 온 모양이네요.”
대화를 하다 보니 어느새 마차의 움직임이 더뎌졌다.
브라운이 고개를 돌려 작은 창을 통해 밖을 살폈다.
바싹 마른 겨울 숲 끝이 보이고 얼음벽이 여기저기 높게 쌓인 온해수 지역에 도착했다.
“드디어 씻을 수 있겠네요!”
벌써부터 뜨끈한 물속에 들어갈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았다.
“준비를 도울 테니, 공자님 먼저 들어가시겠어요?”
마차가 완전히 멈추었다.
병사들이 김이 폴폴 나는 해수탕을 보자, 환호하는 소리가 숲속에 울려 퍼졌다.
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씻으라고?
“절대 싫어.”
“안 됩니다!”
레온과 메리 두 사람이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신이 나서 떠들어대던 브라운이 입을 급하게 다물었다.
무슨 실수라도 했나? 아무리 생각해도 말을 잘못한 것 같진 않은데 두 사람 표정이 왜 저러지.
“…왜 그러세요?”
이곳까지 달려오며 제대로 씻지 못한 건 당연한 일이다. 인근 영지를 피해 왔고, 민가가 있을 만한 곳도 돌아왔다.
제법 오랫동안 씻지 못하셨을 테니 당연히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
“그러니까….”
씻지 않을 이유를 찾아대는 동안 달칵, 워렌이 마차를 열었다.
레온이 그를 바라봤다. 빨갛게 얼어붙은 얼굴이 꽤나 불쌍했다.
“추워서 싫어.”
레온이 금세 침착함을 되찾고 고고하게 다리를 꼬고 앉았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떡하라고.”
“물속은 바깥보다 훨씬 따듯해요, 공자님. 그곳에서 체온을 데우면 오늘 밤을 나기가 수월하실 텐데요?”
아무튼 공자가 씻어야 나머지 일행들도 마음 편히 해수를 즐길 수 있었다.
브라운이 어떡해서든 설득하려는 걸 메리가 막아섰다.
“알다시피 우리 도련님께서 부끄러움이 좀 많으시잖아요.”
“예?”
“저 수많은 병사들 앞에서 목욕을 즐기라니 말도 안 될 일이죠. 암요! 절대요!”
워렌과 브라운이 서로를 바라봤다. 일전에 한 번 그런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부끄러움 때문에 대사제의 치료도 거부하시더니.”
그게 정말일 줄 몰랐다. 다소 당황한 표정으로 브라운이 상황을 파악하는 동안 레온도 머리를 굴렸다.
‘씻고 싶긴 한데.’
레온은 더러운 걸 몹시 싫어했다. 게다가 물속에 오랫동안 들어가지 않아 그런지 머릿속 기억도 아주 엉망진창이라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 기분이었다.
‘그래, 저녁에 들어가자.’
모두 잠들었을 때. 다들 보지 않는다면 씻을 수 있다. 그러려면 이곳에서 자고 가는 게 좋겠지.
“오늘은 이곳에 머무른다. 야영 준비를 하고 병사들을 먼저 쉴 수 있도록 해.”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응, 달려오느라 다들 힘들었잖아.”
“모두 좋아하겠네요!”
그런 것 따위 전혀 상관없지만 레온이 꽤 다정한 목소리로 권유했다.
말은 안 해도 몹시 씻고 싶었던 브라운이 지체없이 명을 전하기 위해 마차 밖으로 벗어났다.
문밖에 서서 레온을 한참 바라보던 워렌도 별말 없이 물러났다.
“…어쩌시게요, 도련님?”
“저녁까지 기다려야지.”
“제가 망을 봐드릴게요.”
“…그래, 메리.”
딱히 불편할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폰네시를 벗어나니 이런 어려움이 있다.
뭐, 잠깐 기다리면 되니까 그동안 산책이나 할까?
레온의 머릿속이 계획으로 바쁠 때 메리의 두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도, 도련님.”
“응?”
“저를 봐주시겠어요?”
“갑자기?”
“아니, 그게.”
갑작스레 메리가 레온의 얼굴을 붙잡았다.
차가움에 얼어붙은 레온의 두 뺨이 두툼한 메리의 손에 의해 꾹, 짓눌렸다.
“어 하능 거야!”
“하, 하하! 이렇게 제 얼굴을 보니 좋지 않으신가요?”
“이거 앙나?”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레온은 어색하게 웃어대는 메리의 손을 치우며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에구머니! 안 돼요!”
그러자 흰색의 눈밭 위에 예상치 못한 살색의 향연이 펼쳐졌다.
하나둘 옷을 벗어 던지고 해수에 뛰어드는 병사들을 보며 레온이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저희를 배려해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레온 공자님!”
“공자님께서도 어서 오세요!”
그들이 마차 가까이 다가와 감사 인사를 전했다.
메리가 어찌할 줄 모르고 눈을 굴리는 동안 레온이 손을 급하게 휘저었다.
“알겠으니까 가서 씻어!”
“예! 공자님!”
내가 방금 뭘 본 거지.
레온이 바싹 굳은 얼굴로 간신히 눈만 깜빡거렸다.
“…도련님, 괜찮으세요?”
“어, 어. 뭐.”
그렇다기엔 얼굴이 너무 빨간데.
메리가 눈썹을 늘어뜨리고 레온의 차가운 손을 잡았다.
“…저랑 좀 산책을 가시겠어요?”
“그래, 그러자.”
“집을 떠나셨으니 앞으로는 더한 어려움이 있을 거예요.”
“…으응.”
뭐가 됐던 여길 벗어나야겠다.
레온이 주변에 보이는 수많은 살색을 애써 무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