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5장. 약속의 땅(5)
그 무렵 폰네시.
제법 오랫동안 주인이 자리를 비운 레온의 거처에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 영주님을 뵙습니다.”
복도에 깊게 들어오는 빛이 은백색 갑옷을 반사시켰다.
한 가신이 제 눈앞에 나타난 루시오 공작을 보곤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시 살펴볼 게 있으니 물러가 있어라.”
“예, 영주님.”
그는 늘 휴전 상태임을 잊지 않기 위해 불편함을 감수하고 갑옷 생활을 했다.
가신은 그 모습에 괜한 불안감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재빨리 인사를 남기고 멀어졌다.
“떠난 적도 없는 것 같구나.”
레온의 거처는 언제라도 주인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전과 다름없이 완벽한 상태를 유지 중이었다.
다만, 그 어디에도 온기는 없다. 비어 있는 침실과 머무른 적도 없는 것처럼 깔끔한 내부가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졌다.
루시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거처 한가운데에 도착하자 정면 석벽 위에 높게 걸린 레온의 초상화가 보였다.
“…….”
어린 자식들의 모습을 남겼던 날이 기억난다.
일리아의 부탁을 들어주길 잘했다. 초상화가 아니었다면 아들의 모습을 모두 잊었을지도 모른다.
“…레온.”
이건 지금 곁에 있는 레온이 아니라 하나뿐인 아들, 진짜 레온 몬데이어의 순간이 남아 있는 유일한 그림이었다.
루시오 공작이 초상화 앞으로 가 손을 뻗었다. 온기 없는 뺨을 쓰다듬고 나니 허무함이 밀려왔다.
“너와 일리아는 보냈지만… 내 반드시 레브만큼은 보호하마.”
딸이 아들이 된 지 7년이 지났다.
그 시간 동안 루시오는 진짜 레온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모두 잊었다. 기억 속에 빛바랜 레온은 날이 갈수록 희미하게 흐려졌다.
레온에 대해 기억나는 게 몇 없다. 레브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단 것 정도만 머릿속에 선명했다.
“…그날도 그랬지.”
레브가 일리아의 영면소에 다녀오던 날, 예측할 수 없던 그 사고를 당한 그날에도 레온은 오직 제 동생만 생각했다.
‘레브를 지키던 기사들을 조사해야 합니다.’
그날 이후 공녀를 호위하던 침묵의 기사단이 모두 사라졌다.
‘어떻게 한 사람도 안 남고 모두 사라질 수 있죠?’
의심의 여지가 분명했다.
레브는 그날 숲속에서 납치당했고, 다시 돌아왔을 땐 이미 정신을 잃은 직후였다.
딸을 깨어나게 만들기 위해 중요한 걸 잃었다.
루시오는 그날을 잊지 못했다. 레온이 마지막으로 남겼던 그 말 역시 잊지 않았다.
‘아버지, 기사단장을….’
그때였다.
“영주님.”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며 갑옷을 차려입은 노기사가 성큼 다가왔다.
루시오 공작이 기다렸단 듯 매서운 눈으로 그에게 물었다.
“헤리스는?”
“기사단장은 보이지 않습니다. 새벽 일찍 궁성을 떠난 것 같습니다.”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길 바란 말이었다.
“…기어코 내 등에 칼을 꽂는군.”
“길라로 향하는 길에 추적조를 따라 붙였으니 안심하십시오.”
세월이 내려앉은 루시오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이만 돌아가지.”
루시오는 곧장 레온의 거처를 나와 집무실로 향했다. 노기사가 그 뒤를 바짝 따랐다.
‘제길.’
늘 집무실 앞을, 아니 자신의 곁을 지키고 있던 기사 헤리스는 더 이상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레온의 길라행을 명하자마자 기다렸단 듯 궁성을 떠났다.
레온을 뒤쫓아 뭘 할 셈이지?
루시오 공작의 머릿속이 바빴다.
“전서조는 돌아왔나?”
“예, 어젯밤에 돌아왔습니다만, 특별한 서신은 없었습니다.”
“그래, 잘됐어.”
만약 레온이 서신을 보냈다면 헤리스가 중간에서 가로챘을 가능성도 있다.
상황을 파악했는지 레온은 끝까지 행선지를 함구했다.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헤리스와 함께 자리를 비운 병력도 있나?”
“없습니다. 명을 어긴 건 기사단장뿐입니다.”
