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5장. 약속의 땅(4)
저걸 누가 만들었을까.
레온은 성인 허리보다 높게 쌓인 견고한 얼음벽을 바라봤다.
맑은 공기 덕에 하늘이 깨끗하다. 암청색을 띠는 밤하늘엔 뜨거운 해수가 만들어낸 뿌연 기운이 실처럼 어른거렸다.
‘다들 도대체 언제 자는 거야.’
한바탕 목욕을 마치고 스무 명 남짓한 일행들이 간만에 찾아온 휴식을 맘껏 누렸다.
불을 피우지 않아도 뜨거운 해수가 내뿜는 온기와 높은 얼음벽이 바람을 막아주어 전혀 춥지 않았다.
게다가 체온이 올라 대부분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먹고 마시며 정말 즐거워 보였다.
“…….”
단 한 사람, 레온만 빼고.
‘피곤하지도 않나.’
모두 잠들 기미가 없다.
간만에 쉬어가는 여유에 모두 분위기가 고조됐는지 이제는 노래까지 불러대며 휴식을 즐겼다.
“공자님!”
여태껏 잘만 놀더니 이제 와 본분이 생각났나 보다.
“뭐.”
브라운이 밝은 얼굴로 레온에게 다가왔다. 양손엔 레온과 나눠 마실 따뜻한 밀크티가 들려 있었다.
“이제 그만 버티고 몸을 좀 녹이셔야죠. 그러다 큰일 나세요.”
“됐어.”
“제가 아무도 다가오지 못하게 딱 붙어 지켜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문제다. 누가 어디에 딱 붙어서 뭘 해?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좀 자라, 제발.”
브라운이 마차 근처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내내 마차 안에서 전혀 나오질 않는 공자와 본격적으로 대화라도 할 기세였다.
“저희의 최우선 과제는 공자님의 안위를 지키는 거잖아요. 공자님께서 이렇게 불편하게 계시면 아무도 잠들지 못한다니까요.”
“그런 것치고 쟤네 너무 잘 놀고 있지 않아?”
“…흠흠, 아무튼 저는 그렇습니다.”
레온이 뚱한 표정으로 브라운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그 넘치는 충심으로 뜻을 좀 파악하고 잠이나 잤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브라운이 말없이 저를 바라보는 레온에게 웃어주었다. 방긋 웃는 연한 눈동자가 무척이나 맑고 빛난다.
‘다들 잠든다 하더라도 보초는 분명 있을 테고.’
이곳은 숲의 끝인 완전한 황야로 들어서는 초입이라 그리 경계를 세울 만한 곳은 아니었다.
천연 요새라 할 수 있는 얼음벽이 앞을 지키고, 앙상하지만 빽빽한 겨울나무들이 뒤를 지키고 있으니 쉬어가기엔 제격이었다.
“그래도 새벽부터 이르게 움직이려면 다들 잠을 좀 자두긴 해야겠네요, 공자님.”
“그래, 브라운.”
다른 날보다 보초를 서는 병사들의 수를 줄여도 괜찮다.
레온은 곰곰이 생각을 이어나가다 줄곧 앉아 있던 마차에서 벌떡, 일어났다.
“브라운, 포도주를 좀 내어와.”
“예? 와인을 드시게요?”
“그래, 얼마 가지 않으면 센느에 도착할 테니 병사들에게 보상을 주어야지.”
죄다 잠들어 깨어나지 못하도록 진탕 술을 먹일 작정이었다. 다들 잠들면 그때 들어가서 씻는 거야.
“같이 가요, 공자님!”
모두를 원망하는 것처럼 쏘아보실 땐 언제고.
변덕이 죽 끓는 공자였지만 브라운은 맡은 바를 잘 수행해냈다.
미리 준비해온 포도주 중 넉넉한 양을 야영지로 들고 가니 병사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제 며칠만 더 가면 센느가 코앞이다.”
병사들 중에선 이 행렬로 레온을 처음 본 이들도 더러 있었다. 가까이서 본 레온의 외모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이었다.
꼭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어두운 암청색 하늘과 대비되는 은백색 머리칼이 더욱 그런 분위기를 풍겼다.
“오늘 밤은 내가 보초를 설 테니 모두 편안히 쉬도록 해.”
병사들이 서로 눈치를 봤다.
배려라곤 하나도 모른다고 소문이 자자했던 우리 공자님께서 지금 뭐를 하신다고?