죽기 직전까지 헤리스를 의심해야 한다던 어린 아들의 말을 이제야 믿는다.
루시오 공작이 시선을 돌렸다.
창밖에 펼쳐진 평화로운 폰네시를 보자 그가 짊어진 수백만의 목숨이 목 끝을 조르는 듯했다.
“분명 내부에 헤리스의 수족들이 있겠지.”
“의심 가는 자들을 추리겠습니다.”
“아니, 조심스럽게 접근해. 병사들의 움직임을 더 면밀히 살피고 성문 경비를 강화하도록.”
“예!”
만약 의심한 대로 헤리스가 그간 레온을 노리고 있던 거라면 정말 큰일이었다.
그는 이 궁성 내에서 레온의 비밀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이 폰네시에 다시 돌아오는 날까진 살아 있어야 할 거다, 헤리스.”
배신했다면 결코 그 목숨을 남에게 내어주지 않을 것이다.
내 손으로 직접, 그 등에 칼을 꽂아 죽이겠어.
“크리크, 전쟁 준비를 해라.”
“예!”
전운이 느껴진다.
루시오가 상처로 단단해진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
에엣취!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 천둥처럼 거센 재채기 소리가 연이어졌다.
“도련님, 여기 따뜻한 물이에요. 좀 드세요.”
“…고마워, 메리.”
평소와 달리 레온의 목소리가 몹시 이상했다.
지난밤의 여파로 코가 잔뜩 막히고 목도 무겁게 가라앉았기 때문이다.
“열 기운도 있으세요. 정말… 제가 한눈만 팔면 이리 몸이 상하시니.”
“별거 아냐….”
병약 공자라니, 정말이지 잘 어울리는 타이틀이었다.
메리는 눈을 좁게 뜨고 하나뿐인 도련님의 고운 얼굴을 흘겨봤다.
“뭐.”
“아프지 좀 마세요.”
거듭되는 잔소리에 레온이 쯧, 혀를 찼다.
메리는 곧바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두 분은 왜 저리 딱 붙어 계세요?”
“사이가 좋은가 보지.”
“그런가요? 마부석도 좁을 텐데 별일이네요.”
왜 저러고 있는지 메리는 모르는 게 좋을 것이다.
레온이 함구하고 시치미를 뗐다.
“좀 잘게.”
“예, 도련님. 센느에 도착하면 깨워 드릴게요.”
“그래, 메리.”
코가 막히니 머리까지 아득했다.
레온이 마차 창문에 기대 눈을 감았다. 어둠이 찾아오자 어젯밤 일이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졌다.
‘공자님!’
물속에 잠겨 있던 레온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소름이 오스스 돋아나는 걸 느꼈다.
태어나 그렇게 두려운 목소리는 처음이었다.
‘공자님! 공자님, 거기 계세요?’
브라운이 휘청거리며 얼음벽 가까이 다가왔다.
레온은 당황하여 주변을 살펴보다 우선 몸을 숨기기로 했다.
‘공자님!’
근처에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에 레온이 얌전히 코끝까지 몸을 숨겼다. 따뜻한 온기가 만들어낸 희뿌연 김으로 시야가 불분명했다.
‘말도 없이 혼자 이러고 계시면 어떡해요. 큰일이라도 나면 어쩌시려고요.’
그러니까 그 큰일을 내고 있는 사람이 할 만한 소리는 아니었다.
‘그냥 좀 추워서….’
이를 어쩌지? 레온이 눈동자만 굴려 주변을 살폈다.
망할 스노우 울프가 옷가지를 물어가는 바람에 해수탕에서 나갈 방법이 전혀 없었다.
‘목욕은 다 끝나신 거예요?’
레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술기운에 용감해졌는지 브라운이 손을 뻗었다.
‘어서 나오세요, 공자님. 새벽이 되니 훨씬 추워지네요.’
‘아, 아니.’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니까요.’
더는 물속에서 버티고 있을 수 없었다. 레온은 우선 브라운을 진정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메리를 불러줘.’
‘예? 자고 있는 분을 뭐 하러요. 제가 도와 드릴까요, 공자님?’
‘정말 말 안 듣네!’
옷이 없는데 뭘 어떻게 돕겠단 말인가. 레온이 극구 사양했다.
누구보다 빠르게 고개를 젓고 있는 동안 이쪽에서 나는 소란스러움에 병사들이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에요?’
‘이런, 깜빡 잠이 들었네.’
‘우리 레온 공자님은?’