환호가 터져 나와도 모자랄 판에 잘못 들은 줄 알고 서로 눈치만 보니 분위기를 수습하는 건 브라운의 몫이었다.
“자, 다들 우리 공자님을 위하여!”
“위하여!”
“감사합니다, 레온 공자님!”
우와아아아!
엎드려 옆구리를 백 번쯤 찌르고 나서야 다들 환호성을 내질렀다.
레온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병사들에게 직접 포도주를 따라주었다.
“자, 다들 많이 마시고.”
“공자님, 정말 감사합니다.”
“그래, 고생 많았다.”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실컷 늘어지게 마시고 푹 잠들어 준다면 될 일이다.
레온은 분명한 목적을 위해 따라나선 가신들에게까지 은혜를 베풀었다.
그리고 마지막.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는 브라운과 여태껏 경계를 늦추지 않는 워렌 을 보며 흐음, 입맛을 다셨다.
“…….”
“…….”
준다고 마실까?
브라운은 고집스럽게 밀크티를 들고 있었고, 워렌은 잔조차 들고 있지 않았다.
사실 병사들이야 명령 한 번에 강제로 자게 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이들은 강적이다.
레온이 인상을 찌푸렸다.
“안 마시겠다고?”
“괜찮습니다, 공자님. 저희를 위해 오늘 밤 보초까지 자처하셨는데, 제가 어찌 편히 잘 수 있겠어요? 공자님과 함께 보초를 서겠습니다.”
필요 없다.
“저도 괜찮습니다. 맑은 정신으로 공자님을 지키겠습니다.”
아니, 필요 없다니까.
“너희 이제 내가 안 무서워?”
레온이 인상을 확 찌푸리며 두 사람에게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갔다.
두 사람 모두 레온보다 머리통 한두 개 정도는 더 큰 키를 가졌다. 자연히 올려다보게 되는 모양새에 레온이 부득, 이를 갈았다.
“너무 무서운데요, 공자님.”
“이게 진짜.”
브라운이 농을 거두고 빈 잔을 들었다.
쌀쌀맞은 척하지만 그 누구보다 생각이 깊은 사람이란 건 진작 눈치챘다.
레온이 어떤 마음으로 병사들에게 휴식을 주는지 알 것도 같아 그의 마음을 존중해주고 싶었다.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공자님.”
레온이 브라운에게 포도주를 한가득 따라주었다.
이쯤 되니 잔 대신 검을 쥐고 있는 워렌의 입장이 좀 난처해졌다.
브라운이 단번에 포도주를 마셔 넘기곤 워렌을 바라봤다.
“공자님의 명을 어길 셈이십니까, 워렌 경?”
“…….”
“참된 부하는 아니십니다. 진정 공자님을 위한다면 때론 원리 원칙보다 더 중요한 게 보이는 법이죠. 안 그렇습니까, 공자님?”
“브라운 넌 아주 똑똑한 사람이야.”
“감사합니다, 공자님!”
그러는 와중에 브라운은 레온으로부터 포도주 한 잔을 더 받아 마셨다.
결국 워렌이 검을 내려놓고 술을 받았다.
포도주를 들고 있는 공자의 얼굴이 전에 없이 밝은 게 의심스러웠다.
“…딱 한 잔만 마시겠습니다, 공자님.”
“그래, 그래.”
레온이 주변을 살펴보다 스튜를 끓일 때나 쓰는 양동이를 집어 들었다.
브라운이 마시던 포도주를 내뿜었고, 워렌의 눈동자는 정처 없이 흔들렸다.
“고마운 만큼 많이 줄게.”
다 마시고 잠들어 버려라.
레온이 양동이 가득 포도주를 콸콸 쏟아부으며 웃음을 참았다.
***
모두가 잠들었다. 간혹 코를 고는 병사들의 생사 여부만 확인될 뿐 주변은 온통 고요했다.
‘다행이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드디어 씻을 수 있게 됐다.
레온이 간소한 짐을 챙겨 들고 널브러진 병사들 사이사이를 조심스레 타고 넘었다.
‘메리가 잠든 건 좀 아쉽지만….’
혹독한 여정에 많이 피곤했는지 메리는 초저녁부터 일찌감치 잠이 든 상태였다.
씻으러 가기 전에 반드시 깨워달라는 부탁이 있지만 곤히 잠든 늙은 얼굴을 보니 깨울 수 없었다.
레온은 조심조심, 시체처럼 전멸한 병사들을 지나 드디어 얼음벽 뒤 온기를 내뿜는 해수탕에 도착했다.