망했다. 다들 깨버리다니.
잠든 메리를 불러온다고 해서 이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레온이 눈을 굴렸다. 해수탕 근처에 딱 붙어 언제라도 도울 준비가 된 듯 눈을 빛내는 충성스러운 브라운이 보였다.
‘브라운.’
‘예, 공자님!’
정확히 말하자면 브라운이 걸치고 있는 두터운 로브가 보였다.
‘옷 좀 벗어봐.’
레온이 재빨리 손만 뻗어 브라운의 로브 자락을 붙잡았다.
졸지에 주저앉게 된 브라운이 물속에 잠긴 레온의 얼굴을 가까이서 마주하게 됐다.
‘…….’
‘…….’
오래도록 뜨거운 물속에 있어 그런지 레온의 두 뺨이 붉었다.
늘 은백색 머리칼로 가리고 있던 이마도 물에 젖어 훤히 드러난 지 오래였다.
브라운은 밤빛을 반사해 반짝거리는 레온의 눈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벌떡, 일어났다.
‘야, 어디 가!’
‘메, 메리 부인을 불러오겠습니다!’
‘필요 없어. 너 이리 안 와?’
‘아깐 불러오라고 하셨잖아요!’
‘됐다고. 옷이나 벗으라고!’
‘그런 말 좀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 마세요!’
브라운이 몇 발자국도 가지 못해 도로 붙잡혀 왔다. 로브 자락을 잡고 있는 건 이쪽이었다.
레온이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한번 로브를 세게 잡아당겼다. 당장 벗지 않으면 옷 대신 목숨을 내어드려야 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지금부터 나랑 눈 마주치는 사람이 생길 때마다 네가 묻어줄 사람도 늘어날 줄 알아라.’
‘…예.’
‘물론 너도 포함이야. 너는 내가 직접 묻어주지.’
‘그럴 일 없습니다, 공자님!’
브라운이 후닥닥 두터운 로브를 벗어 던지고 얼음벽 너머로 나섰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걱정하던 병사들이 보였다.
한쪽엔 무기를 들고 있는 이들도 보였다. 살려야 한다.
‘다들 해산! 이대로 출발 준비를 시작하세요!’
‘공자님께선 어디 계시지?’
‘워렌 경도 살고 싶으면 조용히 하고 뒤도세요.’
‘응?’
아직 술에 취한 워렌이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브라운이 기겁하며 워렌의 양 볼을 붙잡았다.
‘제가 파묻어 드리긴 싫으니까 제발 제 말 좀 들으시라고요!’
‘부집사야말로 파묻히기 싫으면 당장 이거 놓지?’
‘아, 저도 싫거든요?’
‘그러니까 놓으라고.’
‘그럼 워렌 경은 죽어요.’
‘죽고 싶어?’
‘말이 안 통하네, 정말!’
공자는 한번 내뱉은 말은 잘 지키는 사람이다. 게다가 나쁜 쪽으로는 잘 잊지도 않았다.
커다란 워렌을 묻기 위해 얼어붙은 땅을 몇 날 며칠 파낼 자신이 불쌍해서라도 명을 따라야만 했다.
브라운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을 때였다.
‘공자님.’
‘헉!’
공자님이라고? 브라운의 얼굴이 두려움으로 일그러졌다.
워렌이 제 볼을 꾹 누르고 있던 브라운의 손을 단박에 치워냈다.
‘사이좋네.’
두꺼운 로브로 전신을 가린 레온이 천천히 두 사람에게로 다가왔다.
‘아닙니다, 공자님!’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긴.’
티 내지 않았지만 레온은 심장이 쿵쿵거리는 것을 느꼈다.
하마터면 들킬 뻔했다. 이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꼼짝없이 여자란 사실을 밝힐 뻔한 것이다.
‘떠날 준비를 해. 곧 있으면 센느에 도착하니 서두르는 게 낫겠어.’
레온이 두 사람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 명을 내렸다.
어서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다들 제정신이 돌아오기 전에 의심의 싹마저 잘라내야 했다.
‘참, 오늘 마차는 둘이서 나란히 몰아. 알았지?’
아무래도 심란하니 두 사람 다 눈앞에서 치워버리는 게 낫겠다.
‘곧 있으면 센느야.’
야영 생활만 아니라면 이런 불편함도 좀 줄어들겠지.
레온은 이제 해수탕이라면 꼴도 보기 싫다는 듯 거세게 발걸음을 옮겼다.