힐끔, 고개를 내빼고 바라보니 사이좋게 서로 기대어 잠든 워렌과 브라운이 보인다.
‘얼른 씻자.’
누구도 보지 못하게 재빠르게 옷을 벗고 곧장 따뜻한 물속에 몸을 담갔다.
발끝까지 얼게 만들었던 추위가 단번에 가시고 온몸이 풀어지는 게 느껴졌다.
이게 얼마 만이야.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물 가까이에 닿는 것만으로도 활력이 돌았다.
“…….”
잠시간 따뜻함을 누리다가 레온이 고개를 돌렸다. 아직까진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긴, 그렇게 술을 퍼마셨는데 깨어나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레온은 조금 전, 양동이 가득 포도주를 마시자마자 브라운의 무릎에 고개를 처박았던 워렌이 생각나 웃음을 참아야 했다.
‘그나저나… 검은 사냥개 놈들이 데로니스에 있으니 우리 병력으론 절대 이길 수 없을 거야.’
평화가 찾아오니 밀어두었던 걱정이 마치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라피스가 있으니 일반 무기론 이길 수 없어.’
비정상적이고 말도 안 되는 데로니스 연합 세력의 전투력이 이제야 모두 설명되는 듯했다.
그들은 소규모의 병력으로 수많은 전투에서도 승기를 잡았다. 이름 모를 젊은 사령관이 나타났다 하면 전장 일대가 초토화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아마도 그 녀석이… 검은 사냥개 중 한 명이 아닐까?’
그들을 무너뜨리기 위해 언젠가는 루시오에게 제 비밀을 밝혀야 한다.
남장을 하고 레온으로 살겠다는 말을 했을 때와는 달리, 어쩌면 인어족의 운명을 모두 밝혀야 할지도 모를 만큼 무거운 문제였다.
그게 과연 옳은 선택일지, 아니면 잘못된 선택일지는 아직 확신이 없었다.
‘또 다른 적만 만드는 게 아니라면 좋겠는데.’
레온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부스럭.
고요한 공간에 인기척이 들려왔다. 레온이 두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살폈다.
‘뭐지?’
누군가가 접근하는 걸 놓쳤을 리 없을 텐데.
레온이 물속에서 조심스레 옷가지를 벗어놓은 곳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물을 가르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고 신중한 몸짓이었다.
‘들키면 안 돼.’
혹시라도 누군가가 깨어났다면 큰일이다. 들키기 전에 옷부터 입어야 했다.
레온이 주변을 경계하며 옷가지에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킁킁킁킁.
“…응?”
토독거리며 얼음과 날카로운 무언가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달리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원초적인 소리가 이어진 직후, 레온은 얼음벽 뒤에서 새하얀 무언가가 튀어나오는 것을 봤다.
킁킁.
“……!”
새하얀 눈 위에 바다를 닮은 푸른 눈동자가 보였다.
짙은 동공이 레온을 발견한 즉시 동그랗게 커졌다. 눈과 비교되지 않는 흰 털이 곤두서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스노우 울프?”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도 작고 앙증맞은 흰 짐승이 바짝 경계한 채 레온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뭐야, 왜 짖어?
“야, 야! 조용히 해.”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건가?
브라운이 설명해 준 것과 달리 목덜미를 한 손에 쥐고도 남을 정도로 아주 작은 놈이었다.
레온이 다급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제발 조용히 좀 해.
이 이상 시끄럽게 굴면 남들이 깨어날 수도 있었다.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크르르르릉!
부탁이 통할 리 없었다.
레온의 행동이 제법 위협이 됐는지 스노우 울프가 몸집을 부풀렸다.
“아, 제발.”
하지만 스노우 울프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한번 크게 으르렁거렸다.
이러다 정말 큰일 나겠다 싶어 옷이라도 입어야 했다.
레온이 불안한 눈동자로 옷을 낚아채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위협으로 간주한 스노우 울프가 크게 포효하며 옷가지를 냉큼 입에 물었다.
“…….”
네가 그걸 왜 물어?
“야, 야! 어디 가!”
다시 한번 킁킁거린 스노우 울프가 옷을 입에 물고 재빠르게 뒤돌았다.
그러곤 다가올 때와 마찬가지로 타닥타닥 발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때.
“…공자님?”
등 뒤에서 이 추위를 더 서늘하게 만드는 브라운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이지 끔찍한 타이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